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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문화방송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박건식 PD가 일본 현지 취재를 다녀온 뒤 쓴 글로, 아직까지 속설로만 존재했던 일본의 한국전쟁 참전 문제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일본군은 원산항의 기뢰 제거, 인천상륙작전 준비, 간호병 파병 등 간접적인 지원뿐 아니라 731부대 요원에 의한 세균전 지원과 원폭투하 계획에까지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일본의 극우 세력이 한국전쟁 참전의 대가로 한반도의 재식민지화를 미국에게 요구했다는 점이다. 이 계획은 불발로 끝났지만, 일본은 한국전쟁 참여의 대가로 경제 부흥과 자위대 창설의 기회를 얻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전범국가에서 어엿한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된다.


한반도를 찾은 구 일본군의 숨겨진 속셈

1950년 6월 25일. 세계의 냉전체제 속에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놓고 전쟁이 시작된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전범국 일본! 이들 또한 전쟁 중 한반도에 머물렀다. '군사력 폐지 및 비무장화'를 규정한 평화헌법을 통해 어떠한 전쟁 참여도 하지 않겠다던 일본의 한국전 참여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 역사 속 '사실'이다.

참전의 대가로 요구된 한반도!

최근 비밀해제 된 문서에 따르면 1200명의 소해대원이 기뢰 제거에 참여했으며 한국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자료를 축적해 놓았던 일본인들은 정보·첩보원으로 한국에 투입, 전쟁에 필요한 첩보활동을 펼친다. 세균전 의혹과 731부대원 출신들이 세운 혈액은행, 인천상륙작전 속의 숨겨진 일본첩보원, 우익들의 끊임없는 참전 요구 등 광범위하게 펼쳐진 일본인 참전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이다.

한국전쟁은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전쟁특수(戰爭特需)로 인해 일본은 극심한 경제난을 극복하고 국제무대에 오르기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조기체결을 이룬다. 또한 일본 재군비를 위한 경찰예비대와 해상자위대의 창설이 빠르게 진행되어 간다.

한국전쟁 속에 숨겨진 일본정체의 비밀을 밝혀라!

직접 참전했던 일본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일본 참전의 새로운 비밀을 밝히고 일본이 참전을 통해 일본이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그 해답을 알아본다.

해군부활을 꿈꾸며 원산 앞 바다를 찾은 1200명의 일본소해부대
밝혀지는 일본인 전사자의 비밀 "한반도 해역에서의 죽음을 비밀로 해달라"


1950년 10월,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원산상륙작전에 필요한 기뢰 제거 작업에 참여할 것을 일본에 요구한다. 소해 작업 참여는 어떤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는 평화헌법을 위반하는 행위임에도 불구, 요시다 총리는 극비리에 소해정 파견을 결정한다. 이에 25척의 소해정과 1200여명의 소해대원들은 원산, 흥남, 해주, 군산, 인천, 남포 지역에서 소해 작업에 참여한다.

당시 소해정 파견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심지어 작업 중 전사한 '나카타니 사카타로(中谷板太郞)'의 가족들에게는 한국 해역에서의 죽음에 대해 함구해줄 것을 명령받는다. 또한 수송선 LT636이 기뢰에 맞아 침몰, 22명의 일본인이 사망했으나 그들의 죽음은 공개되지 못하고 있다.

소해 작업에 참여한 일본인들은 자신의 참여가 일본 재건에 도움을 주었으며 따라서 참여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첫 해외파병이 된 한국전쟁에서 38선을 넘어가면서 소해작업에 참여한 일본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일본인 참전의 진실을 밝힌다.

일본특수부대인 고다마 기관, 나가노 학교 출신의 첩보원, 한국전쟁 침투!
캐논기관 출신의 해군소령 연정, "일본인 장교 세 명과 인천에 갔었다"


연합국최고사령부(GHQ) 내 G2 소속의 첩보기관이었던 캐논기관. 캐논기관은 캐논육군소령의 지휘 하에 전쟁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수집, 분류하는 정보·첩보부대이다.

한국전쟁 당시, 캐논기관은 정보·첩보훈련을 받은 3000여명의 사람들을 북한, 만주, 중국지역에 침투했으며 이들 중 한국 지리에 밝고 한국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는 일본인들의 참여가 확인됐다. G2의 윌러비 장군은 민간정보부대인 전사편찬실을 운영, 한국전쟁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이곳에서 관리했다.

캐논기관 소속의 정보장교 출신인 '연정'씨의 증언에 따르면 소해, 지리에 밝은 일본인 장교 세 명과 함께 인천 지역에 침투,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한 적이 있다고 한다. 조선의 지형에 익숙한 일본인들은 미군참모부와 함께 수색대, 정찰대로 한반도 전 지역에서 활동했던 것이다.

이 외에 전쟁에 사용되던 모든 지도가 일본인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당시 GHQ의 요청으로 군용지도를 제작했다는 '교도인쇄사'에서 한국전쟁에 사용된 서울지역의 지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의 정보기관에서 침투된 일본인의 활동을 알아보고 정보장교 출신인 '연정'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정보부대로 활동했던 캐논 기관의 정체를 밝힌다.

731부대 출신이 설립한 혈액은행,
한국전쟁에 7000인 분의 혈액을 팔다!
38선 부근에 난데없이 출연한 유행성출혈열


1951년 겨울, 38선 부근에서는 난데없이 '유행성출혈열'이라는 병이 확산된다. 유행성출혈열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발견된 적이 없는 병으로 추운 날씨에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악명 높은 731부대의 세균연구 성과를 그대로 넘겨받는 대신 이시이 시로, 기타노 마사지, 나이토 료이치와 같은 이들을 전범재판에서 살려준다. 이들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세균을 연구하는데 731부대원이었던 '카사하라 시로'는 406부대에서 계속적으로 유행성출혈열을 연구함으로서 세균전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특히 나이토 료이치, 기타노 마사지, 후타키 히데오와 같은 731부대 출신들은 '혈액은행(血液銀行)'을 설립, 한국전쟁에 필요한 혈액의 공급을 담당한다. 나이토 료이치는 한국전쟁에서 혈액을 팔아 챙긴 돈으로 '녹십자'라는 의학회사를 설립, 80년대 일본 에이즈 사건의 주범이 되기도 하는 인물이다.

731부대에서 개발한 혈액건조기술을 이용해 일본에서 싼값에 혈액을 사서 미군에 비싼 값으로 되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재기에 성공한 731부대원들의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본다.

인천에 침투된 일본 정보장교 출신들의 첩보활동. '일본알류미늄공업'에 요구된 명령, 60개의 사다리를 만들어라!

맥아더 장군의 승리를 이끌어줬다는 인천상륙작전. 하지만 일본 없이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일본의 참여는 깊숙했다. 상륙작전 한달 전에 투입된 정보요원들은 인천의 모든 정보를 수집했으며 이 정보를 바탕으로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됐다.

간만의 차가 커서 상륙작전으로서는 최악의 조건을 가졌다는 인천의 문제점을 해결해준 것이 바로 일본에서 급조된 '알류미늄 사다리'이다. '일본알류미늄공업'는 당시 GHQ의 명령으로 60개의 사다리를 만들어 공급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 외에 인천상륙작전 시 동원된 일본인 선원과 항만노동자는 3000여명에 이르며 극심한 경제난으로 허덕이던 일본노동자들에게 이러한 일자리는 숨통을 열어주는 기회가 되었다.

'부끄러워요'라고 말한 일본인 포로 '쯔이(筒井淸人)'.
북한 흥남 폭격의 비밀, 일본 원폭개발의 의혹.
일본 우익의 끊임없는 요구, '일본인 참전을 허락해달라'


1952년 8월, 일본인 포로 '쯔이 기요히토(筒井淸人)'가 송환되어 왔다.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그는 한국국군 제1사단 소속으로 전투에 참가해 51년 9월, 서부 전선에서 포로가 되었다.

또한 네오히라쯔카(重治)는 50년 1월, 미기병 제1사단 E8중대 소속으로 페인트칠을 하러 불려간 후 사망했다. 이들과 같은 일본인은 더 있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일본인 참여를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

일본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인 1945년 경, 원폭 개발에 필요한 전력량과 우라늄, 텅스턴 등의 광석물이 풍부하고 질소비료공장 시설을 갖춘 흥남 지역에서 핵무기 개발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러한 의혹으로 한국전쟁 당시 흥남 지역에 원자탄 투여까지 검토됐으나 트루만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흥남 지역에 집중 투하된 미사일은 일본의 핵개발 시설을 폭파하기 위한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일본 우익을 대표하는 '고다마 요시오'는 전쟁 발발 직후 연합국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전쟁 참여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다. 당시 일본 우익에서는 끊임없이 전쟁 참여를 주장하는 서한을 연합국사령부에 전달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기회로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었던 것이다.

일본 경제재건의 희망을 안겨 준 한국전쟁
전승국에서 제외된 한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속사정
'일본재군비'를 위한 절호의 기회, 한국전쟁


일본은 한국전쟁을 가리켜 '천우신조(天佑神助)'라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경재난에 허덕이던 일본에게 한국전쟁이라는 '전쟁특수(戰爭特需)'는 경제회복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헤매던 노동자들은 군수물품 제조를 위해 고용됐으며 한국으로 건너와 항만시설업자, 하역업자 등의 노무자로 일한다. '동서기선'이라는 선박회사는 당시 선박을 제조해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한국전쟁은 일본 재군비의 기회를 제공한다. 1948년 이후 미국의 대일 정책이 변화하면서 일본 재무장을 위한 논의가 시작된다. 이러한 움직임에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한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이에 1950년 9월, 7만5천명의 경찰예비대가 창설되고 곧이어 1952년, 해상경비대가 발족한다. 이들은 이후 일본자위대와 해상자위대의 발판이 되고 있다.

1952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도 한국전쟁은 영향을 끼친다. 한국전쟁은 끊임없는 미국에 대한 협력을 통해 일본을 유리한 입장에 놓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체결 과정 중, 한국은 전승국에서 제외됨으로서 재일 교포 문제 등의 보상처리를 해결하지 못했다. 또한 강화조약 체결과정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로 표기됨으로써 이후 영토분쟁의 시작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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