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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일 억울한 게 뭐죠?"
"그 거야, 두말하면 잔 소리죠. 아무 죄도 없이 고문을 당해서 3년 넘게 감옥 생활 하고 있는 게 제일 억울하죠."
폭력교사죄로 공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금성 씨(42)가 처음으로 던진 말이다.

김씨는 충남 아산시 권곡동에 살며 12년 정도 건축업에 종사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지난 1998년 11월 폭행으로 A경찰서에 연행된 후배들을 면회하러 갔다가 "폭행을 교사했다"는 죄목으로 그 후배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1999년 9월 15일 대전고법에서 징역 2년6월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 상고했다가 기각당했다. 그는 당시 다른 건으로 징역 2년 6월의 집행유예 기간이었기 때문에, 두 건을 합쳐서 5년을 살게 되었고 3년 2개월 남짓 지난 2002년 1월 현재 아직도 1년 10개월의 형기를 남겨 놓고 있다.

재판 결과만 놓고 보면 그는 남에게 돈을 주고 청부 폭력을 사주한 범인으로서 사회의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범인들의 속성상 자기 죄를 뉘우치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변명하는 게 당연해 보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주변 사람들한테 변명하고 있는 것을 넘어, 자신을 고문했다는 경찰관들의 이름을 낱낱이 들어 감옥 안에서 고소를 했다는 점에서 여느 경우와는 다른 것 같다.

자칫하면 무고죄로 훨씬 더 긴 세월을 옥살이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을 고문하지도 않은 경찰관들을 고문했다고 뒤집어씌우며 감옥 안에서 고소장을 써서 제출해가면서까지 자기 변명을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현재 건강 상태는 양호했다. 하지만, 그의 웃니 하나는 시꺼멓게 죽어 있었다. 시력은 난시가 심하다고 했다. 감옥에서 처음 쓴 안경도 잘 맞지 않는다고 했다. 안경을 벗으면 바로 앞에 있는 것도 잘 볼 수 없다고 했다. 물론 그는 고문의 후유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피의자는 A경찰서에서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으로 조사를 받을 당시 경찰관으로부터 자백을 강요 당하면서 폭행을 당한 사실이 있나요?"

김금성 씨가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날부터 13일이 지난 1998년 11월 30일에야 열린 증거보전신청에서 검증 담당 판사가 한 질문이다. 김씨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 1998. 11. 17. 03:30경 위 경찰서 조사실에서 수갑을 앞으로 채운 상태에서 청색 테이프로 눈을 가리고 곤봉으로 양 발바닥을 50여회 맞았으며, 당시 아픔을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면서 일어나는 순간 수건으로 입을 막고 얼굴 부위에 베개를 올려 놓은 후 신발을 벗고 이마부위(눈이 가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음)를 5-6차례 밟혔습니다."

같은 질문에 대해 공범으로 김금성 씨보다 먼저 구속된 강 아무개 피고인은 약간 다른 고문을 당한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예, 1998. 11. 16. 21:00경 위 경찰서 조사실에서 수갑을 뒤로 채운 상태에서 청색 테이프로 눈을 가리고 사무실 바닥에 엎어 놓고 목 뒤부분을 곤봉으로 6-7회 때렸으며, 무릎과 허벅지 부분을 구두발로 20회 정도 차이고, 무릎을 꿇리고 턱밑 부분을 엄지와 검지로 누르면서 발바닥을 10여 회 정도 맞았으며, 같은 날 21:30경 사무실 옆 방으로 데리고 간 다음 발을 끈으로 묶고 다리를 들고 곤봉으로 발바닥을 2회정도 맞았으며, 다음날 03:30경 조사를 받을 당시 가슴을 주먹으로 4대와 목부위를 당수하듯이 손날로 2대 맞았습니다."

당시 대전지법 천안지원의 명령으로 감정을 맡은 단국대 병원 전문의 정아무개 씨는 감정서에 "양쪽 눈썹 밑, 안검 및 눈 언저리가 푸르스름하게 멍이 든 상태이며, 10여 일 전 사건을 고려할 때 멍자국이 일부 소멸된 것으로 보임. 피부에 상처는 없었으며 멍만 든 상태로 보아 둔탁한 물체(발 포함)에 의한 외상으로 사료됨"이라고 썼다.


"김금성 씨 비명소리 들었다" 목격자 진술

당시 김금성 씨와 함께 연행되었다가 폭행 사건 조사를 받고 이튿날 새벽에 풀려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들은 김금성 씨가 당했다는 고문의 중요한 목격자가 되어 목격 사실을 낱낱이 진술했다.

그들은 김금성이 따귀를 서너 차례 "손자국이 날 정도로 심하게" 맞는 것은 현장에서 목격을 했다.

그들은 "김금성이라는 사람이 형사계로 스스로 걸어들어 오자 한 형사가 다른 형사에게 '저 놈이 사주시킨 놈'이라고 말하며, 김금성에게 '네가 사주했지'라고 묻자 김금성이 '아니다'라며 황당하다는 듯이 웃자 한 경찰관이 김금성에게 '웃어, 웃어'하며 웃는다는 이유로 김금성의 따귀를 3-4차례 손자국이 날 정도로 심하게 때렸다"고 했다.

그 뒤로 그들은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가 대기설에서 약 1시간 정도나 김금성 씨의 비명 소리를 들어야 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김금성씨는 어떤 방으로 끌려들어간 뒤 "사람살려!" "억울하다" "으악" "제 말 좀 들어 보세요!"하는 비명 소리를 질러댔다고 했다.

다음은 목격자들의 목격사실 확인서 전문이다.

목격사실확인서

목격자

1. 오 아무개 2. 이 아무개 3. 이 아무개

목격사실

1. 목격하게 된 경위

가. 저희들은 아산시 온천동 소재 "천연장"에서 친구 만나러 갔다 갑자기 A경찰서 형사계 소속 형사 7-8명이 들이닥쳐 식사중이던 저희들을 동 경찰서에 연행하였습니다.

저희들이 동 경찰서에 도착하니 강아무개라는 사람이 이미 와 있었는데, 위 형사 한 사람이 강아무개에게 "이 애들이 같이 때린 애들이냐"고 묻자, 강 아무개가 "아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경찰은 저희들에게 "여기 무릎 꿇고 앉아 있어" 라고 하였습니다.

나. 위 경찰 중 한 명이 강아무개에게로 다가가 "우리가 서울로 공범들을 잡으러 가는데 만약 허탕 치면 너는 크게 잘못 된다"며 위 강아무개의 따귀를 2-3차례 때린 후에 강아무개의 손을 뒤로 한 채 수갑을 채웠습니다.

다. 형사들과 강아무개가 공범들을 잡으러 가기 전에 김금성이라는 사람이 동 경찰서 형사계로 자기 스스로 걸어 들어오자 한 형사가 다른 형사에게 "저 놈이 사주시킨 놈이다"고 말하며 김금성에게 "네가 사주했지"라고 묻자 위 김금성이 "아니다"라며 황당하다는 듯이 웃자 한 경찰관이 김금성에게 "웃어, 웃어" 하며 웃는다는 이유로 김금성의 따귀를 3-4차례 손자욱이 날 정도로 심하게 때렸습니다.

라. 사건 당일 21:50경 경찰서 형사들과 강 아무개가 서울로 공범들을 잡으러 간다고 출발한 지 약 4시간 30분이 지난 후 김 아무개, 한 아무개, 유 아무개 등과 함께 동 경찰서 형사계로 돌아왔습니다.

위 형사 중 한 사람이 강 아무개에게 "너 김금성이 사주했지" 라고 묻자 강 아무개가 이를 부인하였고, 동 경찰관은 강 아무개의 따귀를 수 차례, 동인의 목덜미를 한 차례 때린 뒤 "이 새끼 안 되겠네"며 어디선가 곤봉을 찾아들고 동 경찰서 형사계 안의 어느 방으로 위 강 아무개를 끌고 들어갔습니다.

강 아무개가 방으로 들어간 뒤 폭행하는 "퍽" "퍽" 하는 소리와 무엇인가에 맞아 신음하는 "악" "억" 하는 소리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들렸습니다.

경찰들이 이 사람들을 무지 때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이 때 밖에서는 경찰관이 뒤늦게 잡혀온 김 아무개, 한 아무개, 유 아무개를 앞으로 수갑을 채우고 무릎을 꿇게 하고 고개를 숙이게 하여 곤봉으로 동인들을 수 차례 가격하였습니다.

마. 강 아무개와 어느 방으로 들어갔던 경찰관이 그 방에서 나오며 김금성에게 "강 아무개가 다 불었다"며 "야 개새끼야 네가 사주시켰지"라고 심한 욕설을 하며 강 아무개가 들어가 있던 방으로 김금성도 끌고 들어갔습니다.

이후 저희들은 경찰관이 밖으로 나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여 대기실에 있는데 김금성이 들어간 방에서 "사람 살려" "억울하다" "으악" "제 말좀 들어보세요" 하는 비명 소리가 옆방 창문으로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경위는 담배 피우러 밖에 나갔다가 들었습니다. 저희들이 대기실에서 약 1시간 동안 간간이 위 강아무개와 김금성의 신음소리와 절규하는 비명 소리를 듣다가 밖으로 나온 경찰관에게 "저희들은 가도 되나요"라고 말하니 동 경찰관이 가라고 하여 새벽 4시경에 귀가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사실은 저희들이 1998. 11. 15. 밤 9시부터 1998. 11. 16. 새벽 4시까지 A경찰서 형사계 사무실에서 보고 들은 사실을 거짓없이 진술한 것입니다.

2000. 5. 15.

위 목격자 1. 오 아무개
2. 이 아무개
3. 이 아무개



"석방된 뒤에라도 끝까지 싸우겠다"

경찰관들에게 고문을 당했다며 옥중에서 절규하고 있는 김금성 씨는 지난 3년 넘게 옥중에서 처절한 법적 투쟁을 벌였다. 증거보전 신청, 고문 경관들 15명 가혹행위 혐의 고소, 경찰관들 무혐의 불기소 처분에 대한 재정 신청, 재정 신청 기각에 대한 항고, 재항고, 헌법 소원에 이르기까지, 그는 감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법적 투쟁을 다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절망적인 "기각"뿐이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거대한 사법부에 맞서 혼자서 싸우는 이 외롭고 힘든 싸움에 지쳐 한을 품은 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지금 국가인권위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국가 인권위가 법률의 도움으로는 마지막 단계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는 "국가인권위가 뜨기는 했는데, 요즘 제대로 안 굴러 가고 있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며,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질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석방된 뒤에라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굳은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경찰관들이 왜 고문을 해 가면서까지 당신을 폭력 사주범으로 몰아 구속시켰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사업권을 갖고 있는 돌산 개발업이 있는데, 그것을 가로채기 위해, 한 동업자가 검경과 한통속이 되어 나를 엮어넣은 것이다."

경찰이나 사법부의 판단대로 그는 진짜로 폭행을 사주한 범인일 수도 있다. 조직폭력배의 두목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설사 조직폭력배나 살인범이라 하더라도, 체포하는 과정에서 격투가 벌어진 것도 아니고, 제 발로 후배를 면회하러 경찰서에 들어간 사람을, 경찰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고문했다면, 국가 사법권의 법적 타당성은 이미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는 이미 가정을 잃었다. 수감 초기 옥바라지를 하던 아내는 가출한 지 오래고,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받아 이웃에 사는 고모의 도움을 받으며 혼자 생활하던 중3 아들도 고교 입학을 눈앞에 두고 집을 나간 상태이다.

아직은 김금성 씨의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지만, 김 씨의 간절한 바람대로 국가인권위가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여 규명할 수 있을지, 그래서 3년 2개월째 옥살이하고 있는 한 "폭력 사주범"과 그 가족의 한이 풀릴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김금성 씨 고문 주장 일지

1998. 11. 16. 김금성 씨가 고문 당했다고 주장하는 날
1998. 11. 20. 증거보전 신청
1998. 11. 30. 신체 감정
1998. 12. 1. '고문 흔적으로 보이는 상해가 남아 있다'는 신체 감정 의견 제출 
1999. 1. 21. 천안지청에 고문 경찰관들을 가혹행위 혐의로 고소
1999. 8. 31. 고문 경찰관들 무혐의 불기소 처분
1999. 9. 15. 대전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6월 선고
1999. 11. 26. 대법원 상고 기각
2000. 11. 헌범 소원 심판 청구
2001. 5. 16. 대법원에 '재심청구 기각 결정에 대한 재항고'
2001. 6. 7. 대전고등법원에 '재정신청'
(검찰 항고, 재항고, 헌법소원 모두 기각)
2002년 1월 현재 국가인권위에 진정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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