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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신지요.
제 홈을 찾아주시고 '토론게시판'에 한 말씀을 남겨 주시어 고맙습니다. 선생님께서 실명을 사용하지 않으신 것이 조금은 섭섭했습니다. 그 익명 사용이 어딘가 모르게 억지스러움과 자신 없음을 표징하는 것으로도 느껴져서, 또 조금은 안쓰럽기도 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동 독자'라고 표기하신 그 익명에서 저는 색다른 느낌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도전적인 기운―일종의 오기 같은 것도 느낄 수가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선생님이 남기신 간단한 글을 읽고 나서, 선생님께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 홈을 찾아오셨을까? 라는 의문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느 정도 '방황'을 하시는 가운데서 뭔가를 탐색하기 위한 목적으로 찾아오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황이나 탐색과는 거리가 멀지 싶은 느낌이 더 컸습니다. 제 홈의 게시판에 남겨놓으신 말씀의 내용이 너무도 명료해서, 그 간단한 말을 굳이 내 홈에 달아놓기 위해, 오로지 그 목적만으로 잠시 한번 찾아오신 분 같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지요.
여기에서 우선 선생님의 그 말씀을 한번 옮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그럼 이미 조선, 동아일보에 세뇌가 된 걸까?
방금 전에 안티조선 방에 다녀오는 길인데, 헷갈린다….
과연 누구의 주장이 맞는 건지….
아무래도 일부 극단적인 주장보다는
사람들 대부분이 공감할 수 있는 주장에
국민 여론이 더 무게를 두지 않을까….
내년 선거 때 국민들은 표로 심판하리라….
이 간단한 말씀에서 내가 우선 주목한 것은 "방금 전에 안티조선 방에 다녀오는 길인데"라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뭔가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들을 알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하고 있는 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사실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단세포적이고 획일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사지까지 굳어져서 다른 가치관의 세계를 탐색해 보는 일조차 고개를 젓고 사는 형편이니까요. 진지한 자세로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알아보려고 하는 그 시도야말로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요체일 텐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선생님은 나의 이런 말 자체도 하나의 '독선'으로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조동 독자님.
그런데 선생님은 그 부분의 발전 지향적인 말의 끝을 "헷갈린다"는 지극히 모호하고도 무책임한 말로 손쉽게 처리해 버리고 있습니다. 너무도 간단하게 자기방임적이고 자포자기와도 같은 태도를 수용해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의 말은 한결 난삽하고도 헐겁습니다.
"과연 누구의 주장이 맞는 건지…."라는 말은 그런대로 이해가 됩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참으로 모호합니다.
"아무래도 일부 극단적인 주장보다는"이라는 말부터 한번 생각을 해 봅시다. 안티조선 운동에서 과연 어떤 것들이 '극단적인 주장'이겠는지요? 선생님은 그 극단적인 주장의 예들을 적시하실 수가 있겠는지요?
미사일이라도 쏘아서 조선일보사를 폭파라도 시켜버리자는 식의 무지막지한 말이 아니라면, 안티조선 운동에서 극단적인 주장은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렇습니다. 더러 '타도'라는 단어들을 접하기도 합니다만, 그 타도라는 말은 그 단어의 의미처럼 조선일보사를 쳐없애자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를 나쁘게 만들고 있는 조선일보의 오만 방자한 권력 체제와 조세 정의를 깔아뭉개는 비리 구조와 이상한 편향성 따위를 타파하고 극복하자는 얘깁니다. 말하자면 '개혁이라는 말'의 또다른 표현이지요. 그러나 그런 표현은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과격하고 극단적인' 주장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표현은 거의 쓰지 않습니다.
또 조선일보를 '좃선일보'라고 표기하는 것도 많이 접합니다만, 나는 그것을 욕이라고 보지 않고 일종의 풍자와 해학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 역시 한겨레를 '한걸레'로 부르도록 유도하는 측면도 있고 해서 별로 좋게 보지 않습니다.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요.
그런데 선생님의 다음 말이 더욱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의미 심장한 말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공감할 수 있는 주장에 국민 여론이 더 무게를 두지 않을까…."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선생님은 이미 어떤 '단정' 같은 것을 마음속에 깔고 그 기대를 그렇게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만, '사람들 대부분이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이란 게 대체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아마도 '다수'라는 말을 '대부분'이라는 말로 대신하신 것 같은데, 어쨌거나 그런 말을 사용하시는 선생님의 심저에는 어떤 '자신감' 같은 것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내가 왜 이런 느낌을 포착하느냐 하면, 선생님의 마지막 말 때문입니다. "내년 선거 때 국민들은 표로 심판하리라…." 바로 이 말에서 나는 선생님의 의중을 훤히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오늘의 이 글을 쓰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지요.
조동 독자님.
선생님은 내가 요즘 인터넷 세상에 띄운 '1969년 삼선개헌 국민투표에 대한 기억'이라는 소설 같은 글을 읽어보셨는지요? 그게 바로 내 얘기여서 좀 쑥스럽긴 합니다만 선생님이 어제 안티조선 운동 사이트인 <우리 모두>를 돌아다니다가 나를 만나서 내 홈까지 오시게 된 게 아닌가 싶어서 드려보는 질문입니다.
어쩌면 여러 가지로 톤이 강한 글들을 접하시던 선생님이 내 글에서 비교적 온건한 기운을 느낀 데다가 나이도 좀 먹어보이는 내가 마음에 들어서 내 홈까지 오시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하는 얘긴데, 나는 이미 언론 개혁과 관련해서 통렬하고 신랄한 글도 꽤 많이 쓴 사람입니다. 그러나 강렬 일변도로만 나가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언론 개혁 운동은 지구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운동은 현재의 민주당 정권하에서만 추진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진행 성과의 질량에 따라서는 내년에 정권이 바뀐다 하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계속 추진될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는 얘기죠.
만약에 내년 대선에서 정권이 한나라당 쪽으로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이회창 정권이 언론 개혁 운동을 탄압하기라도 하는 국면이 초래된다면 이 운동은 더욱 극렬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나는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 모르지요. 오늘 몰상식하리 만큼 족벌 비리 신문들을 악착같이 비호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내년 대선에서 그 몰상식한 셈법이 잘 통해서 정권을 잡게 되면, 하루아침에 태도가 돌변해서 언론 개혁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설지도…. 정치권력을 능가하는 신문권력은 그들에게도 썩 달가운 것이 아닐 테니….
아무튼 나는 오늘의 언론 개혁 운동을 장기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기전으로 나아가려면 운동 방법을 지혜롭게 활용해야 합니다. 강렬 일변도로만 나가면 일찍 목이 쉬고 지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도 강온 전략을 잘 구사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강온 조절을 잘 해야 이 성스러운 장정에서 낙오되지 않고, 마침내는 등정에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힘이 들어가는 글만 쓰지 않고 요즘처럼 소설식으로 옛날 이야기도 끌어다가는 그속에다 언론 개혁 운동의 당위성을 간접적으로 버무려 넣기도 하는 거지요.
'1969년의 삼선개헌 국민투표에 대한 기억'의 마무리 편을 읽으셨다면 잘 느끼셨겠습니다만, 그리고 내가 그 글을 마무리하면서 사족(蛇足)으로도 슬쩍 비친 얘깁니다만, 나는 '다수'라는 것의 가치 개념과 관련하여 오늘 조동 독자 선생님께 묻고 싶습니다.
국민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확정된 일이라고 해서 '삼선개헌'이 과연 옳은 일이라고 선생님은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선생님은 삼선개헌이 정당하다고 보는 근거의 하나로 국민의 대다수 지지를 꼽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그 글에서 소개한 1969년 논산훈련소 제28교육연대의 경우처럼 그런 식의 공개 투표에 의해 2천여 명의 병력 중에서 절대 다수가 찬성을 하고 나 한 사람이나 극소수가 반대를 했다면, 과연 그것이 온당한 일이겠는지요? 그 절대 다수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나는 삼선개헌이 목적도 옳지 못했고, 방법은 더더욱 비열했다고 생각합니다.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씨의 경제면의 치적(?)을 들어 삼선개헌도 역사 발전의 한 도정으로 인식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박정희 씨의 경제 치적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가지나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절대적으로 삼선개헌은 옳지 못한 것이었고, 방법은 더더구나 졸렬했습니다.
조동 독자 선생님.
선생님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구독자임을 확실하게 밝히면서 말씀의 첫머리에 "내가 그럼 이미 조선, 동아일보에 세뇌가 된 걸까?"라는 식으로 의문도 표하셨지요. 그 '세뇌'라는 단어가 내겐 참으로 의미 심장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을 '중독'이라는 단어로 대신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선생님은 조선일보의 응고화된 '아집'과 언론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분별 없는 행태 따위를 느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만약 세뇌와 중독이 심화된 상태라면 일종의 동화 현상으로 그것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조선일보의 그것을 자세한 세목과 함께 구체적으로 설명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로 들면 글이 너무 길어지고, 그것이 오늘 이 글의 목적도 아닙니다.
오늘은 다만 조선일보의 그런 아집과 행태의 배경에 대해서만 논급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조선일보>가 자신들의 응고화된 '아집'을 완강하게 끌어안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바로 한국 최대의 '발행 부수'라는 것에 있습니다. 구독자가 가장 많다는 사실에 그들의 힘이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일면 긍정적인 점이 있습니다. 구독자가 많다는 것은 확실한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조선일보 구독자의 절대 다수가 절대적으로 '옳은 선택'이라는 차원과 연결될 수 있을까요? 어느 시대에나 '다수'에게는 '다수의 맹점'이라는 게 있지요. 다수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고, 항용 다수 속의 소수가 그 다수를 지배한다는 사실은 역사 진행법상 보편적 진리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용당하는 다수'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인류 역사 발전의 굽이굽이와 그 면면을 들여다볼 때 이 '이용당하는 다수의' 문제가 참으로 심각하고도 지난한 문제였다는 사실을 당신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대중조작'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 '이용당하는 다수'는 중요한 국면에서 역사 발전의 '걸림돌'이 되기 일쑤였지요.
조선일보의 독자들 중에는 이런 말을 하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우리가 바보인 줄 아나. 신문은 독자가 선택하는 거야"라고. 일단은 옳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옳은 말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까지 조중동 독자들을 일러 '바보'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세계에서 교육열이 가장 높은 나라, 교육 수준도 세계에서 상위인 나라의 국민 절대 다수가 선택해서 보는 것이니, 조선일보 독자들이 한결같이 바보일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 바보는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에 인생사의 곡절이며 비극이 집약되는 법입니다. 진짜 바보는 자신이 바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애초부터 바보여서 바보가 되는 경우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한 번 속고 두 번 이용당하다 보면 나중에는 아무 것도 모르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말하자면 판단력과 비판의식의 마비―세뇌와 중독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조선일보가 240만부의 발행 부수―한국 최대의 구독자 수를 믿고, 더 나아가 그 수효를 자신에 대한 절대적 지지 세력으로 확신하고, 계속적으로 언론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일삼는다면, 독자들은 그냥 앉아서 조선일보에 이용당하는 셈이 아니겠는지요?
조선일보가 과거의 친일 친독재에 대한 반성 한번 없이 계속적으로 자신을 분장하며 정치권력을 능가한다고 큰소리칠 정도의 권력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며 온갖 퇴행적이고 불합리한 행위들을 일삼는 것도 다 최대 독자수를 믿기 때문에 하는 짓인데, 그렇다면 조선일보 독자들은 그냥 앉아서 당하는 셈이 아니겠는지요? 끝내 독자들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에 결국은 모든 문제가 집약되겠습니다만….
그리고 그런 단계, 그런 상황이라면 조선일보가 독자를 무서워한다는 말은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의 거짓부렁, 허사(虛辭)가 아니겠는지요? 독자를 한손에 쥐고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형국인데, 독자를 무서워하고 말고 할 필요가 무에 있겠는지요?
또 한가지, 이런 지경이라면 독자가 어떻게 신문을 판단할 수 있겠는지요? 신문의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하려면, 허구헌 날 그 신문 하나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가령 <한겨레> 같은 신문도 보면서 (설령 소화가 잘 되지 않더라도) 스스로 비교 관점을 세워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비교 관점의 토대 위에서 여러 가지를 포괄적으로 생각해 보고 깊이 고뇌도 해봐야 합니다. 늘 자신의 한계를 성찰하고 인정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극복의 명제를 향해 진지하게 사고하고 노력하는 자세―그것이 나를 발전시키고 마침내는 사회 공동선의 창출과 확장에 이바지하게도 되는 것이지요.
내 주변에는 한겨레라는 이름만 들어도 위장 장애를 겪던 사람이 그 알레르기성 장애를 잘 극복하고 이제는 오히려 지역에서 시민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도 있답니다.
조동 독자님.
아마도 선생님은 내년의 대선에 크게 희망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년의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으면 언론개혁 운동도 끝장이 나리라고 잔뜩 기대하며 또 자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도 한나라당이 왜 그렇게 조세 정의를 부정하고 우습게 여기며 족벌 비리 신문들을 비호하느라고 애를 쓰는지도―그 억지 춘향이 짓의 이유도 잘 알고 있겠군요? 그리고 한나라당이 승리할 수 있는 요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꿸 것은 다 꿰고 있겠군요?
나나 선생님이나 다 잘 알고 있듯이 한나라당이 족벌 비리 신문들과 찰떡궁합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그것으로 아직도 DJ혐오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영남 지방의 지역 정서를 최대한 자극하고 이용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한나라당은 그 유치한 술수 대로 정권을 되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나라당의 그 유치한 술수가 참으로 비애스럽게 느껴집니다. 너무도 속이 훤히 드러나보이는 고약하고도 퇴행적인 술수가 아닙니까? 일국의 거대 야당이 고작 지역 감정 따위에나 의지하여 정권을 쟁취하려 드는 현실이, 그 조악한 셈법이 나를 몹시 슬프게 합니다.
왜 그렇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비겁한 것일까? 왜 정책 대결과 파인 플레이 정신에 명운을 걸지 못하는 것일까?
너무도 좀스럽고 오종종한 무리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인배 정치배 기질을 벗지 못하는 그런 조악한 무리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 나는 정말이지 뼈저리도록 슬픕니다.
조동 독자님.
우리 나라의 정치인들이 소인배 정치배 기질을 벗지 못하는 것에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족벌 언론들의 영향이 참으로 큽니다. 우리 나라의 정치판을 이렇게 오종종하게 만든 것에는 수구 족벌 신문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도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과 연관하는 언론 권력의 폐해를 조목조목 제시하고도 싶습니다만,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글이 벌써 너무 길어졌거든요.
제 홈피를 방문해 주신 조동 독자님.
사사로운 이야기입니다만, 어언 오십 여 년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지금의 이 시기를 가장 열정적으로 살고 있지 싶습니다. 언론 개혁 운동의 의의와 가치에 대한 뜨거운 신념 때문이지요. 나는 이 신념이 정의감에 기초하고 있으며 양질의 애국심과 연결되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성스러운 운동에 본격적으로 동참한 이후 나는 좋아하던 술도 끊었습니다. 담배는 옛날에 끊으면서 독종 소리도 들었습니다만 술은 못 끊겠더군요. 혈당과 요산 조절을 해야 하는 형편이긴 하지만 조절이 잘 되는 편이라 틈틈이 술을 즐겨왔지요. 그러나 좀더 진지해지기 위해서, 시간을 아끼고 체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요즘에는 일절 술을 입에 대지도 않고 산답니다.
오늘은 예산군 대술면의 산골짜기 물가에서 천주교 대전교구 가톨릭농민회의 야유회 행사가 있는 날이지요. 지도 신부님이 개도 한 마리 낸다고 하시고, 꼭 가기로 했는데, 아침에 취소하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글을 쓰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더 큰 고마움이 내 가슴에 영피게 되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이 내 홈피를 방문하시고 '토론게시판'에 한마디 말씀을 올려놓은 것이, 그리하여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이 선생님과 나 사이에 똑같은―참으로 좋은 보람의 다리로 이어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의 인연처럼 내 홈피에 오신 조동 독자님.
가능하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끊으십시오. *
2001년 8월 8일
충남 태안의 반딧불이 작가 지요하 적음
덧붙이는 글 | 다음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관련 이야기입니다. 3회로 나누어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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