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70년 신민당 상황

박정희 쿠테타로 정지되었던 정치활동이 63년 재개되고 신민당은 67년 창당과 1970년 1월 전당대회까지 유진오체제에서 유진산체제로 이동 되었다.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속에 몇몇 명망가 중심으로 분화되어 있던 야당은 신민당 당내세력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유진오가 신병상의 이유로 70년 1월 7일 당수를 사임함으로써 1월 26일 전당대회, 9월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각각 개최하기로 결정하였고, 사실상 신민당의 제세력들은 유진산에 대한 찬반을 중심으로 주류계(진산계), 비주류계(반진산계), 중도계로 재편되었다.

1월 26일 전당대회는 유진산을 당수로, 단일지도체제의 당헌을 체택했다. 투표결과는 1차투표 유진산(286표), 이재형(192표), 정일형(125표)으로 2차 투표에 들어갔고, 2차 투표는 유진산(327), 이재형(276)으로 유진산 시대의 막이 올랐다.

권위주의에 대한 민주적 질서의 도전

70년 신민당 대통령 지명대회는 '권위주의에 대한 민주적 질서의 승리'로 규정할 수 있다.

70년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3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체제를 구축한 상태였다. 당시 신민당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조직하는 정치적 대표체로써 역할과 당 안으로는 유진오와 유진산 중심의 파벌세력에 대한 당 쇄신과 40대라는 신진정치세력의 도전이 발생한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 지명대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비주류계(반진산계)의 DJ가 대역전극으로 선출되었고, 이것은 신민당이 권사정권에 대한 투쟁과 당의 권위주의에 대한 쇄신이란 두 과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민도'에 의한 승리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시의 민도를 크게 세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군사정권의 대항마'로서 야당후보 둘째, 주류계(진산계)의 권위주의에 대한 민주적 질서의 도전 셋째, 군사정권의 대항마로서 호남득표력과 영남비주류세력의 지지 등으로 볼 수 있다.

군사정권의 대항마로서 야당후보

신민당의 유진오와 유진산으로 대표되는 구파벌세력은 박정희 군사정권과의 투쟁과정에서 국민은 물론 당내부적으로도 지도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유진산당수는 군사정권에 대한 온건노선 혹은 불투명한 태도로 인해 선명한 야당으로서 역할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적 지지를 잃고 있었으며, 당내부적으로도 비주류 및 신진세력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YS의 '40대기수론'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리더쉽으로써 국민적 요구에 부합했으며, 노장세력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결국 YS, DJ, 이철승이라는 40대의 리더쉽은 구파벌세력의 약화와 신진정치세력의 구축이라는 당쇄신으로 나타났다.

즉,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야당대통령 후보에 대한 국민의 첫 번째 민도는 군사정권의 대항마였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다음 글은 "70년 신민당의 교훈" 국민경선제 대역전극이 보인다Ⅱ ▶주류계(진산계)의 권위주의에 대한 민주적 질서의 도전, ▶군사정권의 대항마로서 호남득표력과 영남비주류세력의지지, ▶권위주의에 대한 민주적 질서의  승리가 이어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