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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내가 좀 별나게 살지 싶다. '안티조선' 운동으로부터 발전된 '언론 개혁'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요즘은 계속적으로 그쪽 방향의 글만 쓰고 있다. 최근에 청탁 받은 잡문과 콩트, 그리고 단편소설을 써야 할 일이 바로 코앞에 놓여 있는데, 마음은 여전히 온통 콩밭에 가 있는 형국이다.
요즘에 거의 연일 집중적으로 쓴 언론 개혁 관련글들이 벌써 16편에 이른다. 이렇게 단시일에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컴퓨터 덕이고 인터넷 덕이다. 사이버 공간의 여러 유명 사이트들에 마음 대로 글을 올릴 수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인터넷 세상 망망한 사이버 공간에는 험한 바람이며 파도도 있고, 크고 작은 암초들도 많지만, 내가 스스로 좌초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무한정 항해를 계속할 수 있다. 나는 일단 그렇게 하리라고 작정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언론 개혁 관련글들을 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바, 언론 개혁이라는 건 단순한 명제가 아니다. 그저 언론사들의 권력 체제와 비리 구조를 개선하거나 혁파하고, 사주로부터 '편집권'을 독립시키는 등의 직접 과제로만 축소되고 마무리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언론 개혁 문제는 이미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진정한 가치관 확립이라는 명제와 맞물려 있다.
언론 개혁을 잘만 이루어낸다면 우리 사회의 진정한 가치관, 참다운 사회공동선, 올바른 국민정신(또는 민족 정기) 등을 추구할 수 있는 확실한 터전을 닦을 수가 있다. 그 터전에서 통일 논의를 발전시키며 국민의 통일 역량을 키워갈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발전 지향적이고 희망적인 인식 때문에 나는 한 사람의 글쟁이로서 기꺼이 언론 개혁 운동에 뛰어들어 내 나름껏 고뇌 어린 생각과 희망과 주장들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펼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안티조선 운동 사이트인 <우리모두>와 <한국소설가협회> 홈에만 글을 올렸는데, 내 글들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 <창비>와 <한국일보 정보동호회> 등의 유명 사이트들에 옮겨져 올라 있는 것을 알게 된 연유로, 마침내는 내가 직접 여러 사이트에 같은 글을 올리는 일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글들이 제법 주목을 받고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최근부터는 초대형 인터넷신문 사이트인 <오마이뉴스>의 고정 연재 코너 기자로도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하루 평균 4, 50만 명이 접속을 한다는 <오마이뉴스>의 '언론' 란에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라는 이름의 방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미 그 방안에 최근에 쓴 20여 편의 글이 모두 올려져 있는 것이다.
인터넷 세상에서 제법 주목을 받게 됨에 따라 내 개인 홈페이지에도 방문자들이 급증하면서 '자유게시판'과 '방명록'상에서 논쟁이 벌어지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됨에 따라 나는 마치 전쟁터에 나와 있는 듯한 기분이다. 내 글을 읽고 깊이 공감을 한 나머지 지지와 격려의 뜻을 보내주는 이들만 있는 게 아니다. 반박이나 비판을 접하는 것이야 세상의 이치상 당연한 일이지만, 과격한 언사나 비틀고 꼬아대는 말들도 많고, 때로는 무지막지한 폭언을 접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것은 이미 각오한 일이고 어느 정도 면역도 되어서 굳이 구애받을 필요는 없지만,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안타까운 심정을 맛보곤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언론 개혁 관련글들을 전국적인 유명 사이트들에만 올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고장 태안군청의 홈페이지에도 계속 올리곤 했다. '언론 개혁' 문제가 결코 정치 차원의 일만은 아니고, 우리 시대의 참으로 중요한 명제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런만큼 그것은 좀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 사항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고, 누구라도 논쟁의 흐름을 제대로 보고 논의 구조를 잘 살피므로써 바람직한 큰 여론의 형성에 일조하는 것이 국가사회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다시 말해 오늘의 최대의 명제가 된 '언론 개혁'에 관해서 내가 살고 있는 고장 태안의 군민들과 함께 '깨어 있는' 국민으로서의 관심을 알차게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고장 태안군 홈 사이트에서 가장 심각하고도 혹독한 비난과 언어 폭력에 직면해야 했다. 익명의 공간 그 어둠 속에 숨어서 제 마음대로 씹어대는 소리들이었다. 그 가공할 익명의 포악성 속에서도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나와 이문열에 대한 단순 비교 논법이었다.
네가 감히 이문열 씨의 문학을 흉내라도 낼 수 있느냐. 이문열 씨와 나이가 같다고 해서 함부로 까부는 것이냐. 어떻게 너같이 무명에 가까운 작가가 이문열 씨 같은 대작가에게 대들 수가 있느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 아니냐. 이문열 씨를 공격해서 이름 좀 얻으려는 수작 같은데 꿈 깨라 등등이었다.
나로서는 일단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그런 소리들에 일일이 대꾸를 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고, 대꾸를 하려고 들면 자칫 이문열 씨처럼 대작을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내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나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있었다. '내 동갑네 이문열 선생께'라는 제목의 내 글이 영 못마땅하고 문제가 많은 것으로 느꼈는지, 정말로 문제가 많은 질문 형식의 글을 익명으로 '자유게시판'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내 홈까지 방문하여 올려놓은 글이라서 나는 예의상으로도 간략하게나마 답변 형식의 글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이문열의 작가로서의 기본 정신과 오늘의 처신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참으로 많지만, 그 구체적 논급은 차후로 미루기로 하고, 내 홈피 '자유게시판'에 비교적 간략하게 올려놓은 그 답변글을 오늘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전략) 토론 문화와 관련하는 님의 의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우리 인간은 운명적으로 불완전하며, 많은 생각의 오류 속에서 살게 마련이니까요.
그렇지만 그 한계와 오류의 위험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또한 인간입니다. 그 노력 속에는 당연히 고뇌와 공부라는 것이 동반하지요.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품성, 양심의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면서 사물을 똑바로, 폭넓게, 궁극의 가치와 연계하면서 바라보려는 자세이겠지요. 그리고 그런 자세는 현실적으로는 많은 불리를 가져올 수도 있지요.
아무튼 그런 자세로 사물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뀐다고 해도 그것의 옳음과 가치는 변함이 없겠지요. 옳은 생각과 참 가치관은 그 자체로써 시대를 초월하는 강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실은 그것을 위해서, 영원토록 변함 없을 생명력을 위해서 작가는 고뇌하고, 탐구하고, 때로는 현실과 싸우기도 하는 것이지요.
저는 늘 그런 자세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 작가로서의 삶이나 신앙인 생활인으로서의 삶이나 마찬가지로 늘 정도(正道)를 찾아서 걸으려 하고, 오롯한 삶의 발걸음을 위해서 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지요.
이문열 씨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작가이긴 합니다만, '웅혼한 정신'은 지니지 못한 작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재능과 작가정신 사이에 서려 있는 분명한 갭을 저는 느끼는 거지요. 작가로서의 그의 세계관, 가치관이 의외로 천박하다는 사실에서 저는 안타까움과 곤혹스러움을 느낍니다.
그의 문학이 현실적으로는 큰 성취를 이루어 그가 문호 소리까지 듣고는 있습니다만, 곡소리 님이 내게 하신 충고의 내용처럼, 그의 문학이 영원 불변토록 가치를 지니게 될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문열 씨의 작가로서의 현세적 업적이나 성취가 조금도 부럽지 않습니다. 비록 오늘의 형편으로서는 이문열 씨가 하늘의 태양이라면 나는 농촌의 한적한 풀밭을 나는 반딧불이에 지나지 않는 미약한 작가지만, 나는 문학을 함에 있어서 현실 세계에서의 성취만을 목적하지 않습니다. 나는 재능은 부족하지만 문학정신만큼은 올곧하고 웅혼하게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중략) 아무튼 곡소리 님께서 더욱 웅숭깊고 반듯하고 탄력 있는 자세로 폭넓은 사유의 세계를 섭렵하시면서 문학도로서의 알찬 품성을 잘 가꾸어가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이런 글 때문에 이문열의 광신도적인 열성 팬(실은 '조중동'의 열성 독자들일지도 모를 사람)들로부터 내가 또 어떤 공격을 당할지 모르지만, 마음은 별로 불편하지 않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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