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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 ⓒ 중앙일보 제공
신년사(新年辭).

지난 한 해를 평가·정리하고 향후 1년을 전망·다짐하는 글을 가리키거니와, 2002년 첫날에도 역시 정치권과 종교계 등을 중심으로 수많은 신년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신년사라는 것이 원래 그렇듯이 대다수가 의례적인 덕담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홍수를 이룬 신년사 속에서 유난히 세인의 시선을 집중시킨 '물건' 하나가 있었다. 신문사 중 이례적으로 '신년사'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걸고 발표된 중앙일보 1월 1일자 사설 ['3김시대 언론'을 끝내자]가 바로 그것으로, '신선한 충격'이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만큼 구절 구절마다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신년사에 담겨진 중앙일보의 '다짐과 주장'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각 항목에 대한 소제목은 기자가 붙인 것임을 밝혀둔다.)

(1) 갈등과 분열에서 화해와 통합으로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거나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언론이 아니라 갈등과 분열을 잠재우고 화해와 통합으로 이끄는 중재자가 되겠다. 특히 지자체 선거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후보자 중심의 학연과 지연의 줄서기와 편가르기를 배격하고 실사구시적 관점과 글로벌 잣대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리겠다.

(2) 3김식 언론 행태의 구각을 벗어야
갈등과 반목으로 상징되는 3김정치의 청산과 극복이야말로 우리 정치의 진정한 민주화를 달성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언론 또한 지금껏 익숙했던 3김식 언론 풍토에서 벗어나야 거듭날 수 있다. 따라서 3김식 언론 행태에서 과감히 탈피해 새로운 형태의 일류신문으로서 진면목을 보이고자 한다.

(3) 언론개혁을 언론권력 자성의 계기로
지난 한 해 우리 언론은 껍질이 깨어지는 아픔을 겪고 새로운 자세와 모습으로 국민 앞에 서야 할 시대적 과제를 안게 됐다. 권력에 의한 탄압도 받았지만 우리 언론 스스로 권력화한 것은 아닌지 자성하는 성찰이 필요하다. 이제 군림하는 언론의 구각에서 탈피해 국민과 호흡하는 언론으로 거듭나야 한다.


▲ 중앙일보 2002년 '신년사'


흥미로운 것은 중앙일보의 이 세 가지 '다짐과 주장'을 뒤집어 보면, '한국 언론의 일그러진 자화상(自畵像)'이 그대로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중앙일보의 '다짐과 주장'은 화해와 통합보다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국민 위에 군림해 온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전과(前科)'에 대한 통렬한 고백인 셈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중앙일보 신년사가 우리에게 던져준 가장 큰 화두는 역시 "3김식 언론 행태의 구각을 벗자"라는 상징담론의 선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 언론은 지금까지 '3김식 정치 행태'를 맘껏 조롱하고 비난해 왔지만, 정작 그들 자신이야말로 '3김식 언론 행태'라는 마약에 깊이 취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3김시대 언론' 혹은 '3김식 언론'의 행태라는 것일까. 중앙일보는 그 개념을 이렇게 규정했다.

"한마디로 정치과잉의 단순과격형 비판자세다. 정치 일색의 대안 없는 단순 일변도 언론이다. 새로운 세기, 새 지도자를 뽑는 시점에서 이런 단순과격형 정치언론이야말로 지역감정과 이념갈등을 증폭시키는 구태의연한 언론제작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단순과격형 정치언론'은 결국 "대구·부산에 추석은 없다"거나 "세무조사는 언론탄압이다"라고 강변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조폭식 보도 행태'를 겨냥한 셈인데, 중앙일보는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나 정책으로 후보를 판단하고 제왕적 지도자가 아닌 기업경영자 같은 전문성과 지도력을 가려낼 여러 시도를 하고자 한다"는 선언도 덧붙였다.

'제왕적 지도자'와 '기업경영자'라는 용어도 의미심장하다. 우선 '제왕적 지도자'는 여야의 개혁파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씨 등 3김과 한나라당 총재 이회창 씨를 비판할 때마다 동원했던 단골 용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신문사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배타적으로 소유한 채 사회적 공기(公器)인 신문 지면을 사유화(私有化)하고 있는 족벌사주도 '제왕적 사주'로 불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결국 이것은 중앙일보가 '제왕적 사주의 리더십'을 고집하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분명하게 선을 긋고 '기업경영자(CEO)의 리더십'으로 거듭남으로써 차별성을 갖겠다는 의지를 시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중앙일보 2002년 1면 톱기사
신년사와 더불어 중앙일보 신년호 1면 톱기사도 주목된다. 「업그레이드 코리아 "품격 높은 한국을 만듭시다"」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는 '중앙일보가 뽑은 2002년 10대 국가과제'가 제시돼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두 번째 과제인 "예산 1% 대북지원에 쓰자"는 대목은 독자와 국민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국가예산 1%면 약 1조1천억원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액수의 크기는 과연 얼마나 될까. 이는 최근년도 민간차원 대북지원 액수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 각각 420억원(2000년)과 730억원(2001년)에 이른다. 결국 기존에 지원했던 액수보다 줄잡아 15배에서 30배를 증액하자는 주장인 셈이다.

그동안 보수언론이 대북지원을 '퍼주기'라는 용어를 동원해 일방적으로 매도해온 것과 비교해 보면 파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 한나라당의 홍사덕 의원도 이미 분석한 바 있지만, 천문학적인 '분단비용'을 무시한 채 대북지원을 무조건 '퍼주기'로 비난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사리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중앙일보의 제안은 '상식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도 긍정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중앙일보가 2002년을 맞아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신년사에 담아 공식적으로 대내외에 선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을 제일 먼저 고안하고 제시한 '중앙일보의 코페르니쿠스'는 과연 누구였을까.

많은 사람들은 중앙일보 '임오거사(壬午擧事)'의 주동자로 홍석현 회장(53, 이하 존칭 생략)을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최고경영자의 판단과 결단이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이러한 분석과 평가에 대해서는 중앙일보 내부에서도 전혀 이견을 달지 않고 있다.

신년사가 나오기 전까지 홍석현은 임직원들에게 몇 가지 암시적 발언을 해 왔거니와, 다음과 같은 '톡톡 튀는' 발언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일보를 보지 마라. 조선일보를 따라가선 1등이 될 수 없다. 앞차를 추월하려면 차선을 바꿔야지 뒤만 따라가선 안 된다"(2001년 9월 4일)

"초판을 없애 다른 신문과 차별화된 신문을 만들자"(2001년 9월 6일)

"중앙일보는 대선에서 특정 인물을 지지하지 않는다. 중립을 지켜야 할 기자가 사적인 이유로 특정 후보를 지지할 경우 중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2001년 11월 16일)


홍석현이 역설해온 이러한 '추월론' '차별론' '중립론'이 이번 신년사에 그대로 반영됐음은 물론이다. 특히 중앙일보가 한국 신문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조중동(조선·중앙·동아) 카르텔'에서 벗어나겠다는 '차별론'과 그 중에서도 '1등신문 10년세도'를 구가해온 조선일보의 아성을 함락시키겠다는 '추월론'과 관련, 홍석현은 이미 다음과 같이 '뼈있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한 신문은 시대의 흐름과 달리 하고 있고, 또 한 신문은 시대의 흐름에 한참 뒤떨어져 있다."(2000년 송년사)

그것은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은 분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 신문은 '70∼80년대 야당신문'의 본가(本家)라는 정통 브랜드를 사장시킨 채 '시대의 흐름과 달리하고 있는' 한 신문을 '맹구처럼'(진중권 버전을 차용했음) 따라가면서 뒷북만 치다 '시대의 흐름에 한참 뒤떨어진' 신문으로 몰락해버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지 않았는가.

그 신문사의 '늙은 사주'가 대낮부터 술에 취해 손자뻘 되는 대학생들 앞에서 '횡설수설'한 것은 그러한 몰락의 필연성을 여과 없이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아울러 '시대의 흐름과 달리하고 있는' 한 신문의 영향력도 예전만 같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밤의 대통령'을 참칭하며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세도를 누려왔지만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역사의 합법칙성마저 거스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최근 그 신문의 부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신문발행부수공사(ABC)에 의해 공식 확인된 것이다.

한국 최고의 '고소득 작가'가 비분강개하여 '술 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 이 신문을 적극 비호하고 나섰지만, 이 신문만 '콕 찍어서' 반대하는 주민운동이 충북 옥천에서 시작돼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되는 데는 백약이 무효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중앙일보가 작년 말 '초판 폐지'라는 비장의 카드를 예상보다 빨리 던지며 과감하게 치고 나간 것도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간파하고 그 흐름을 적극 활용하여 '차별론'과 '추월론'을 실천에 옮기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포석이었던 셈이다.

아울러 대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중립론'도 중앙일보가 1997년 대선 당시 노골적으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나선 것과 좋은 대조를 보여준다.

중앙일보가 2002년 10대 국가과제를 제시하고, 특히 "예산 1%를 대북지원에 쓰자"고 주장한 것도 홍석현의 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홍석현이 지난해 하반기에 '내셔널 아젠다'팀의 구성과 가동을 직접 지시했고, 이번에 나온 10대 과제도 거기서 나온 '작품'이라는 것이 한 중앙일보 기자의 증언이다.

실제로 홍석현은 다른 것은 몰라도 남북문제에 대해서만은 오래 전부터 전향적인 입장을 일관되게 지켜왔거니와, 공·사석에서 여러 차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작년 3월 15일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자문위원단 초청연설에서 행한 발언이 대표적인 사례.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에도 불구하고 한미정상회담 과정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과 갈등이 빚어졌던 살얼음판 상황에서 홍석현은 부시 정부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부시 행정부가 한국과 미국의 장기적 안정이란 관점에서 북한을 포용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2002년 새해를 맞아 과감하게 중앙일보의 변신을 시도한 홍석현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런데 홍석현 인물파일을 열기 전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중앙일보와 홍석현이라고 해서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비대신문의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이다. 중앙일보 역시 지면의 사유화, 통일과 개혁의 발목 잡기(2001년 8·15통일방문단 사건에 대한 이○○ 기자의 왜곡보도 등), 소외계층에 대한 홀대 등 족벌신문의 폐해를 보여왔으며, 무엇보다 홍석현 자신이 탈세라는 반사회적 범죄행위를 저지른 대가로 구속까지 됐던 당사자가 아닌가.

홍석현이 주도한 '발상의 전환'을 높이 평가하되, 그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홍석현은 1949년 서울에서 '잘 나가는 집안'의 '귀공자'로 태어났다. 홍진기 전 법무부장관이 그의 부친이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씨가 그의 누나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홍진기 씨는 이병철 전 삼성 회장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중앙일보 회장을 맡는 한편 사돈까지 맺게 됐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홍석현을 가능케 했음은 물론이다.

홍석현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다른 대다수 '메인 스트림'가의 '도련님'들이 그랬듯이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미국에서 유학했다. 다만 서울대에서 법대가 아닌 공대(전자공학과)를 다닌 것이 이색적인데, "성적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당시 시대적 흐름인 산업화에 투신하겠다는 의지로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이 그의 해명이다.

홍석현은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산업공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를 따낸 뒤 1983년 귀국해 재무부장관 비서관,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기 위해 삼성그룹에 들어온 것은 1986년. 삼성코닝에서 8년 동안 상무이사, 전무이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홍석현은 45세가 되던 1994년 '꿈에도 그리던' 중앙일보에 대표이사 사장으로 입성했다. 그리고 의욕에 넘쳐 있던 이 '젊은 사장'은 섹션신문, 전문기자, 가로쓰기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제도를 과감하게 도입하면서 당시만 해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한참 뒤져 있던 중앙일보의 영향력을 빠른 속도로 끌어올리는 데 끌차 역할을 했다.

물론 이러한 급성장의 배경에 삼성이라는 재벌의 지원사격이 있었음은 불문가지. 실제로 당시까지만 해도 중앙일보 회장은 이건희 씨였다.

'재벌신문' 중앙일보가 불을 붙인 무한적인 물량경쟁은 1996년 중앙일보 지국장의 조선일보 지국장 살해사건을 계기로 이른바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족벌신문'과의 일전을 불사한 '신문전쟁'으로 비화됐다. 이 전쟁의 와중에서 '재벌신문'과 '족벌신문'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폭로됐고, 전사회적으로 '신문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난타전을 벌이던 양측은 상대 진영 사주들의 비리를 뒤지는 것은 물론이고 지국장들의 범죄 전과까지 뒤지기도 했는데, 그 결과가 가히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결국 끝까지 공개되지 않았는데, 이건희 중앙일보 회장과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의 '밀실담합'으로 이 전쟁이 싱겁게 종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후 '조중동 카르텔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고, 우리 사회의 진보와 개혁은 이들의 강력하고 일사불란한 태클에 걸려 번번이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앙일보는 1999년 3월 삼성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하면서 명실상부한 '홍석현의 중앙일보'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부푼 꿈도 잠시, 홍석현은 그해 10월 자신이 대주주로 있던 보광그룹 탈세사건으로 쇠고랑을 차야 하는 비운을 맞았다.

당시 일부 중앙일보 기자들이 검찰청사까지 달려가 "사장님 힘내세요"라고 외친 것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거니와, 기자가 언론개혁의 '주체'에서 '대상'으로 전락하는 비극적 계기가 되었다.(당시 유일하게 오동명 기자만이 그나마 중앙일보 기자의 자존심이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한국언론사에 남겼다.)

홍석현은 그후 보석으로 석방된 뒤 도리어 회장으로 영전, 다시 한번 한국 언론 풍토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사례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2002년 벽두에 보여준 중앙일보의 변신은 더욱 예사롭지 않다. 물론 이러한 변신은 어디까지나 중앙일보의 상업주의적 전략에 입각한 선택임에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유와 동기가 어떠하든 중앙일보가 용기있게 뛰쳐나옴으로써 공고했던 '조중동 카르텔 체제'에 균열이 오기 시작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국민과 독자들이 좀더 다원화된 사회에서 살 수 있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중앙일보와 1등신문의 자리를 다투고 있는 조선일보의 신년사를 살펴보는 것도 홍석현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2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사설의 제목은 [월드컵 넘어 새 대통령으로 간다]였다.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신년사에서 어떤 '다짐과 주장'을 선보였을까. 읽어보신 독자는 이미 알겠지만, 조선일보 신년사의 가장 큰 특징은 '비전과 대안'은 너무나 적고, '불신과 비관'은 너무나 많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앙일보와 조선일보가 2002년 신년사를 통해 보여준 정체성은 기자에게 각각 '변신과 도전' '안주와 수구'로 읽혀졌다. 다시 말해 중앙일보가 합리, 중도, 탈냉전을 지향하는 '열린 보수'를 선포하면서 '변신'을 선택했다면, 조선일보는 수구, 극우, 냉전을 지향하는 '늙은 보수'에 그대로 '안주'해 버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지면관계상 이 부분에 대한 보다 자세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물론 신문업계에서 발행부수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조선일보로서는 이런 선택이 불가피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1위라는 자리가 변화된 주변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봄볕의 잔설처럼 언제라도 사라질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조선일보 경영진은 깨달아야 하지 않았을까.

▲ 조선일보 방상훈 회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그런 점에서 문제는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53, 이하 존칭 생략)이다. 구태의연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번 조선일보 신년사에 담겨진 '철학과 사상'은 언론계에 알려진 방 사장의 지향성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방일영 전 회장의 장남이자 방우영 현 회장의 조카인 방상훈은 조선일보 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합리주의에 입각한 열린 보수'를 지향해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특히 1998년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에 대한 색깔논쟁을 벌일 당시 대표적인 '유화론자'였던 그는 방우영(75) 회장과 김대중(63) 주필이 중심을 이룬 '강경론자'의 반대편에 섰으며, 15대 대선 당시에는 김대중 주필과 대선보도 방향을 둘러싸고 고성이 오갈 정도로 강도 높은 논쟁을 하는 등 상당한 시각차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방상훈은 여러 가지 점에서 홍석현의 비교대상이다. 우선 둘 다 나이가 젊고,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합리주의를 배웠으며, 비슷한 시기에 사장의 자리에 올랐다.

방상훈은 1970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23년 만인 1993년 대표이사 사장의 자리에 올랐다. 1998년 현재 기준으로 조선일보 주식의 30%, 디지털조선의 20%(부인 윤순명의 15%, 차남 방정오의 30%까지 합치면 65%), 코리아나호텔의 40%를 소유한 조선일보사의 명실상부한 대주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엄청난 변화를 맞게 될 운명의 2002년을 맞고도 방상훈은 신년사에서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홍석현과 방상훈. 앞으로 이 두 사람의 리더십 역량 여하에 따라 중앙일보와 조선일보의 운명은 천양지차로 뒤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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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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