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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눈이 있는 까닭을
왜 이렇게 작은 눈동자에 이렇게 커다란 우주가 비쳐지는가
왜 이런 것이 만들어졌는가
자연은 눈을 지니고 있지 않은데 인간에게 눈을 준 이는 대체 누구인가
나는 그것에 크게 이끌려 그 말하는 바를 들으려 한다
나는 장님
그러나 내 귀는 여러 소리를 듣는다
무한의 소리를
아름다운 우주의 조화를
자연은 귀를 지니고 있지 않은데
인간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는 귀를 준 이는 누구인가
나는 거기에 크게 이끌려 그 말하는 바를 들으려 한다
나는 장님
나는 귀머거리
그러나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우주의 마음
그것은 영혼인가 신인가
나는 알 수 없지만 무한히 아름다운 우주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자연은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은데
누가 나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보내 주는가
나는 그것에 크게 이끌려 그 말하는 바를 들으려 한다
(무샤코지 사네아츠 '인생론' 중에서)
1. 도꾜 2001. 9. 23
시오미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며 미국이 준비하고 있는 전쟁에 대해 생각합니다. 한국 땅에서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간 전쟁이 일어났던 것은 겨우 5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수십만이 비명에 간 것은 55년 전이었을 뿐입니다.
불과 수십 년 전에 전쟁의 비극을 목도했던 두 나라 어느 곳에서도 전쟁에 대한 반대의 외침은 미약하고 전쟁광들의 살기에 찬 소리만 가득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곳의 방송과 신문들 역시 한국처럼 연일 전쟁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진 뒤에야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지만 전쟁이 시작된 후에 평화를 되찾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요. 평화는 전쟁의 반대말이 아니라,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뜻인 것을. 이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전쟁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기도밖에 없습니다.
아득하여 나는 막막해졌다가 기도 중에 문득 눈을 뜹니다. 그래,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가. 수 십억 인류가 각기 자신의 신에게 간절히 기도한다면 전쟁을 막지 못할 까닭이 또 무엇이겠는가.
2. 아다라시키무라
이상향이 실재 할 수 있을까. 유토피아란 본디 현실에는 없는 곳인데, '현실에 없는 곳'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현실일까, 환상일까.대체 현실을 떠난 이상향이란 게 존재할 수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데 자신들만 행복에 겨워 산다면 그 행복이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 설령 지상에 유토피아를 실현하고 있는 그런 무리들이 있다고 한들 그것은 다만 현실에는 없는 곳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상향을 꿈꾸며 무샤코지 사네아츠가 기획했던 공동체 마을, 아다라시키무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의문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 몸을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서 더욱 그런 것일까요.
'새로운 마을'(新しき村), 아다라시키무라는 도꾜에서 전철을 타고 불과 두 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일주문이 나타납니다. '이 문을 들어서는 사람은 자기와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길 외에는 나를 살려나갈 길이 없다. 이 길을 가련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도꾜를 비롯한 인근 도시에서 찾아온 방문객들로 마을은 제법 북적거립니다. 방문객들은 마을을 돌아보고, 더러는 마을 가운데 있는 가게에 들러 마을에서 생산한 계란과, 빵, 녹차, 표고버섯, 야채, 레몬 대용으로 쓸 설익은 유자 등을 사갑니다. 여타 공동체들과 다르게 이곳은 방문객들이 전혀 제한을 받지 않고 언제든지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부근 마을에서 산책 나온 주민들이 개똥 담을 비닐 봉지 하나씩을 들고 개와 함께 걷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일과처럼 보입니다. 돌아보니 사방 어느 곳이나 다른 마을로 통하는 길이 있지만 울타리와 대문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다라시키무라는 1918년 일본의 소설가 무샤코지 사네아츠(1885~1976)를 비롯한 열아홉 명의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과 '자기 실현'을 모토로 미야자키현에서 시작한 공동체 마을입니다.
초기에는 무샤코지 자신을 비롯해서 문학, 미술, 영화, 출판인 등 문화예술인들이 주축이었습니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의 시나리오를 쓴 오구니 히데오도 14세때부터 여러 해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함께 했었다는군요.
창설 자금은 무샤코지 자신의 신혼집을 팔아 마련했으며, 무샤코지는 설립 7년 뒤부터 아예 마을을 떠나 집필 생활을 통해 돈을 모은 뒤 마을 운영 자금을 댔고 그것은 평생을 통해 계속됐다고 합니다.
현재의 사이타마현으로 이주한 것은 1939년 댐건설로 미야자키현의 마을이 수몰된 뒤였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불과 1가구 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공동체가 위기에 몰린 적도 있었으나 창립 40년이 흐른 68년에 이르러서는 완전한 자활이 가능해졌다 합니다. 한때는 50여명까지 함께 살았던 적도 있었지만 현재는 25~6명만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마을은 전체 10ha(3만평)의 면적에 논이 2ha로 논농사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그밖에는 양계장과 버섯 양식장, 방앗간, 차와 채소를 재배하는 농경지들이 있고, 마을 중심에 아다라시키무라의 생활과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실인 생활관과 이발관, 무샤코지의 미술품과 저작들을 전시하는 무샤코지 기념 미술관, 공연장을 겸하고 있는 공동 식당(공회당), 아틀리에, 다실 등이 있습니다.
공동체 주민들은 전형적인 일본 농촌 주택 형태의 가옥에서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마을의 주 소득원은 양계인데 전체 수입의 80% 이상을 양계가 차지하고 있으며 쌀을 비롯한 주요 먹거리의 대부분을 자체 생산해내는 자급자족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재단법인으로 등록돼 있는데 회원은 현재 마을에 거주하는 촌내 회원과 공동체의 정신에 공명하여 마을을 후원해주는 촌외 회원의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촌외 회원은 년 회비 6000엔과 특별회비 1만엔 씩을 내서 후원하며 현재 촌외 회원은 700여명이라고 합니다.
아다라시키무라가 한창 번성 중일 때는 마오쩌뚱도 깊은 관심을 표하며 중국 농촌건설의 전범으로 삼고자 했다고도 합니다. 그 무렵에는 티벳의 달라이 라마까지 이 마을을 방문했다고 전해집니다. '왕이 마을에 찾아 오는 것은 좀 드문 일이다', 당시 기록에 남은 말이라는군요.
일흔 세 살 할머니의 안내를 받아 세 사람의 일행은 다다미 방에 여장을 풀고 마을길을 따라 산책에 나섭니다. 마을 한가운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폐쇄된 옛 우물터 옆에서 '시로'라 불리우는 개 한 마리가 무심히 앉아 있습니다. 유순하게 생겼지만 내가 아는 체를 해도 무덤덤한 표정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곳은 같은 위도상의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난대성 수목들이 눈에 띄게 많습니다. 북쪽인데도 동백나무, 비파나무, 차나무 등 사철 푸른 나무들이 잘 자라는 까닭이 무엇일까.
이른 가을걷이를 끝낸 논과 차밭, 양계장과 방앗간, 표고 버섯 재배지를 둘러보고 무샤코지 기념 미술관에 들어섭니다. 2백엔의 입장료를 받는 미술관이라고는 하지만 무샤코지가 남긴 그림과 서예 작품, 저서 등을 전시해 놓은 유품 전시관인 듯싶습니다.
'이 길 외에는 나를 살려나갈 길이 없다. 이 길을 가련다'.
마을 입구 일주문에 쓰여져 있던 글귀가 미술관에도 액자로 걸려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할 것이 많다. 사랑하는 일은 즐거움이 된다'
'너는 너, 나는 나, 그래도 사이좋게'
'하늘에는 별, 땅에는 꽃, 사람에게는 사랑'
너는 너, 나는 나, 그래도 사이좋게. 독립된 개체로서의 인간을 완전하게 존중하면서 조화로운 공동체를 꿈꾸었던 무샤코지의 사상이 이 한 문장에 다 들어있다고 생각하면 섣부른 예단일까. 나는 무샤코지의 생각에 깊이 공감합니다.
공동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버리고 비우는 것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아주 중요한 요건입니다. 하지만 공동체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공동체가 수도자들의 공동체가 아닌 다음에야 사람들에게 어떻게 자기 자신을 모두 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사원을 만들면 되지 굳이 공동체를 건설할 필요는 없을 테지요.
우리는 성자나 전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모순덩어리 인간들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그것이 비록 더디고 고통스런 과정을 요구할 지라도, 결코 완성에 이를 수 없을지라도 보다 근원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 공동체로부터도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단 한 사람일지라도 소수자의 자유의지가 억압되지 않는 공동체. 나는 지금 불가능한 꿈을 기획하고 있는 것일까.
미술관을 나서는데 사무실 안에서 미술관을 운영을 맡고 있는 네즈요 할머니가 방문객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표를 끊어주고, 책자와 도록을 판매하고, 청소와 안내, 미술관 운영과 관리에 대한 모든 것을 할머니 혼자서 다 해내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올해 아흔살입니다.
아다라시키무라의 구성원들은 하루 6시간의 의무노동시간과 주 1회 휴일을 지키고 있으며 65세 이상이 되면 의무노동이 면제되지만 권리는 그대로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65세가 넘어도 노동을 그만두는 사람은 없다는군요. 즐거워서 하는 일이고,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일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하는 노동이니 기쁘지 않을 까닭이 없겠지요.
기쁨이 거세된 노동은 고역입니다. 문득 보길도에서 농사짓는 노인들 얼굴이 떠오릅니다. 늘 고질병에 시달리고,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고역같은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할머니들. 그 할머니들은 생이 끝난 다음에라야 고역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하루 세 끼를 먹는 이곳의 저녁 식사 시간은 6시부터 7시까지입니다.
왁자지껄 하리라고까지야 기대도 안 했지만 식당은 지나치게 한산합니다. 몇 사람의 노인들만이 조용히 저녁을 들고 있습니다. 공동체라면 으레 밥상 공동체를 먼저 떠올리는 나의 상식으로는 의외의 상황입니다.
사실 많은 공동체들이 적어도 하루 한 끼는 함께 밥을 먹으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고 구성원 상호간의 소통시간으로 삼는데 이곳은 예외인 듯합니다. 식당의 음식을 집으로 가져가서 먹는 사람들,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사람들, 식사 방식도 정해진 규칙이 없이 자유롭다고 합니다. 아다라시키무라의 밤이 깊어 갑니다.
3. 대화
새벽 한기에 잠이 깹니다. 눈은 떴으나 이불 속을 빠져나가기가 싫어 한참을 미적거립니다. 옆에 누워 계신 박신부님도 같은 심정인가 봅니다. 건넌방의 전은이 씨는 아직 일어난 기척이 없습니다.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다다미 방. 이곳은 바깥 보다 먼저 집 안에서 겨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타라시키무라에서는 물질적으로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정신적으로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잘못 생각하고 있다. 아타라시키무라에서는 모두가 지평선 이상의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그 다음부터는 각자의 생각, 결심, 천분, 성격에 의해 달라진다. 원래 아타라시키무라에는 주인도 노예도 없으며, 폭력으로 타인을 압박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마을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인간이 마을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보다 존경받고, 현명한 이가 어리석은 이보다 존경받으며, 기분 좋은 이가 불쾌한 인간보다 사랑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자연이기 때문이다."(무샤코지 사네아쯔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중에서)
아다라시키무라에는 어떠한 정부도 지도자도 없습니다. 지시하거나 명령할 수 있는 명령권자를 두고 있지 않으며 개인의 자율적 의지와 자주성에 의해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고, 공동체 생활 경력이 오래 됐더라도 누구에게 명령할 수 없는 것이 철칙이라는군요. 어떠한 계급도 상하관계도 없이 모두가 형제 자매인 사람들. 와타나베 노인도 마을의 헌법 제 1조가 '절대 서로 명령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라고 일러줍니다.
노인을 만나기로 한 것은 마을의 가장 연장자인 까닭에서였습니다. 91세의 와타나베 노인은 목단 밭과 매실 밭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노인은 공동체에 젊은이들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걱정합니다. 80년 전과는 다르게 세상은 풍요로워졌고 마을의 소박한 생활이 젊은이들에게 별다른 매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일 거라고 분석합니다. 우리는 묻고 노인은 대답합니다.
- 공동체란 무엇입니까?
"공동체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은 우리가 만들어서 먹고 생활하자는 것이지요. 바르게 살자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르게 살려 나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결코 타인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공동체 정신입니다."
- 농업만으로 공동체의 유지가 가능한가요?
"농사만 지어서는 어렵습니다. 많은 부분 양계에 의존하지요. 하지만 농산물 가격이 싼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명 있는 자는 먹어야 사는데 먹는 것으로 경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 갈등이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 해결합니까?
"어느 곳이나 갈등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갈등이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다수결로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지요. 소수의 의견 또한 다수의 의견과 같은 비중으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참고 기다리면 시간이 해결해줍니다."
- 의무노동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아무도 의무노동을 강제하거나 감시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판단해서 모자라면 다음날 채웁니다. 설령 아무 일도 않는다고 한들 강제로 일하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적성에 맞지 않아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경우 다른 일에서 찾도록 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모두가 도와줍니다."
- 공동체에서 나가려는 사람은 어떻게 설득합니까?
"설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에 맡깁니다. 생각이 바뀌어서 나가려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 공동체 입촌 자격이 있습니까?
"명령하려 하지 않고, 폭력적이지 않은 평화적인 정신의 소유자면 누구든 환영합니다."
- 여러 공동체가 입회시 재산을 헌납 받습니다. 아다라시키무라는 어떤가요?
"재산 헌납의 의무는 없습니다. 80년 마을 역사상 재산을 헌납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 노령화로 현재 있는 땅에 농사 짓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데 땅을 계속 사들이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의 우리들만을 위해 땅을 사지는 않습니다. 장래를 위해, 세상을 위해 사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과 혈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올 공동체 지향자들을 위해 땅을 남기는 것입니다."
- 젊은 사람들이 너무 적습니다. 존립이 위태롭게 될까 걱정입니다?
"젊은이들이 왜 안 오는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한 가족으로 줄었을 때도 적은 숫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사라지더라도 공동체는 반드시 다시 부활합니다. 인간의 생명으로서는 끝이지만 마을의 생명으로서 80년이란 이제 겨우 시작이지 않습니까."
- 하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까지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까?
"아이들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라기 때문에 보고 배우고 따라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떠났습니다. 아이들 교육은 실패였습니다. 너무 자만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 공동체가 외부 세계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나 사회적 실천 없이 너무 자족적인 것이 아닙니까?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신이 구제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을을 믿지 않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공동체란 그 자체가 사회적 실천입니다."
- 공동체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부탁합니다.
"공동체는 먼저 해봐야 합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명이고 의무입니다. 인간을 살릴 최선의 방법입니다."
짧은 만남이 끝나고, 10월이면 만으로 아흔 한 살이 되는 와타나베 노인이 손수레를 끌고 일터로 갑니다.
4. 고려 신사
옆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사소 씨가 인근에 고려 신사가 있으니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나섭니다. 점심 식사 후 2시간의 휴식 시간을 이웃나라 나그네들을 위해 쓰겠다는 호의를 우리는 고맙게 받습니다. 아다라시키무라가 위치한 이 지역도 한때는 고려군으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리마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요.
양계장을 관리하는 사소 씨가 모는 봉고차를 타고 20분 남짓 달리자 띠로 지붕을 해 올린 거대한 움집이 나타납니다. 고려 신사인가 물으니 고려가 주택이라고 합니다. 당시 고구려 이주민들이 주거했던 주택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듯싶지만 너무 거대하여 주택이라기보다는 초가 궁전 같습니다.
고려가 주택에서 5분 거리에 고려 신사가 있습니다. 평일인데도 신사는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합니다. 신사 입구부터 한국 색이 물씬 풍겨옵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장승이 떡 버티고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 신사에서 소원을 빌면 출세하는데 효험이 뛰어나다고 해서 출세신사라고도 불리우는 고려신사.
고구려가 멸망한 후 716년에 고구려 유민 1700여명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와 고려인 촌을 형성하여 살았는데 고려 신사는 당시 유민들을 이끌고 왔던 고려왕 약광(若光)을 모시는 신사라고 합니다. 고구려가 멸명한 것이 668년, 그로부터 근 50년간을 나라 잃고 떠돌던 유민들이 마침내 이곳에서 안주할 곳을 찾았으니 참으로 고마운 땅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들은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그들이 고구려에서 온 것을, 또 고구려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 것을 애달파할 까닭은 없습니다.
실상 어디서 온 것이 무에 그리 중요겠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어딘가로부터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일 테지요. 더러 사람들은 뿌리를 찾기 위해 안달을 하지만 인간은 본시 모두가 한 뿌리가 아니었던가요. 한 뿌리에서 나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지체들이 아니었던가요.
5. 밤
아다라시키무라에 저녁이 옵니다. 도꾜에 거주하는 촌외회원인 아다라시키무라 재단 이사장의 주선으로 마을 주민들과 간담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이사장은 자신이 이사장이라고 해서 더 많은 권한이 있거나 특별한 위치에 있지 않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모임에는 촌 내 회원 일곱 사람과 촌 외 회원 두 사람 등 모두 아홉 사람이 나왔습니다. 여기 나온 촌 내 회원들은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삼사 십년 이상 공동체 생활을 함께 해온 사람들입니다.
이사장은 아다라시키무라는 생활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공동체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단지 생활만을 위해 모인 공동체는 결코 오래 유지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또 마을을 떠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마을과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86세의 세시로 노인은 말합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왔다. 하지만 자신도 부족한 인간인데 다른 사람이 부족하다 해서 책망할 수 없다.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을 성숙시키면 상대방도 성숙된다."
표고버섯 재배를 책임지고 있는 테라시마 씨는 "많은 외국인들이 마을을 견학하거나 생활을 체험하고 돌아갔다. 그 중에는 한국인도 있었고 영국인도 있었다. 그들과 함께 생활 하면서 외국인이라는 구별은 없었다. '신은 지구 위에 아무 선도 그어놓지 않았다'고 한 간디의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똑같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쓰즈다 노인이 자신을 소개하자 통역을 하던 전은이 씨가 반색을 합니다. 아다라시키무라를 방문하기 위해 홈페이지를 방문했는데 이 노인이 홈페이지를 만든 사람이었다니!
노인은 아다라시키무라의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88세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했고 웹디자인도 배워서 직접 아다라시키무라의 홈페이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새로운 홈페이지를 제작 중에 있다고, 돌아가서도 메일로 자주 연락하자고 반가워합니다. 아흔살의 노인이 소년처럼 활기차게 웃습니다.
모임에 나온 사람들은 많은 부분 생각이 일치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아이들 교육문제가 나오자 의견이 갈리기 시작합니다. 아다라시키무라에서는 아이들에게 공동체의 이념과 철학을 따로 교육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영향인지 공동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2세들이 단 한 사람도 공동체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다들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아다라시키무라의 창설자인 무샤꼬지의 책을 한 권도 읽어 보게 하지 않은 부모들도 있었다 하니 많은 공동체가 창설자의 정신을 애써 가르치는 것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아이들에게 공동체의 이념과 철학을 교육시키지 않은 것이 올바른 것이었을까. 아무리 자신의 아이들이라도 강제로 공동체의 이념을 교육시키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행동이며 공동체의 이념에도 위배된다는 입장과 그래도 교육이 필요했다는 입장이 팽팽이 대립하면서 토론이 길어집니다. 누구 하나 언성 높이지 않는 차분한 토론이 계속되고 있지만 결코 결론은 나지 않을 듯합니다.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일방적인 가치를 주입시키는 것에는 나 역시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아다라시키무라에서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너무 방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스스로 판단하여 공동체의 가치를 받아들이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태도는 어쩐지 너무 무책임했다는 느낌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일본 사회의 제도 교육을 고스란히 받도록 방치했었기에 더 더욱 그렇습니다. 제도 교육에서 결코 가르치지 않는 것들, 공동체적 가치들을 아다라시키무라의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가르쳤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간담회를 마치며 한국의 청년들이 이곳에 와서 공동체 생활을 체험하도록 해줄 수 있는지 예수살이공동체의 대표인 박기호 신부님이 묻습니다. 세시로 노인이 대답합니다. "무언가를 배우려고 찾아온다면 오지 않는 게 낫습니다. 배워갈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무언가를 함께 하려고 온다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6. 미에현으로
'자기에게 부여된 자유를 진정으로 누리는 길은 무엇일까.'
'현실이 강하지만 이상의 힘은 더욱 강하다'
아다라시키무라를 떠나 미에현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내내 무샤코지 사네아츠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잊혀져 가는 공동체, 젊은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마을을 나도 이제 막 떠나왔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닐 테지만 늙음이 그렇듯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인가. 나는 어떤 정신에 사로잡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마저 모두 떠나고 청년들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 아다라시키무라. 그 노쇠한 공동체가 실패한 공동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단 두 사람이 만나 50년을 해로해도 금혼식을 올려 경하하고 모두가 놀라워하는데, 수십명의 사람들이 80여년을 함께 해 왔다는 사실은 그 하나만으로도 기적같은 일입니다. 그것이 종교의 힘으로 지탱되는 수도 공동체나 신앙공동체도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80년을 이제 겨우 시작이라고 말하는 마을의 노인들, 그 원대한 구상에는 절로 머리가 숙어집니다. 아무도 서로에게 명령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으며, 엄격한 규율도 없이 그들은 80년을 조화롭게 살아왔습니다. 규모를 키우기보다는 정신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고결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자기에게 부여된 자유를 진정으로 누리고 사는 길'은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일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본디 공동체인이었을 것입니다. 공동체인이었으므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지금은 잃어버린 가치, 그 옛날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일 테지요.
하여 우리가 지금 보고 온 것은 새로운 형태의 삶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 삶의 원형이었을 것입니다. 기차가 또 다른 공동체의 땅, 미에현에 차츰 가까이 다가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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