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집은 신혼집의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 아직 손때가 묻지 않은 새 가구들과 뽀송뽀송한 침구들, 반질반질한 주방용품과 주부들의 꿈이라는 큰 냉장고까지. 무엇보다 신혼집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건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사진. 남편과 둘이서 결혼식전에 찍은 펼쳐놓은 신문지만한 웨딩 사진입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그때의 기분으로 돌아갑니다. 사진 속의 여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새 신부의 단아함도 잊은 채 신랑을 보며 연신 웃고 있습니다.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며 과거를 회상하다가 번뜩 현실로 돌아옵니다.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는 이 집 안에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남편입니다.
2년여 전 남편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지금까지 푸른 옷의 수인으로 감옥에 있습니다. 기막히게도 결혼한 지 딱 두 달만의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어설픈 홀로서기를 시작했습니다. 혼자 아침을 맞이하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하루를 보내고. 가끔은 내게 처해진 현실을 잊고 싶어서 '내게서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다'라고 주문을 외워보지만 허사였습니다. 다만, 남편 역시 모든 것을 혼자 해야만 한다는 상황이 나와 같아 그것이나마 공감할 수 있다는 현실에 서글픈 감사를 하곤 합니다.
요즘 전 남편의 구속 이후 놓았던 직장을 다시 다니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남편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자구책을 마련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내 그것이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변화된 환경을 접할수록 그 속에서 남편과 나의 추억들이 하나둘씩 꼼지락거리며 튀어나오고, 스치며 지나가는 다정한 연인들의 모습을 볼 때면, 나의 현실을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남편을 잠시 잊으려 했던 일이 오히려 남편에 대한 강한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는 모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출근하는 지하철이었습니다. 맞은편 좌석에 만삭인 한 여인과 그녀의 남편인 듯한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손을 꼭 잡고 있는 둘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나즈막이 속삭이다가 이내 가벼운 웃음으로 번집니다.
내 맘에 부러움이 일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지만 이미 머릿속에는 온갖 상상들이 꼬리를 뭅니다. 앞에 앉은 둘의 모습은 어느덧 나와 남편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작은 한숨이 뒤따릅니다.
'우리 부부가 저런 모습이 되려면 아직 몇 년은 더 있어야 하는데...'
퇴근 후의 저녁 시간은 더욱 고통입니다. 아무도 반겨줄 이 없는 텅 빈집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골목부터 3층 우리 집을 바라봅니다. 혹시나 불이 켜져 있을까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이내 또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며 나를 자책합니다. 우리집 열쇠는 나만 가졌는데 말입니다. 아니 남편도 가지고 있었지만, 남편의 열쇠는 구치소에 수감될 당시 모두 내놓아야하는 바람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 남편이 언젠가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바람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씁쓸한 미소만 자아냅니다.
현관을 열기 전 또 한번 어리석은 짓을 저지릅니다.
'제발 남편이 나를 반갑게 맞아 주기를...'
큰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지만 역시나 어두운 집을 밝히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커다란 사진 속의 남편에게 애써 밝은 표정으로 오늘 하루도 잘 지냈노라고 인사합니다.
이 시간이면 여느 주부들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맛있는 저녁을 준비할 것입니다. 나는 그 음식냄새를 맡으며 이름을 맞추는 것으로 저녁의 적적함을 달랩니다. 얼큰한 김치찌개, 구수한 된장찌개, 두부 부침, 생선 구이, 감자 볶음... 아내들은 일터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 사랑을 만드나 봅니다. 맛있게 먹어줄 남편을 생각하면 이 더위에 가열대 앞에 있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남편의 격려와 칭찬 한마디면 그깟 더위쯤이야 크나큰 행복으로 다가올 텐데요.
솔솔 풍겨서 올라오는 음식 냄새에 못 이겨 나도 한껏 혼자 먹을 만찬을 준비해 봅니다. 냉동실에 넣어둔 밥이 아닌 고슬고슬한 새 밥, 이제 막 끓인 생선찌개와 오이무침. 거기다 가벼운 반주까지... 누가 봐도 훌륭한 밥상입니다.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으려하는데 다시 남편 생각이 났습니다. 나 혼자서도 이 정도는 충분히 먹을 자격이 있노라고 스스로를 달래 보지만 도저히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질 않습니다. 남편이 보고파서, 혼자 먹는 저녁이 씁쓸해서 나는 또 한바탕 울어버립니다. 결국 애꿎은 반주만 축내고 맙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갑니다.
결혼 전 남편은 입버릇처럼 내게 맹세를 했었습니다. 가정에 충실하겠노라고 무엇이든 나와 의논을 하고 절대 날 혼자 있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그 약속이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깨지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나 약속을 어긴 남편은 내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괜찮습니다. 약속은 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켰다면 어쩌면 우리한테 이런 악몽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비록 지금은 덩그러니 홀로 남아 있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약속을 소중하게 지켜나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준다지요? 정말 그런가 봅니다. 그러기에 내게 이렇듯 견디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남편의 부재가 많이 힘들고 외롭긴 하지만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릴 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며 나를 포기하려 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었겠지요.
먼 훗날 남편이 내 곁으로 돌아오는 그 날까지 나는 우리의 밝은 미래를 상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서로를 보며 지나간 힘들고 지쳤던 시간들을 깊은 안도의 한숨으로 지워버리겠습니다. 남편은 외로움을 견디고 반드시 내게 돌아올 것입니다. 대해를 가르고 귀향하는 힘찬 연어처럼.
덧붙이는 글 | <김경환 심재춘 석방을 위한 모임>
김경환 심재춘 씨 사면을 위해 사랑과 관심을 주십시오. 마음을 보태주실 분은 인권실천시민연대 홈페이지(www.hrights.or.kr)에 마련된 서명란에 서명을 해 주십시오.
김경환 심재춘 씨 석방을 위한 서명용지를 보냈더니 어떤 분이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핏볼테리아라는 아메리카대륙 태생의 개를 좋아하는데, 이 개는 싸움에서 지는 경우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으며, 최소한 비긴다고 하더라."
이번 일에서 비기는 일은 사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경희 이문희 두 사람의 가정을 평상시처럼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 일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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