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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우리다"

"고대 선인들의 해양을 향한 꿈이 담긴 원시적인 떼배를 타고 일본문화의 대은인으로 추앙받는 백제 왕인박사의 바닷길을 따라가 일본문화와 일본이 한반도에서 전래됐다는 것을 다시한번 널리 알리겠다. 일본은 백제와 한반도의 이민이 심은 씨앗이 앉은 밭과 같다. 그들의 DNA를 분석해보면 많건 적건 간에 한민족의 피가 80% 넘는 그들 민족에 심어져 있다. 이번 원시적 탐사는 그들 속에 담긴 우리의 문화와 피를 확인하러 떠나는 원정이다."

2001년 영암 왕인문화축제에 맞춰 4월9일 전남 영암에서 고대 한일 바닷길을 떼배를 타고 대탐사에 나서는 채바다(54·한국고대항해탐험연구소장)씨. 원시배인 떼배에 몸을 실은 그의 이번 대탐사는 일만년 넘는 오랜기간 고대문화가 한반도를 통해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에 전래됐음을 널리 알리는 데 있다. 그들 일본이 '우리'를 모른체 할 수는 없을 거라는 의미다.

채바다씨는 이미 96년과 97년 성산포항에서 일본 규슈에 이르는 원시 떼배 항해를 12일간의 파랑끝에 성공하는 등 떼배의 복원과 이 배를 타고 바다를 향한 집념을 불태워온 제주의 바다인이다. 수필집 <일출봉에 해뜨거든(1987)>으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이어 시집 <파도가 바람인들 어쩌겠느냐(94년)>와 <저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96년)>등을 냈고 논문집 '한국 해양문화의 시원과 떼배의 역사적 고찰'에서 보듯 제주바다의 문화적 교두보를 세우고 있다.

이에 영암에서 출발해 왕인의 뱃길을 여는 이번 고대한일 해로 탐험을 계기로 '일본은 우리'라고 주장하는 채바다의 '의미'있는 바다인생을 조명한다.

일만년전의 한일 원시바닷길을 연다

"어릴적 성산포에서 떼배를 탔던 경험이 자라면서 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테우라 불리기도 하는 이 원시배가 남긴 자국은 고향을 떠나 수십년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뚜렷이 각인돼 9년전 다시 이곳 섬과 바다로 나를 이끌고 말았다."

96년과 97년 떼배를 타고 제주∼일본의 고대 바닷길을 재현했던 그의 오늘. "떼배는 제주의 숙명과도 같다"는 채바다의 말 이면에 어쩌면 '떼배는 자신의 숙명'이라는 메아리가 담기길 원했던 건 아닐까.

그는 일만년전 제주와 일본은 비슷한 환경을 지녔고 문화적 이동은 배가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발전된 개념의 배가 없던 시기 떼배는 원시적이지만 문화이동의 중요한 매개체였다고 보았다.

"암사동 선사유적에서 보듯 한반도와 제주에서 유용됐던 떼배를 타고 영암 왕인문화축제를 맞아 고대 해로 속에서 문화의 발자취를 찾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왕인 박사가 일본에 갈 당시 백제는 해양대국으로서 항해술도 뛰어났고 40명 가까이 탈 수 있는 규모가 큰배를 이용했다."

그럼 그는 왜 '무모하게' 떼배를 선택했을까. 떼배의 기원을 보자. '중석기 고산유적이나 경남해안 등 신석기 유적을 일본 규슈 등지 유물과 비교해보면 1만년전에 한반도와 제주, 일본을 잇는 배형태의 해상이동이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 은조시대 갑골문에서 보듯 떼배는 강에서 발현해서 점차 바다로 가는 도구로 이용됐다. 가시거리의 섬과 섬 사이를 잇는 원시항해를 통해 떼배를 타고 문화의 이동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채바다의 논문 中)'

반도국가는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의욕이 강해서 선사시대부터 떼배를 사용했고 그 원형이 보존된 곳이 제주이다. 그는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다른 지방은 대부분 바뀌어 버렸지만 50여년 전만 하더라도 쉽사리 볼 수 있던 제주에서 한국해양문화의 시원과 떼배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떼배를 이용한 한일 고대항로의 탐험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4월 9일의 일정에 대해 "원시항해는 표류적 항해라서 막연히 수평선너머 '신세계'를 좇는 것이지만 영암에서 출발하는 뱃길은 우리문화가 전달된 일본을 목적으로 가는 목적항해이기 때문에 나침반과 지도 등 필수장비를 갖추고 간다. 그래서 떼배에는 원래 없는 돛도 달고 간다"고 했다.

떼배 탐사는 특히 백제시대 '왕인'을 재조명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18세에 시, 서, 예, 역, 춘추에 통달해 오경박사에 올라 태자의 스승이 되고 뒤에 일본에 초청받아 천자문 1권과 논어 10권을 비롯 공예, 의상 등 전문 기능인을 데리고 가 일본의 문명기틀을 닦아 성인으로 추대된 왕인의 발자취에는 일본 동대사 비로사나불과 법륭사 등 우리나라 문화가 고스란히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채바다 일행의 일본도착지는 후쿠오카의 가라쓰 항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해군기지 전초기지였던 곳으로 이미 백제 등과 교역하는 고대항구로서 자리잡았던 곳이다. 그는 가능하다면 도착후 한국에서 따라온 호위선에 떼배를 싣고 오사카의 왕인박사능을 참배할 예정이라면서 그 과정만으로도 일본이 '잊고'있는 그들 문화의 뿌리를 각인시켜줄 것으로 보았다.

성산포 앞바다에서 역사를 담금질하는 시인 채바다

'바람에 흐르다가/파도에 밀리다가/캄캄한 밤이 되면/별빛등대 삼아/뱃길 찾아간다/물길 노저어 간다/앞서거니 뒷서거니 물굽이 돌며/거센 파도에 업혀간다/날센 바람에 실려간다/동녘 하늘로/열도를 찾아/선조들이 넘나들던 현해탄 너머로'

향토시인 채바다의 시 '고대 한일 뱃길 떼배 타고'에서 나타나듯 그의 인생은 바다와 시로 집약된다.

"바다에서 얻는 사람들의 정신적 의지 그리고 함께 살아가야 할 도전과 탐험의 시를 추구한다. 나는 시에 치열한 삶과 역사와 바다를 담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그 메시지가 강하게 전달되지 못한다면 이렇게 고대 한일해로 대탐사를 나서는 것처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 시와 삶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느낀다. 무언가 부여된 숙명이 있어서 그는 바다를 노래하고 바다로 나서는 걸까. 그의 시 '나는 가야한다네'를 보자.

'파도를 밟고 간다/바람을 이고 간다/망망한 대해 역사의 숨결 발자취를 따라/…천년 이천년 삼천년 그보다 더 오랜/뱃길을 쫓아/…/조선땅 세우고 일본을 깨우친 선인들/…/나의 무력함을 시험하려 하느냐/나도 너희 앞에 물러설 줄 모르고/너희도 내 앞에 지지 않을세라/…/선조들이 어떻게 건너와서 일본 문화의 꽃을/피우게 했는지/…/가고 싶구나 가고싶구나/어찌 내가 너희 항복을 받겠느냐/천년의 숨소리를 듣고파/그 숨결을 찾고자 할뿐/…'

성산포 앞바다에 이르면 가슴속 깊이 뭔지 모를 자연이 일깨워주는 감동이 벅차오르게 되는데 바다를 역사가 담금질되는 보금자리로 보는 그에게 시와 바다를 좇는 건 불문가지.

채바다는 3월초 세번째 시집 <일본은 우리다>를 통해 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예정이다. 일본의 문화적 얼굴이 바로 우리의 얼굴이라는 시각에서 '일억의 우리 인구'를 되찾는 단초를 바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 일제시대 등 시시비비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우리나라는 천오백년이 넘는 유대관계가 있다. 왕인박사가 일본에 문화를 일으켜 아스카 문화와 나라 문화가 번성할 당시 아스카 지방인구의 8,9할이 백제의 후예들이었다. 왕국의 부침 속에 일본으로 빠져나간 이민들은 명망있고 문화적 보물을 지닌 백제유민과 가야, 고구려, 신라인 등이었다.

그들의 피가 지금 일본인구 가운데 일억에 흐르고 있을 것"이라면서 세번째 시집 <일본은 우리다>를 일문번역판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같은 주장은 오히려 일본사학자나 사료에 드러난 것들이라고 피력했다. 그의 역사바로세우기가 어디로 귀착될지 주목된다.

이것이 인생이다

"어릴 적부터 지금의 모습을 기대한 건 아니다.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다녔던 것처럼 나의 진로는 바다와는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는 듯 했으나 십여년전 수필 '일출봉에 해뜨거든'을 집필하면서 어릴적 테우를 타던 기억 그리고 성산포에서 축적된 환경이 결국 나를 바다로 이끌었다."

우연의 일치처럼 바다를 탐험해야 한다는 신념이 머리를 가득 채웠었다는 자연인 채바다. 십여년전 계획을 거쳐 9년전 성산포로 돌아온 지금 성산포 오조갑문을 지나 '시인과 사람들'이란 통나무집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지천명도 지나 이제는 잔주름의 골도 깊어져 테우를 마냥 신기해 탔을 법한 어린 시절도 까마득한 나이. 하지만 자신의 도전과 탐험이 우리 젊은이에게 남김없이 전해지길 바라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젊음이 느껴진다.

한 두번도 아닌 이번 떼배 탐사를 가족들은 어떻게 보는지 넌지시 물어보았을 때 바다인이면서 시인으로 불리우는 채바다의 눈빛에 잠시 고뇌가 스치는 듯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아주건 안알아주건 간에 찾아야할 문화의 자취를 내가 '부여받은 것'이라는 그의 표정엔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인상이 강하게 묻어있었다.

"앞으로 계속 해나갈 일은 떼배의 복원과 함께 한일간 역사적 진실을 밝혀 일본국민은 우리국민이라는 걸 밝히는 것"이라는 시인 채바다. 그의 바다인생은 망망대해처럼 가늠하기 어려웠다.


*채바다 시인 약력*

제주 성산포에서 나다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 졸업
중당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수료
한국자유기고가 회원
사랑의 가훈 써주기 운동
신혼부부를 위한 결혼 훈 써주기 운동
광복 50주년 한라에서 백두까지
통일 염원 국토 종횡단 4,300K 시낭송(1995년)
古代 한일 海路 테우탐험 (1996)
수필집 《일출봉에 해뜨거든》(1987)
시집 《파도가 바람인들 어쩌겠느냐》(1994)
석전시 동인 《생각하는 돌》(1994년), 《은밀한 모자이크》,
《생살 터진 꽃자리》(1998)
《일본은 우리다》(2001)

덧붙이는 글 | 제주타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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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학신문기자, 전 제주언론기자, 전 공무원, 현 공공기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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