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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와 이문희.

이름만 보면 자매지간인가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은 2년 전만 해도 서로 전혀 모르던 사이였다. 서울 잠실에 사는 이경희 씨는 올해 결혼 10주년을 맞은 아줌마다. 초등학교 3학년 아들과 6살인 딸도 두었으니 그야말로 딱 아줌마다. 서울 신림동에 사는 이문희 씨도 올해 결혼 2주년을 맞았으니 아줌마다. 아직 아이가 없고 남편과 보낸 결혼 생활이 2개월뿐이니 아줌마란 이름이 낯설지는 모르지만.

이경희와 이문희.

이 두 사람은 아줌마라는 점 말고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남편과 생이별하고 있다. 이들의 남편은 국가보안법 위반사범들이다. 지난 99년 9월 국정원이 발표한 이른바 ‘민혁당’ 사건 당시 언론에 올랐던, 당시 월간 말 기자였던 김경환(4년 6월형) 씨가 이경희 씨의 남편이고, 당시 대학 강사였던 심재춘(3년 6월형) 씨가 이문희 씨의 남편이다.

어둠이 있으면 빛도 있게 마련인가. 이들 남편이 구속된 후 이경희 씨와 이문희 씨는 둘도 없는 절친한 자매지간처럼 지낸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을 겪는 게 친해진 이유겠지만, 단순히 그 고리타분한 고사성어로 관계를 설명하기엔 무척 아픈 사연들이 골골이 흐른다.

올해 서른인 이문희 씨는 연애를 통해 결혼한 남편 심재춘 씨와 딱 60일 동안 함께 살았다. 신혼생활 두 달째이던 99년 8월 20일, 국정원 수사관들이 신림동 신혼집에 들이닥쳤고 그날 이후 남편과 함께 생활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 다닐 때 ‘범생이’였다는 이 씨는 남편이 이삼 일 안에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사가 진행될수록 남편에겐 간첩죄(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가 씌워지고 있었다.

“그때서야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간첩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이 무섭잖아요.”
이문희 씨는 남편이 구속된 지 한 달 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론 매일 서울구치소에 있는 남편에게 면회를 갔다. 단 7분의 만남을 위해. 면회가 끝난 하루의 나머지는 내일의 면회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일 뿐이었다.

그때 만난 게 이경희 씨였다. 이경희 씨 역시 99년 9월 4일 아침 8시 30분 무렵 집에 들이닥친 국정원 수사관들을 남편 김경환 씨와 함께 만났다. 이경희 씨는 그때나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때나 남편이 이처럼 오래 감옥 생활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 아들 일지와 네 살 된 승지에게도 아빠가 잠깐 있다가 올 거다는 정도로만 얘기했다. 그러나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사당역에서 이문희 씨 차를 타고 함께 서울구치소로 향하는 길은 결혼 이후 첫 출퇴근 길이 되었다.

남편과 면회가 끝나고 나면, 이경희 씨와 이문희 씨는 차나 식사를 함께 하면서 때로는 술 한잔 나누면서 서로의 마음을 위로했다.
“남편이 구속된 전후 복잡한 상황을 가족에게 말하겠어요? 시어머니에게 하겠어요! 모두들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는데. 친구들에게 얘기를 하자니 쉽게 설명될 사안도 아니었고. 그래서 경희언니에게 속내를 털어놨어요.”

마음이 열리자 두 사람은 밤마다 전화통을 붙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이런 저런 얘기를 털어놓았다. 재판 심리가 열린 날이면 시시콜콜한 얘기라고 혹 희망의 빛이 보일 만한 얘기라면 빠지지 않고 나눴다. 때로 이문희 씨가 감정이 격해질 때는 울기도 했고, 이를 이경희 씨가 달래고 위로하기도 했다. 보통 통화를 하면 한두 시간을 훌쩍 넘겨 새벽 한두 시가 되어야 끝나곤 했다.

이들은 남편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재판 뒷바라지에 온 힘을 쏟았다. 이경희 씨는 검찰이 남편에게 씌운 국가기밀에 대한 반론을 펴기 위한 자료를 찾아 나섰다. 직접 발품을 팔아 서초동 도서관에 들러 80년대에 발행된 신문을 죄다 뒤적거렸다. 10여 년 전 남편이 구속되었던 반제동맹 사건 기사를 읽을 때는 그때 정부나 지금 정부나 뭐가 달라졌나 싶어 분노하기도 하고 비애가 스미기도 했단다.

이문희 씨 역시 남편의 혐의 중 구속의 결정적 요소인 국가기밀의 허구성을 입증하기 위해 여수까지 직접 차를 몰고 내려갔다. 그곳에서 국가기밀이라고 주장하는 여수 해변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남편 심재춘 씨가 구속된 결정적인 사유는 여수해안을 찍은 사진이 국가기밀이란 점 때문이었는데, 어이없게도 이문희 씨는 몇 달 전 남편 면회길에 탄 대구 지하철에서 그 여수 해안을 찍은 사진이 광고로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남편의 구속이 길어지자, 여느 양심수의 가족들처럼 이들도 민가협 활동에 참여했다. 올 초 서울역에서 열린 3대 개혁입법 관련 집회에 참석해 국가보안법 폐지 서명운동을 받기도 했다.
“한 명 한 명 서명을 받다 보면 힘이 솟고 남편이 나올 수 있는 길이 보이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나 서명 받는 일이 이경희 씨처럼 용기만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문희 씨는 때로는 서명 받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절감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는데, 처음으로 ‘빨갱이’ ‘미친 년’이란 욕을 먹어 보았어요. 그때 느꼈어요. 뭐 하나 바꾸려면 자존심이고 뭐고 포기해야 하는구나. 그러면서도 서명을 받으러 다니고… 그 절절함이란 가족이 아니면 모르죠 그 심정은”

이경희 씨는 처음엔 민가협 집회에 나가는 게 싫었다고 한다. 그곳에 가면 양심수 가족들끼리 서로 위로를 주고받고 하는데, 매번 아픈 마음을 확인하는 게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한번은 집회를 하고 있는데 문희랑 저랑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둘 다 손수건도 없고 가진 건 달랑 휴지 한 장이잖아요. 그 집회가 끝나는 동안 휴지 한 장으로 돌아가면서 눈물을 닦은 적도 있어요.”

동고동락(同苦同樂)만큼, 특히 동고(同苦)만큼 사람관계를 절친하게 해주는 일은 없다. 지난해 가을 무렵 김경환 씨는 안동교도소로, 심재춘씨는 대구교도소로 이감된 이후에도 이들의 ‘우정’은 변함이 없다. 지난 6월 15일 이경희 씨와 김경환 씨의 결혼 10주년인 날, 이문희 씨와 심재춘 씨는 한겨레 신문에 조그맣게 결혼 10주년 축하 광고를 내주었다. 때로 이문희 씨는 김경환 씨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이경희 씨는 심재춘 씨에게 격려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이런 이들을 보고 주변에서는 “대개 조직사건이 터지면 가족들끼리 앙숙이 되곤 하는데, 두 사람이 친한 걸 보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이경희 씨와 이문희 씨의 관계이지만, 전화통화를 하면서 서로 거짓말을 할 때도 있단다.
“사면을 고대하면서, 사실 안 나올 걸 알면서도 서로 나올 것 같다고 전화를 하죠. 지난 해 12월 성탄절엔 공안 사범 사면이 없는 줄 알면서도 남편이 사면이 될지 모른다고 서로 얘기를 나눴어요.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그래야 살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이들은 서로의 삶을 ‘두 달 살이 인생’이라고 한다. 1월의 설날부터 3월 삼일절, 5월 무렵의 석가탄신일, 8월 8.15, 10월 무렵의 추석, 12월의 성탄절 등 혹시라도 이런 기념일이나 명절에 사면이 이뤄질까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모든 날에 매번 사면이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긴 하지만.

이들은 오늘도 그 두 달 살이 인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6월 27일 서울 명동 가톨릭 회관 대강당에서 이경희 씨와 이문희 씨는 다시 만났다. 이경희 씨 표현에 의하면 “결혼식 이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 보긴 처음인 자리”였는데, 바로 ‘김경환 심재춘 석방을 위한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국회의원 정범구, 시인 박노해, 가수 강산에 씨 등 300여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들 두 사람은 남편의 석방을 위해 모인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도와 달라는 호소도 잊지 않았다.

“면회 갔다 돌아올 때마다 우리 부부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별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제는 그런 별거를 끝내고 싶습니다. 일요일이면 남편은 일지를, 저는 승지를 데리고 목욕탕 앞에서 헤어진 후 두 시간 뒤에 만나곤 했는데, 그런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주변 분들께 괜찮다고 말하곤 했는데, 사실은 괜찮지 않습니다. 남편이 저와 아이들 곁으로 하루 빨리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평소 쾌활하고 걸걸했던 이경희 씨는 인사를 하다가 목이 메여 울먹였다. 이문희 씨는 석방 모임에 온 이들에게 전하는 고마움은 담은 남편의 편지를 읽었는데, 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추신이 적혀 있었다.
“여보 너무 급해서 (글이) 조금 투박해. 마음만 전해졌으면 좋겠어. 언제나 그랬듯이 내게 부족한 건 당신이 채워주었잖아. 그러니까 알지? 부탁해 모임이 당신에게 큰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많이 사랑해.”

요즘 이들은 이번 8.15 때 남편의 사면이 이뤄지길 간절히 바라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 “남편이 나오면 요리를 마음껏 하라고 가스오븐렌지를 사 두었다”는 이경희 씨와 “남편에게 편지 쓰려고 맘만 먹으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어서 기결된 후 단 한 통밖에 쓰지 못 했다”는 이문희 씨.

이들은 오늘도 국가보안법이 어떻게 한 개인의, 한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쓸어버리는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고통을 담보로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학습해야 한다면, 또는 이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국가보안법 유지를 주장한다면, 이 또한 보안법보다 더 반인간적인 자화상을 우리가 그리고 있는 게 아닐까.

오늘은 인터뷰 말미에 이문희 씨가 한 말을 듣고, 이들 두 사람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해줄 수 없을 것 같다.
“남편에게 그래요. 경희 언니처럼 좋은 사람 만나게 해준 것은 고맙게 생각한다고. 어디서 이런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덧붙이는 글 | 김경환 심재춘 씨 사면을 위해 사랑과 관심을 주십시오. 마음을 보태주실 분은 인권실천시민연대 홈페이지(www.hrights.or.kr)에 마련된 서명란에 서명을 해 주십시오. 
김경환 심재춘 씨 석방을 위한 서명용지를 보냈더니 어떤 분이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핏볼테리아라는 아메리카대륙 태생의 개를 좋아하는데, 이 개는 싸움에서 지는 경우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으며, 최소한 비긴다고 하더라….”
이번 일에서 비기는 일은 사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경희 이문희 두 사람의 가정을 평상시처럼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 일일테니까요. 
 
 
<사건 개요> “납득할 수 있는 조처를 해 달라”     
- 김경환 심재춘 씨의 재판결과 
  
전 월간 말 기자였던 김경환 씨는 현재 4년 6월형을 선고받고 안동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김경환 씨에게 내려진 죄명은 국가보안법상 편의제공 및 국가기밀 누설.
  
검찰은, 김경환 씨가 91년 2월경 김영환 씨와의 연락관계에 의해 북한 공작원 진운방에게 건넨 ‘주체기치 9호’의 내용이 국가기밀에 해당되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상 국가기밀 누설에 해당된다고 기소했다. 

아울러 98년 10월경 진운방을 다시 만나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간첩 방조죄를 적용했다. 이에 재판부는 98년의 간첩방조와 관련한 기소에 대해서는 편의제공으로 해석해 1년형을 내렸지만, 91년 주체기치 9호 건은 검찰의 기소대로 3년 6월형을 내렸다. 

이 판결에 대해 김 씨의 변호인 측은 검찰이 ‘국가기밀’이라 밝힌 글은 서울대 박사 논문을 인용한 것과, 일간지 기사들을 정리한 내용으로서 국가기밀에 해당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또한 구속될 당시 대학강사였던 심재춘 씨에 대해 북 공작원 진운방을 만난 과정을 편의 제공에, 또한 함께 동승한 진운방이 촬영한 여수 해안가 사진이 국가기밀에 해당된다고 해 국가기밀 누설 등을 적용했다. 이에 재판부는 검찰의 진술을 상당부분 받아들여 3년 6월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심 씨의 변호인 측은 누구나 사진 촬영이 가능한 여수 절경이 국가기밀에 해당되지 않고, 심재춘 씨의 여수행은 애초 진운방이 김경환 씨와 갈 예정이었지만 김경환 씨가 나타나지 않아 아는 선배의 부탁으로 급작스럽게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두 사람 모두 석연찮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중형이 내려진 판결을 두고, 자연스레 민혁당 사건에 관계된 김영환 씨 등과의 법적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국정원 수사에 의하면 - 또한 김영환 씨의 자백에 의하면 - 김영환 씨는 민혁당 조직을 결성하고 모든 활동을 총괄한 최고 책임자였다. 그는 조직의 최고 결정 기관인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북한에 밀입북하여 당시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에게 검찰은 '공소 보류'로 인정, 아예 법정에도 세우지 않고 석방했다. 

‘주범’ 김영환 씨와 ‘종범’ 김경환, 심재춘 씨에 대한 엇갈린 법적 판단에 대해, 지난해 6월엔 현직 언론인들이 김경환 씨의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이들의 주장은 "무죄를 선고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납득할 수 있는 조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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