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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3일 오전 8시.

나는 식당에서 태국 국수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가까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맬라 캠프로 향하는 픽업트럭을 잡아탔다. 운전사에게 맬라 캠프로 가는 차가 맞냐고 물어볼 때 한 청년이 의사 소통을 도와주었다.

이 청년은 내게 맬라 캠프는 무슨 일로 가느냐면서 자신을 맬라 캠프에 사는 카렌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아니 어떻게 맬라 캠프 사람이 여기까지 나왔단 말인가? 내가 그를 만난 매솟이라는 도시는 맬라 캠프에 수용돼 있는 난민들이 올 수 없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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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라 캠프로 달리기 시작한 지 한 30여분쯤 지나서였을까. 픽업 트럭 손님 중 한 태국인이 황급히 차를 세우라고 손짓을 하더니 이 청년을 포함해서 4명의 카렌족 난민들에게 빨리 픽업 트럭에서 내리라고 재촉했다. 이 태국인은 카렌족 난민들에게 샛길을 일러주었다. 그들의 행동과 표정을 보니 전방에 경찰의 임시검문소가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러냐'고 묻는 나에게 카렌 청년은 두 손을 모아 수갑을 찬 듯한 모양을 만들어 보이면서 '우리가 카렌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4명의 카렌족 난민들을 두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 지 채 2백미터도 되지 않아서 아니나 다를까 임시검문소가 등장했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들의 안전을 기원했다.

한달 만에 다시 찾은 맬라 캠프는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카렌족 난민들의 삶은 적어도 겉에서 보기에는 그대로였다. 단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집집마다 붙어 있는 '모기를 조심하라'는 포스터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미 캠프 내에 말라리아 발병 환자가 2백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환자의 대부분은 어린이다. 아마도 최근 내린 비의 영향 같았다.

나는 맬라 캠프에 들어서자마자 지난 7월에 방문했던 불교중학교로 직행했다. 학교 교무실에서는 10여명의 교사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교사들은 잠시 회의를 중단하고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잠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영어교사인 살라 씨의 안내를 받아 학생들을 만났다. 10대 중반에서 후반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는 학급을 찾았다. 아이들은 나의 출현에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어린 아이들일수록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해맑은 웃음을 보여주었고 나이가 든 아이들일수록 애써 눈을 피했다. 한가지 공통적인 반응은 다들 부끄러움을 많이 타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는 것이었다.

교실이라고 하기엔 무색하지만 아무튼 교실에서 만난 14살의 한 여자 아이는 1954년에 발행된 카렌 영어사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영어였다. 이 아이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 아이의 고향은 당연히 버마다. 이 아이의 영어사전 겉표지엔 아이가 직접 그린 간호원과 여왕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이한테 물으니 장래 희망이 간호원이란다. 나는 그 아이와 대화하며 이 아이의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없을지 여부는 카렌족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어른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과 헤어진 후 나는 지난 7월 방문 때 인사를 나눈 바 있는 불교중학교 교사 킨마웅쵸 씨와 살라 씨의 안내를 받아 캠프 촌장의 집을 찾았다. 캠프 촌장의 집을 찾은 이유는 캠프에서 잘 수 있는 '허가'를 받기 위해서였다. 다행히도 우리나라 농촌의 마음씨 착한 이장님처럼 생긴 캠프 촌장은 쉽게 허락을 해주었다. 그러나 또 한번의 절차가 남아 있었다. M-1 오피스, 다시 말해서 캠프를 관리하는 태국 군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불행히도 M-1 오피스에서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들은 완강하게 캠프를 떠나달라고 요구했다. 지난번 방문 때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그러겠다고 말해놓고 다시 캠프 안으로 들어가서 난민들을 만날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난번에는 나 혼자 M-1 오피스를 찾았지만 이번에는 킨마웅쵸 씨, 살라 씨와 함께 M-1 오피스를 찾았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그들이 불이익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며칠 머물며 난민들의 생활을 엿보려던 이번 방문의 목적이 허무하게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방콕에서 하룻밤을 좁은 버스에서 자며 달려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두 교사와 더 얘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하고 픽업트럭을 타는 곳까지 바래다 달라고 부탁했다. 태국 군인들도 배웅하겠다는 것까지 가로막지는 않았다. 우리는 캠프 외곽의 도로를 걸으면서 또, 픽업트럭을 기다리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라고 하면 인터뷰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화는 많은 픽업트럭을 그냥 보내면서 계속되었다. 나는 이번 맬라 캠프 방문과 두 교사와의 대화에서 새삼스레 한가지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바로 카렌족 난민들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강력하게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난 7월 방문 때는 킨마웅쵸 씨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살라 씨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나는 이 사람의 이야기를 접한 독자들에게 이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에 대한 조언과 직간접적인 도움을 구하고 싶다.

살라 씨는 현재 23세고 맬라 캠프 불교중학교의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다. 그의 꿈은 캐나다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정부 관리로 일하고 싶어한다. 그는 이런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데 나와 한국인들이 도와줄 수 있는지를 물어 왔다. 나는 그에게 그의 사연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만약 한국에서 한국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느낌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한국인이 캐나다 유학의 꿈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게는 유학자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이겠지만 살라 씨에게는 그외에도 너무도 많은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처음 그에게서 캐나다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탁 막혔다. 내게는 그의 희망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 캠프 사람들은 캐나다는 커녕 자신들이 살고 있는 태국 땅도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사람들 아닌가.

나는 그에게 조금은 매정한 그러나 현실을 반영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가능한 꿈이라고 생각하냐고.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희망을 가지고 있노라고.

그들과 헤어진 후 나는 매솟의 UNHCR(UN 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를 찾았다. 살라 씨를 비롯한 난민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사무소에서 일하는 일본인 타미 수기하라 씨는 그들을 돕는 기관이나 활동이 매우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을 가르친다거나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식으로 직접 도울 수 있는 방법도 있고 난민들과 자매결연을 맺어 일정한 액수의 성금을 일정한 기간 동안 기부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그는 그러한 모든 활동을 자신들이 다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방콕에 있는 여러 NGO(비정부기구)에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다음날 아침 방콕에 돌아와 타미 수기하라 씨에게 전화를 걸어 한 단체의 연락처를 얻었다. 이 단체에 연락하면 난민들을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도 함께 들었다. 관심있는 독자들은 직접 접촉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연락처를 적는다.

CCSDPT 전화번호 66-2-238-2568,
이메일주소bccbkk@mozart.inet.co.th

8월 13일 오후 살라 씨와 나는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면서 카렌족 아이들이 바로 카렌족의 미래이자 희망이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재 카렌족은 버마 군부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총을 들고 함께 싸울 수는 없는 일이지만 카렌족 아이들을 위해서 또는 공부하고 싶어도 더이상 공부하기 어려운 살라 씨 같은 이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는 있지 않을까? 흔히들 하는 말로 돈 있는 자 돈으로 힘 있는 자 힘으로 말이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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