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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 우리 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층 목탑인 팔상전이다. 1968년에서 1969년 사이 완전 해체 수리를 거치는 과정에서 은으로 만들어진 사리합이 발견되었는데, 팔상전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가 적혀진 명문이 있었다. ⓒ 권기봉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으나 세속이 산을 여읜다.(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 최치원

고향이 충북 어느 산동네이기 때문일까. 어릴 적 수학여행을 가도 동네 어른들 여행에 따라갈 때마다 정말 자주도 오른 산이 속리산, 동시에 질리도록 찾은 절이 법주사일 것이다. 하지만 어렸을 적 여행이란 것이 대부분 그럴 테지만 그 진면목을 정확히 짚지 못하고 주마간산식으로 지나쳐 가기가 다반사였던 것 같다.

물론 다르게 생각하면 그때의 여행이란 것이 가장 순수한 눈으로 보고 느끼는 여행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없진 않지만, 가끔 미리 착실히 자료를 모으는 등 준비를 해서 떠나는 여행이, 개인적으로는 지금 이 시기에 맛볼 수 있는 또 다른 묘미인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법주사는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에 걸쳐 있는 소백산맥 끝자락 속리산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사찰이면서도 너르고 평탄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또한 그 법주사에 가기 전에 지나쳐야 할 속리산 관광단지 역시 속리산 아래 비교적 터가 너른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산채 비빔밥 등으로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는 것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침 식사로 비빔밥이 웬 말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충청도 인심을 반찬으로 먹는데 무엇이 문제랴. 식사를 마쳤으면 간식거리로 구수한 호박엿 하나 사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보자. 오랜만에 산을 찾았는데 너무 서두르진 말자. 아직 안개가 피어있으면 운이 좋은 것이다. 오후에 날씨도 맑겠다, 골짜기 사이에 핀 안개가 주는 멋은 도회지에서는 누릴 수 없는 산골에서 만의 축복이기에.

법주사에 가기 위해서는 ‘오리숲‘이라고 불리는 울창한 숲길을 지나가야 한다. 소나무와 전나무 등 오랜 세월 거기 서 있었을 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이 오 리 정도 된다고 하여 오리숲이라 부른다는데, 그 아름드리 나무들은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보기는 힘든 나무들일 뿐만 아니라 작은 초목 하나에도 이름표를 달아놓아 나무 구경하기 힘든 세상에 좋은 교육의 장으로서도 부족함이 없겠단 생각이 든다. 오리숲을 지나 물 속의 물고기와 낙엽이 다 들여다보이는 내에 걸쳐 있는 수정교를 건너면 금강문 너머 이내 법주사다.

일단 경내에 들어서면 정면에 정면 좌측으로 우뚝 솟은 청동미륵대불이 보인다. 1964년에 만들어진 시멘트 미륵대불을 1990년에 들어 청동으로 바꾼 것인데, 기단부터 정수리 살상투까지의 높이가 33m에 이르는 이 청동미륵대불의 기단 밑에는 지하석실 법당인 용화전까지 두었다. 또한 청동미륵대불의 오른쪽, 그러니까 지금 서 있는 곳의 정면으로 청동미륵대불보다 규모가 작긴 하지만 여느 불사에서는 보기 힘든 오층 목탑 ‘팔상전’이 있다. 그곳으로 곧장 가기 전에 들어온 곳에서 바로 왼쪽으로 돌아가 보자.

마애불 연화대좌에 앉아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이 불상은, 잘록한 허리와 거의 수직으로 꺾이는 다리 모양새가 왠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 권기봉
계곡을 면한 곳에 큰 암벽이 있는데 그곳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이름하여 추래암, 즉 떨어져 나온 바위로, 여기에 암각되어 있는 불상은 11세기 고려시대의 것이라 한다. 연화대좌에 앉아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이 불상은 특히 잘록한 허리와 거의 수직으로 꺾이는 다리 모양새가 왠지 어색하기만 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이 마애여래의상의 왼쪽 아래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뭔가가 더 조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역시 투박한 선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말과 사람 등이 보인다. 한편 이 마애여래의상과 작은 조각들이 새겨져 있는 바위에 거의 수직으로 맞대어져 있는 바위에도 지장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특히 이 두 큰 바위의 위쪽에는 큼지막하게 구멍이 나 있는데 아마도 전각 등을 올리는 데 쓸 받침목을 끼워넣기 위해서였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

부도밭 담장 밑 누구의 불심이 더 셀까 ⓒ 권기봉

여기서 바로 팔상전의 반대쪽, 즉 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자. 나지막한 담에 둘러싸인 부도밭이 희뿌연 산 안개 속에 자리잡은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그 낮은 담장 아래로는 마치 누구의 불심이 더 높은지를 뽐내기라도 하듯 작은 조약돌 탑들이 늘어서 있다.

마애불과 부도밭을 둘러보았으면 철당간 앞에 서자. 이 철당간은 한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가져가 당백전을 만드는 데 이용하기도 했던 것으로, 고려 목종왕 10년(1007)에 처음 만들어졌다.

여기에 서서 이전에 들어온 금강문의 반대편을 보면 쇠로 된 솥이 우두커니 서 있다. 요즈음에는 시골 고향 집에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쇠솥인데, 그 크기가 실생활에서는 거의 찾아보지 못한 것이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솥에 쌀 40 가마는 너끈히 들어가고도 남는다고 하니, 그 옛날 법주사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바로 옆에는 동시대인 통일신라 시기의 석조도 한 기 남아 있는데, 3천여 명의 승도들이 이곳에서 수행할 때 이용하던 것이라 전해진다.

연지 팔각 받침돌과 짧고 굵은 기둥 위에 연지를 올렸는데, 연지에는 두 겹의 연꽃과 보상화를 조각했다. 특히 연지 위에는 기둥과 함께 난간이 아담하게 둘러져 있다. ⓒ 권기봉

한편 철당간과 청동미륵대불 사이에는 역시 규모가 예사롭지 않은 한 기의 석연지가 누각에 의해 보호되어 있다. 예전에는 법주사의 중심 건물이던 용화보전 앞에 있었다고 하는데, 국보 제 64호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보아서 그런지 한층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

이제 청동미륵대불과 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팔상전과 만나게 되는데,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오층 목탑으로서 정유재란 때 불탔던 것을 사명당 유정스님이 복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국보 제 55호이기도 한 팔상전의 월대 및 계단 부분은 처음 세워질 때인 통일신라시대의 것이며, 지붕의 상륜부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전한다.

특히 팔상전에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팔상도’가 봉안되어 있는데, 팔상도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와 출가를 하고 고행 끝에 성불을 한 후 열반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여덟 장의 그림으로 나타낸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 팔상도가 팔상전 내부에 네 안쪽 벽면을 돌아가며 두 장씩 총 여덟 장이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그림들을 보기 위해서는 자연히 가운데 내벽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게 되는데, 무구한 세월을 대변하는 듯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그림들을 살펴보노라면 마치 탑돌이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쌍사자석등 통일신라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쌍사자석등으로, 높이가 3.3m에 달하지만 거의 완벽한 균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 권기봉
팔상전을 지나 절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여느 곳에서는 보기 힘든 조화미 물씬 풍기는 국보 제 5호 ‘쌍사자석등’을 만날 수 있다. 이 석등은 현재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통일신라 시기 석등인데, 팔각기둥이 차지할 자리를 대신 차지한 두 마리의 사자의 움직임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 힘차 보인다.

불교 상징에 사자상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 마가다국의 아소카왕 기념 석주에 나오는 사자상이라고 전해진다. 이는 부처님과 불법을 수호한다는 상징을 내포한 것인데, 불교에서는 실제로 ‘사자후(獅子吼)’나 ‘사자심(獅子心)’, ‘사자유(獅子乳)’ 등의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 부처님의 위엄을 짐승의 왕인 사자에 자주 비유하곤 한다.

특히 두 마리 사자들의 입 부분을 자세히 보면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는 반면 나머지 한 마리는 입을 굳게 다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런 의미 없이 괜히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으리라. 범어에서 사자가 입을 벌린 모습은 ‘A(아)’ 발음을, 입을 다문 모습은 ‘M(훔)’ 발음 뒤에 오는 짧은 침묵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즉 ‘A’는 입을 열 때를 의미하며 ‘M’은 입을 닫는 소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시작에서 끝, 즉 진리를 깨닫게 되는 시작과 그의 터득, 자아와의 일체화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실례로 양산 통도사의 금강계단 신장상이나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석굴암 금강역사 등의 모습에서 이러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원통보전 법주사의 원통보전으로서 중생의 고뇌와 번민을 해결해주는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 권기봉

이 쌍사자석등에서 왼쪽을 잠시 보면 원통보전이 있다. 법당으로서는 특이하게도 처마가 깊은 사모지붕을 가졌는데, 특히 그 기단은 통일신라 말기의 것 그대로라고 전해진다.

사천왕석등 높이 3.9m의 제법 큰 규모이지만 날렵하면서도 안정된 모습이다. 이 사천왕석등에는 이름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화사석의 각 면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다. ⓒ 권기봉
원통보전을 대략 둘러본 다음 대웅보전 쪽을 향해 나아가자면 석등을 하나 지나게 되는데 ‘사천왕석등’으로 이전에 보고 지나왔던 쌍사자석등과 함께 늘씬한 균형미가 일품이다. 이 역시 석연지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용화보전 앞에 있던 것을 지금의 이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인데, 이전에 석연지와 향로를 가지고 있는 희견보살상과 함께 ‘등’과 ‘차’, ‘향’의 공양을 의미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한편 이 석등에서는 대웅보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법주사 대웅보전은 높이가 거의 20m에 달하는 2층 구조를 가졌는데, 2층 구조의 절집은 현재 찾아보기가 거의 힘들어 공주 마곡사나 구례 화엄사 등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고려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의 내부에는 가운데 비로자나불과 왼쪽으로 석가모니불, 오른쪽으로 노사나불이 봉안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은 말 그대로 진리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석가모니불은 특정 시기 혹은 지역에 특정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부처를, 노사나불은 오랜 수행의 결과로서 나타난 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불전의 중심불이 이미 본 것처럼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웅보전이라는 이름은 부적절한 사용인데, 원래 이름은 ‘대웅대광명전’이라고 하니 그 이유가 있을 듯하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바로는 그저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만들기 위해 철당간을 비롯한 사찰 유물을 가져갈 때 지금의 대웅보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해질 뿐이다.

속리산 법주사에 가자면 정이품 소나무 등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것들을 많이 지나치게 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속리산 법주사 답사의 핵심은 신라 시대부터 조선까지 이어지는 법주사의 위엄일 것이다.

실제로 공민왕 11년(1362)에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경북 안동까지 피난했던 왕이 직접 들러 통도사로부터 사리를 가져다 봉안하기도 했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경우에는 즉위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일부러 이곳을 찾아 백일기도를 올리기도 하는 등 역대 왕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중심 사찰이었음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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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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