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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신 자녀라면 누구나 해 봤을 고민 하나가 있다. 두 분 중 한 분 먼저 세상을 떠나실 경우 남은 한 분은 어디에서 누구와 어떻게 사시나 하는 것이다. 당사자들께서 한 날 한 시에 가시기를 소망하기도 하지만 결코 뜻대로, 원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여기 81세 할아버지 '샘'이 혼자 남았다. 57년 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가 심장 발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겨진다. 다리 하나가 성치 못해 네 발 달린 보행 보조기 없이는 꼼짝도 못하는 할아버지가 이제 혼자 살아가야 한다.

평생 묘목 농장을 하며 일해온 샘 할아버지는, 첫 아들을 잃은 것을 빼고는 7남매 모두 흡족하게 잘 자라 가정을 이루고 편안하게 살고 있다. 혼자 남은 아버지를 위해 이웃에 사는 두 딸이 매일 들르고 나머지 딸과 아들, 며느리가 순번을 정해 찾아 온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혼자다.

어느 날부터인가 할아버지 눈에 '하얀 개'가 보이기 시작한다. 음식을 주고, 아내와 첫 아들의 무덤에도 함께 가고 하면서 정을 나누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하얀 개'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녀들은 아버지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기도 하고 그 개를 유령 개로 여기기도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떨어지는 기력, 친구들의 죽음, 혼자 트럭을 몰고 먼 길을 떠났다가 길을 잃는 소동, 암 발병 이야기가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이어지면서, 결국은 가족들도 '하얀 개'를 눈으로 보게 된다. 임종을 앞둔 샘은 가장 사랑했던 막내 아들 제임스에게 말한다. '하얀 개'는 네 엄마였다고, 네 엄마가 나를 지켜주기 위해 다시 돌아온 거였다고.

79세, 74세이신 친정 부모님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는 나도 가끔 '두 분이 사시다가 한 분만 남게 된다면…'하고,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생각해 보곤 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며 사는 노부부라면 혼자 남은 남편이, 혼자 남은 아내가 걱정되고 가슴 아프고 안쓰러워 '하얀 개'로 나타날 법도 하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혼자 계신 아버지를 걱정하며, 자녀들이 서로 의논해서 당번을 정하고 사소한 일이라도 생기면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한 모습들이다. 샘은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닌데, 자녀들이 지레 짐작으로 계획을 세우고 다같이 달려와 부산을 떠는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고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그는 자식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가 자식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샘의 보행 보조기에 '하얀 개'가 앞발을 올려 놓으면, 샘이 보조기를 이리 저리 움직인다. 그들의 춤이다. 그들은 함께 춤을 춘다. 아내도 아이들도 다 떠나고 혼자 남은 집에서 춤추는 노인과 '하얀 개'. 그 안에는 고요와 침묵을 넘어서는 노년의 적막감이 담겨 있다.

혼자 보내야 하는 노년. 품고 길렀던 자녀들은 다 떠나 자신의 아이들을 품고 기르느라 여념이 없고, 같은 시간을 살아온 친구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가장 가까이에서 마음을 나눈 배우자 역시 가고, 결국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라는 것을 알게 해 주려는 듯 혼자 남는다.

그 때 나에게도 '하얀 개'가 나타날까, 그럼 그 '하얀 개'는 과연 누구일까. 인생의 마지막, 혼자 남았을 때 '하얀 개'가 찾아 오고, 그 '하얀 개'를 볼 수 있었던 샘 할아버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다.

(하얀 개와 춤을 To Dance With the White Dog, 테리 케이 소설, 최인자 옮김, 북@북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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