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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건 사랑이다. 어떤 덧붙임도, 설명도 필요 없는 사랑이다.

유람선 위의 불빛 밝은 결혼식. 신부가 친구에게 던진 부케가 강물에 빠지고, 그 밑으로 시체가 떠오른다. 한국 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 수용소의 포로 탈출에 얽혀 있는 인물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흑수선'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남로당원 손지혜, 그를 사랑하는 손지혜네 집 머슴의 아들 황석, 탈출한 포로들의 지도자인 한동주, 중간에 숨어 있던 곳을 빠져나가 밀고하는 강만호, 그들을 잡으려는 양달수, 양달수와 함께 포로를 검거하는 데 앞장서는 지서 주임 김중엽.

황석의 목숨을 대가로 지서 주임은 손지혜의 재산을, 양달수는 손지혜의 몸을 얻고, 한동주는 이들에게 손지혜를 넘겨주는 대가로 목숨을 구해 일본으로 간다. 거기다가 손지혜의 목숨을 대가로 황석은 50년의 감옥 살이를 하게 된다.

비전향 장기수 황석이 50년 만에 만기 출소한 다음 날, 살해 당한 것으로 밝혀진 한강에 떠오른 시체의 주인공은 양달수. 이어서 지서 주임이었던 김중엽도 살해 당하고 젊고 자신만만한 오 형사가 사건을 쫓아 50년 전의 역사 속으로 뛰어든다.

그래 그건 사랑이었다. 손지혜를 사랑했기에 황석은 이념 싸움의 희생자가 되고, 그 황석의 사랑으로 손지혜는 이념에서 벗어난다. '오빠,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줘'에 '네가 없으면 나도 세상에 없다'고 대답하는 순간 그들은 운명의 끈에 꽁꽁 동여매지고,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한다.

양달수에게서 버림 받기 위해 눈먼 척 하다가, 차라리 보지 않고 사는 것이 낫다고 여겨 계속 안보이는 것으로 행세하던 손지혜. 그러나 그들이 함께 자신과 황석 두 사람 모두를 속였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는 눈을 가렸던 렌즈를 빼버린다. 그리고는 황석을 보러 간다.

눈 가리고 귀 막게 하는 게 사랑이라 했던가. 그러나 이들은 눈 가리고 귀 막고 50년 세월을 마음의 감옥에서, 그리고 실제 감옥에서 살았지만 결국 사랑으로 눈을 뜨고 귀를 연다. 그래서 죽어 있는 손지혜를 향해 걸어가면서 황석은 소리친다.

"손대지 마, 그 사람한테 손대지 마, 아무도 손대지 마"

두 사람이 헤어질 때, 다시 만나면 그 때 나한테 끼워 달라며 황석의 손가락에 손지혜가 끼워준 금반지 하나. 이제 죽어 내 앞에 누운 사랑. 평생 끼고 있던 내 손에서 반지를 빼 끼워 주려 하니, 늙고 주름진 손가락은 말라서 반지는 헐겁기만 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슬픔의 얼굴에 다름 아니라며 나무를 깎아 사랑을 새기는 황석 할아버지. 그래 그건 사랑이다. 나는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갈 사랑 하나 가지고 있는가.

사람, 삶, 사랑이 한 뿌리임을, 글자를 써 놓고 가만히 들여다 본다

(흑수선 / 감독 배창호 / 출연 이정재, 이미연, 안성기, 정준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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