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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배웠고 기억하고 있을까? 현모양처 훌륭한 어머니요 본받을 여성의 표본인 신사임당? 아니면 왜적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과 나라에 대한 애국심으로 적장을 안고 강물로 떨어진 논개? 그것도 아니면 신라시대 지혜롭게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선덕여왕?

냉정히 생각해보건대 그들은 결코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사회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남성들의 역사 속에서 짤막하게 등장하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역사에 있어 아무런 신념도 행동도 없이 그저 살아가기만 했다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단지 우리가 몰랐고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알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만큼 세월의 먼지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여성사건사>를 펼치면 너무나 생소한 여성들의 역사가 펼쳐진다. 1931년 <동광>이란 잡지에 실린 글을 살펴보자.

"평양의 2300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해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하여 죽는 것이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끝까지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노동 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봇물처럼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던 80년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결연한 선언이다. 하지만 이 선언의 주인공은 1931년 평양 을밀대에 올라 부당한 임금 삭감과 해고를 고발했던 강주룡이라는 여성 노동자다.

집안에 머물면서 집밖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여성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던 시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유교적 관념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던 시절, 그는 세상의 불의에 대해 이렇게 맞서다가 빈민굴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내친김에 다른 여성의 이야기도 살펴보자. 남자처럼 세상을 살아보겠다고 긴 머리를 자르고 남장을 한 채 강습소에 나타났던 강향난의 이야기는 어떨까? 전직 기생이었던 그는 그 당시 유행하던 자유연애소설의 주인공처럼 청년문사의 도움으로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배화학교에 입학에 새로운 배움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그에게 도움을 주던 사람과 헤어지고 난 후 좌절해 자살을 택했다가 다른 이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여성성을 상징하던 삼단같은 머리채를 잘라내고 남성과 똑같이 공부하고 세상을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 여성의 도발적인 행동으로만 치부될 수 없다. 그 당시 여성들이 처해 있던 처지와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이 치러야 했던 갖가지 변화를 어떻게 체험했는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렇게 조각조각 버려져 있던 여성들의 삶과 이야기를 하나로 모아 그 속에서 역사를 남성중심적으로 왜곡하게 만들었던 '성별정치학'이 어떻게 작동해왔으며 그로 인해 가려졌던 여성들의 역사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제시한다.

혼란의 일제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은 물론 새마을 운동 최대의 역군으로 정권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당했던 여성들의 이야기, 가족계획이란 이름으로 임신과 출산을 통제했던 사실들, '순결한 여성의 정조만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말을 남긴 박인수 사건, 성폭력에 대한 실체를 본격적으로 드러냈던 부천서 성고문사건, 호주제 폐지 운동과 최근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황혼이혼에 대한 문제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며 성별정치학을 통해 왜곡되고 가려져왔던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본다.

지은이들이 '두껍게' 복원해낸 이 책은 20세기 한국 역사가 여성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체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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