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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백제의 땅으로 시작한 충북 충주 지역의 역사는 5세기에 들어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취함에 따라 고구려의 강역에 포함되게 된다. 당시 충주는 국원성으로 불리며 남한강과 함께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데, 이때 고구려는 현재 충주 보조댐이 있는 충주 가금면에 비를 세우게 된다.

현재 비각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중원 고구려비가 세상에 알려진 지는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다. 20여 년 전인 1979년에 이르러서야 지역 문화재 동호회인 ‘예성동호회’ 사람들에 의해 최초로 학계에 이 비가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본격적인 조사를 거쳐 고구려의 비로 밝혀진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그저 어느 시골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이름 모를 비였을 뿐이다.

심지어 이 비가 이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알려질 당시에는, 1972년 남한강 일대를 휩쓸었던 홍수에 쓰러졌던 것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이 ‘칠전팔기의 마을’이라는 표어를 새긴 석주와 함께 세워놓았었다고 하며, 한 때는 대장간집 기둥으로도 쓰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유일무이한 고구려비인 중원 고구려비는, 크기는 다소 작지만 만주땅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 대왕비와 그 생김새가 무척 비슷하다. 한편 고구려비의 금석은 남아 있는 것이 상당히 드문데, 중원 고구려비에는 약 400자의 예서체 글씨가 앞 뒷면에 걸쳐 빽빽이 새겨져 있다. 앞 면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사이 좋게 지내던 때의 일들이, 그리고 뒷면에는 그러던 두 나라의 관계가 험악해진 이후 백제의 개로왕과 신라가 연합해 고구려에 대항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 비가 왜 이곳에 세워져 있는 지는 주변을 조금이라도 찬찬히 둘러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이 비가 세워져 있는 가금면 용전리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남한강 물길을 만날 수 있고, 이 지역은 현재의 경상도 땅으로 이어지는 새재 길이나 죽령, 계립령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남한강의 물길과 서울과 경상도 땅을 잇는 육로가 중첩되는 교통의 요지로, 이 일대를 차지한 차가 전략상의 이점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이 마을 북쪽 장미산에는 삼국시대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장미산성’이 있으며 이름 모를 고분들이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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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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