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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아픔을 당한 가족들의 슬픔은 우리도 이미 겪은 바다. 사건은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 일어났지만 결코 남의 일이라 할 수 없다.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킨 테러 자체는 분명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미군이 지난 50여년 동안 전세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생각하면 이번 테러범들의 '비도덕성'만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공정치 않다.

걸프전 때 8만명의 이라크 민간인이 죽어 갔고 전쟁 이후에 이라크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미국의 봉쇄로 인한 의약품과 식료품 부족으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서방 언론은 주목하지 않는다.

비슷한 경험은 우리나라도 겪었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100만이 넘는 민간인 중 적지않는 사람이 미국의 남과 북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폭격으로 죽었다. 한국전쟁 당시 평양은 미군의 폭격으로 건물 두채만 남고 도시 자체가 완전히 파괴됐다. 최근의 북한 기아는 김일성, 김정일의 관료화된 봉건 독재 때문이지만 수십년에 걸친 미국의 경제봉쇄와 관련이 있다.

이번 테러 사태를 보며 범인을 비난할 때는 동시에 미국과 이스라엘에 의해 아랍인들이 50여년 동안 겪은 고초를 고려해야 마땅하다. 힘있는 나라가 첨단 폭격기와 미사일로 약소국을 두드리면 '정의의 공격'으로 미화되고, 힘없는 나라가 비정규적인 방법으로 강대국을 치면 '비겁한 테러'로 비난받는 것, 그것은 국제사회의 게임이 출발부터 불공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테러범들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미국의 추악함에 눈 감은 채 눈앞의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과격'한 행태에만 초첨을 맞춰서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러시아, 북한을 포함한 각국의 반응은 위선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구체적인 이해득실에 대한 계산은 숨긴 채 '테러 반대'만 주장하는 각국의 입장은 체면 유지용이며, 앞으로 미국의 대응과 사태 추이에 따라서 다양한 입장을 드러낼 게 예상된다.

사상 초유의 일,
그러나 미국의 태도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도 재발할 수 있는 일


미국의 코뼈가 부러졌다. 양키의 높은 콧대가 잠시나마 꺾였다. 전세계 구석구석에서 전쟁을 수행하면서 자기 나라만은 '안전지대'로 성역화해 온 미국의 자존심이 짓밟혔다. "남북전쟁 이래 최대의 비극, 진주만 사건과 같다..."는 미국의 탄식은 이해할 만 하다.

양차 세계대전 때도 미국 본토가 공격당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나치 독일군이 미국 본토 공격을 위해 잠수함을 발진시켰으나 뉴저지 앞바다에서 침몰해 실패했고, 구소련도 미국 본토 공격은 자살행위라고 생각,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북한의 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겨냥할 수 있다는 미국 매파의 주장은 비현실적인, 과장된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있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미국 경제 세계지배의 상징 세계무역센터, 미국 군사 세계지배의 상징 펜타곤이 파괴됐다. 미국 본토가 안전하다는 신화는 깨졌다. MD로 지구의 하늘 전체를 지배하려던 미국은 자기 집 천정이 뚫어져 버리자 할 말을 잊고 있다.

부시 정부가 입은 정치적 상처

정치적으로 부시는 여러 차원의 타격을 입었다. 부시는 보수 강경 일색의 제3세계 전략으로 이번 사태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는 비난을 받을 게 분명하다. 우주전쟁을 준비한다면서 미국 국내 방공망에 헛점을 보인 데 대해 일정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사태 발생 후 민첩하게 수습에 나서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등 지도자 이미지가 크게 손상됐다.

그러나 가장 큰 정치적 타격은 테러리스트와의 머리 싸움에서 한 수 뒤졌고, 이미 패색이 짙다는 점이다.

미국은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 '테러'를 미국은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있다. 부시는 범인을 찾아 처벌하겠다고 이미 공언했고, 만일 찾지 못한다면 희생양이라도 만들어서 대대적인 보복을 할 게 뻔하다.

게다가 테러 단체의 연합작전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에 의해 '테러단체'로 지목된 집단에 대한 무차별 보복이 일어날 수도 있다. '진범'을 못 찾으면 희생양이라도 만들게 분명하다. 가만히 있는다면 부시가 입을 정치적 타격이 너무 크다.

부시 정부는 일단 전세계 여론을 등에 업고 '테러 발본색원' 작전에 나서려고 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보복 공격은 사실상 부시가 입은 정치적 손실을 만회하려는 수준일 뿐, 아랍 근본주의자들의 반미를 잠재울 수는 없을 것이다.

상대 없는 전쟁, 예정된 부시의 정치적 패배

그러나 부시가 취할 수 있는 '보복조치'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번 사건의 범인을 응징하는 게 목표라면 특수부대 투입과 극히 제한적인 폭격 등이 가능하겠지만 그 정도로는 '충분한' 보복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걸프전 때와 비슷한 규모의 공격도 할 수 없다는 얘기다. 국내에서 그가 잃어버린 위신을 되찾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빈 라덴이 어디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실 빈 라덴이 이번 테러의 주범인지 아닌지 조차 불분명하다. 탈레반 측이 "빈 라덴은 이번 사건과 관계없다"고 밝혔는데도 미국은 빈 라덴을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다. 미국은 이미 그를 1차적인 타겟으로 삼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진범이든, 단순한 '희생양'이든 미국은 그를 잡는 것을 1차 목표로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보복 범위를 확대하여 테러단체로 지목된 모든 아랍 조직들을 절멸하는 전쟁에 나설 경우, 국제사회가 이러한 대규모 보복전쟁을 지지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테러 조직 절멸'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권에 대한 무제한 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소지가 있으며 이런 무모한 전쟁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위 경우의 수 중 어느 하나도 부시를 지금의 정치적 곤경에서 구해 주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부시가 취할 수 있는 정치 군사적 대응책은 마땅치가 않다. 시간이 갈수록 부시의 처신은 더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적으로 테러범들은 부시에게 이미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부시는 상대방이 없는 사각의 링에 혼자 올라가서 길길이 뛰는 꼴이다.

아프가니스탄 공격으로 무고한 민간인이 또 희생된다면 부시는 테러범과 비슷한 비난을 받을 위험이 있다. 한 걸음 나아가,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 희생에도 불구하고 빈 라덴을 잡지 못할 경우 -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 부시는 또 한번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게 예상된다. 빈 라덴을 처벌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 부시로서는 곧 전쟁의 '정치적 패배'이기 때문이다.

미 군산복합체는 가능한 한 큰 규모의 전쟁을 일으키려 하겠지만 눈앞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이상의 확전에 국제 사회가 동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부시 정부는 이미 입은 정치적 타격을 반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감행한 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단기적으로 미국은 힘을 과시하는 국제 전략을 채택할 게 분명하며, 이로 인해 제3세계와의 관계가 경색되고 국지전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제3세계 지배전략 재검토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만이 테러를 영원히 잠재울 수 있는 길이라고 이미 세계의 지식인들이 입을 모으고 있다.

테러리스트들이 노린 것

테러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세상을 바꾸려면 인간의 가치관이 한 단계 고양되는 방향으로 바뀌고 이렇게 변화된 민중의 요구가 구체적인 혁명으로 힘을 발휘해야 한다.

테러는 약자가 취하는 정치적 행동이자 폭로 수단일 뿐이다. 테러는 80년대 우리나라의 학생 노동자들이 벌였던 분신 항거와 동일한 정치적 효과가 있는 '약자'의 전술이다. 무릎 꿇고 죽느니 서서 싸우다 죽겠다는 것이 테러리스트들의 기본 마인드다. 물론 수많은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수반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테러에 대한 일반의 상식을 뛰어넘은 '악성' 테러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이번 테러는 오히려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을 보완 강화하게 함으로써 일단은 폭압적 세계질서를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테러범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노린 것은 부시 행정부의 고압적 인종차별과 제3세계 억압 정책에 대한 극적인 항의를 제기하는 일로서, 예상보다 더 크게 성공해서 스스로 놀랐을 수도 있다. 그들이 인간적이라면 엄청나게 많은 민간인을 희생시킨 '과오'에 대해 스스로 자아비판을 해야 마땅하다.

미국은 앞으로 대외정책을 세울 때마다 이번 테러 사건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약소국의 민간인들에게 강요한 피눈물을 미국 국민들도 겪을 수 있다는 것, 자기도 아파 보아야 남의 아픔을 알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번 사태가 미국에게 주는 쓰디 쓴 교훈이다.

장기적으로 미국본토 신성불가침의 신화를 깼다는 것, 다시 말해 미국이 강경보수의 제3세계 전략을 펼 경우 이러한 공격을 또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널리 시위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비난과 미국의 대대적인 보복 공격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테러범에게 권함

미국의 대량 보복에 의한 중동전쟁과 세계적인 갈등을 예방하는 유효한 방법? 빈 라덴이든 누구든 테러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이 그냥 자수하여 미국측에 체포된다. 미국의 보복 공격의 명분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테러범들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선행이다.

썰렁한 사족!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러시아로 피신한 뒤 "내가 한 일"이라고 성명을 발표한다(이라크나 시리아 등 다른 나라로 가면 안 된다. 미국이 쉽사리 공격할 것이다). 이럴 경우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면 공격이 상당히 곤란해질 것이다. 단지 '테러범을 보호했다'는 이유만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테러범이 도망간 러시아를 공격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우리 나라는?

'북괴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안 나오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한나라당, 조선일보 등 극우 보수의 안보론과 친미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남북관계 개선이 지체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김대중 정부의 신속한 대응으로 극우 세력이 준동할 여지를 별로 주지 않았고 - 애도의 날 선포, 민방공 훈련 실시 등 우스운 소동이지만 극우의 불만을 달래는 효과가 있었다 - 남북 대화도 예정된 일정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유가 상승과 세계주식시장 붕괴로 인한 경제적 타격은 분명히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3차 세계대전으로 가지 않는 한 장기적으로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이번 사건이 2002년 대선에 미칠 영향은 미미할 것이다.

조선일보는 임박한 미국의 보복공격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는 식으로 미화하며 전쟁을 부추기는 넋빠진 짓을 하고 있다. 물론 조선일보의 이런 주장이 부시정부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없다. 한나라당은 북한이 이와 비슷한 테러를 남한에 대해 저지를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하나마나한 주장을 펴고 있을 뿐이다.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여론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러려면 미국이 대오각성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 그러나 소수 자본과 군수업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 정부가 '도덕적'인 가치기준에 의해서 움직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평화와 공존의 국제질서로 재편하려는 국제 사회의 노력이 새롭게 일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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