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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5일 밤 딕과 툰은 카오산 로드에서 방황해야 했다.
딕이 전날 남편과 크게 싸워 집에 안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직장 동료 툰과 함께 잘 곳을 찾아 나섰는데 이들은 잘 곳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이들은 다섯 곳의 호텔과 게스트하우스에서 '태국인'이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고 나서야 겨우 허름한 방 하나를 구할 수 있었다. 방을 구하고 난 뒤 딕은 "왜 내 나라 태국에서 태국인이라는 이유로 숙박을 거부당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카오산 로드의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대개 태국인을 손님으로 받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안전이나 도난 문제에 대한 고려와 외국인 전용업소라는 특성화 방침 때문이다. 동남아시아나 태국을 여행해본 배낭여행자라면 카오산 로드를 다 안다. 아마도 모른다면 그는 간첩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카오산 로드는 방콕의 방람푸 지역에 위치한 작은 거리다. 이 곳에는 수많은 저가의 숙박시설과 여행사들이 진을 치고 있어 해마다 백만이 넘는 배낭여행자들이 몰려 들고 있다. 이런 카오산 로드가 최근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데 변화의 방향과 내용이 우려를 낳고 있다. 다시 말하면 카오산 로드는 현재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중이다.
카오산 로드의 가장 큰 변화는 딕과 툰이 비록 어려웠지만 방을 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카오산 로드가 더 이상 외국 여행자들만의 거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카오산 로드는 주말은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수많은 태국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유흥가로 변하고 있다.
카오산 로드에서 작은 식당을 경영하고 있는 덩 씨는 태국 젊은이들이 카오산 로드를 조금씩 점령해가는 현실에 대해 많은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더 이상 외국인들이 이 곳을 편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대로 가다가는 외국인들이 카오산 로드를 외면하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카오산 로드를 외국 여행자들이 외면하게 된다면 이 곳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영업하고 있는 많은 업소가 타격을 받게 된다.
실제로 토요일이었던 지난 25일 밤 카오산 로드를 다니면서 관찰해 본 결과 태국인 비율이 약 50% 정도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술병을 들고 길가에 앉아 여행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들, 야한 차림의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교복을 입고 몰려다니는 학생들도 보인다. 얼마 전 방콕 주재 일본 대사관은 태국 당국 측에 자국인들에 대한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는데 일본 대사관이 지적한 주요 피해 지역 중에 카오산 로드가 포함돼 있다.
카오산 로드에 위치한 수지 펍이라는 주점은 태국 젊은이들이 카오산 로드로 몰려 들고 있는 현상을 싱징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다. 지난 25일 밤에도 수지 펍에 가보니 태국인의 비율이 약 80%에 가까웠다. 그외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북미와 유럽에서 온 여행자들이다.
이 곳은 본래 '태국 젊은이들이 외국인을 사귀러 오는 곳'으로 유명했는데 현재는 '외국인이 태국 여성을 사귀러 오는 곳'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태국인들의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곳에서 만난 한국인 고아무 씨는 "태국 여성을 만나기 위해 수지 펍을 찾는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실제 이 곳에서 한 태국 여성을 만나 교제중이다.
태국 젊은이들을 위한 유흥가로 변해가는 현상 외에 카오산 로드가 겪고 있는 또 하나의 변화는 바로 '다양한 유흥업소의 급증' 현상이다. 최근 카오산 로드에는 디스코텍과 주점이 급증하고 있다. 따라서 업소간의 경쟁도 가열되고 있는데 요즘 카오산 로드를 다니다 보면 '업소 홍보 전단'을 나눠 주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유흥업소의 증가는 카오산 로드의 특성을 훼손하고 있다. 카오산 로드에 위치한 한 여행사에서 일하는 직원은 많은 여행자들이 "너무 시끄러워 다시 오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는 "카오산 로드에 없는 것은 이제 고고 바(go-go bar)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태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고고 바(go-go bar)는 술을 마시며 여성들의 각종 나체 쇼를 보는 곳이다.
1997년에 왔다가 올해 다시 태국을 방문한 일본인 마사루 씨는 "과거에는 무엇보다도 조용했고 또한 적은 돈으로도 머무를 수 있어 좋은 곳이었지만 다시 와보니 너무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동남아 여행을 하게 된다면 이 곳을 들르지 않을 생각"이라는 털어놨다. 현재 조용한 곳을 원하는 여행자들은 카오산 로드 인근에 있는 송크람 사원 뒷편에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게스트하우스촌으로 옮겨 가고 있는 중이다.
찾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결국엔 유흥지로 변해가는 관광지의 변화는 마치 법칙처럼 보인다. 왜 사람들이 늘어나면 예외없이 그런 변화를 맞아야 하는 것일까? 술이나 시끄러운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은 데 말이다. 이런 문제는 사실 태국의 수도 방콕에 위치한 카오산 로드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는 아직도 1994년에 강원도 강촌에 갔다가 실망했던 일을 잊지 않고 있다. 1989년부터 자주 찾았던 곳인데 3년만에 다시 가보니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그 조용하고 편했던 곳에 각종 주점, 디스코텍, 러브호텔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후로 다시는 강촌에 가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카오산 로드의 두 가지 변화는 서로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 즉 유흥업소가 증가하면서 이 곳을 찾는 태국 젊은이들도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꾸준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 여행자들이 새로운 곳을 찾아낼 때까지 카오산 로드는 여전히 '동남아 여행의 관문' 역할을 계속 하겠지만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카오산 로드는 없다. 이는 카오산 로드를 아끼는 사람들만의 손실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손실이다. 우리 주변에는 한국의 '카오산 로드'가 없을지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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