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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언제나 젊고 예쁜 엄마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더운 여름 리어카에 담긴 참외를 하나씩 코에 갖다대고 냄새를 맡는 엄마의 뾰족한 콧날, 그 코가 어김없이 골라내는 달콤한 참외. 정말 엄마는 언제나 단호한 결정과 빈틈없는 일 처리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세상을 살아내실 것 같았다.
그런 엄마가 너무 많이 늙었다. 하루 하루 늙어가고 계시다. 일흔 다섯의 연세치고는 건강하고 예쁜 할머니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노쇠가 슬프다.
다시 일어날 기약없는 병석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일흔 일곱 꼬부랑 할머니, 엄마를 보는 55세의 시몬느 드 보부아르도 슬프다. 한 발 더 나아가 인간 누구에게나 예비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인 고민에 빠진다.
시몬느의 어머니 프랑수아즈는 어느 날 욕실에서 넘어져 대퇴골 골절로 병원에 입원한다. 그리고 치료 중에 악성 종양이 소장을 막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수술 이후 고통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어머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나와 의식을 되찾으면 그 의식은 곧바로 고통으로 연결되기에 시몬느는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다. 인위적인 생명의 연장이 무슨 소용이고, 그 대가는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환자에게 이렇게 해야 하는지. 결국 고통과 죽음의 경주 속에서 차라리 죽음이 먼저 와닿기를 열렬히 바라는 마음까지도 털어놓는다.
프랑수아즈는 수녀원 부속학교를 다녔으며 결혼 생활은 남편의 외도와 무관심,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강인하고 열정적인 성품을 타고 났지만 이것 저것 포기하는 가운데 마음이 비뚤어지고 대하기 거북한 사람이 되었다. 큰 딸 시몬느가 신앙을 버린 일과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 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으나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려 했으며, 작은 딸 푸페뜨와는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성실하고 자존심이 강한 어머니는 평생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며 남의 눈을 기준으로 삼아 스스로와 직면하는 것을 피하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비로소 죽음을 기다리는 병상에서 그 모든 겉치레를 벗어버리고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넘기게 된다. 삶에의 강한 소망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서로에게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던 모녀는 병실에서의 마지막 시간 동안 대화가 끊긴 오랜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서로를 읽어내는 경험을 한다. 특히 시몬느는 열 살 때의 착한 엄마와 처녀 시절 자신을 억누르던 적대적인 여자와 늙은 어머니가 모두 한 사람임을 느끼고 인정한다.
결국 어머니는 회복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촛불이 꺼지듯, 아주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셨다'고 이야기한다.
시몬느는 말년의 어머니를 소홀히하고 등한시하고 피해온 데 대한 죄스러움을 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며칠과 바꿀 수 있었다. 두 딸이 있음으로써 어머니는 평온함을 가졌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딸이 마음을 쏟아 보살피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는 훨씬 더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기에, 공포가 엄습해 오는 순간에 이마에 손을 얹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의 소중함 또한 시몬느는 뼈저리게 체험한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그 사람도 죽을 나이가 됐지'하는 말과 노인들의 슬픔, 노인들이 쫓겨가는 모습을 생각해본다는 이야기를 마지막에 덧붙이고 있다. 죽음은 누구나 가는 길이지만 불행히도 그 길은 각자 혼자 가야만 하는 길이기에 아무도 자신이 죽을 나이가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지, 남은 생은 덤이지"하는 노인들의 일상의 말 속에 얼마나 뜨거운 삶에의 열망이 숨어 있는지 젊은 우리는 모른다. 그리고는 오늘도 무심히 연로하신 부모님 앞에서, 부모님보다 연세가 적은 친구의 아버지 혹은 친지 어머니의 부고를 전하면서 "그만하면 호상(好喪)이지요"라고 말한다. 그때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
일찍이 내게 <노년>(La Vieillesse)이라는 책으로 노년학의 깊은 매력을 일깨워 준 시몬느 드 보부아르. 어머니의 죽음은 그 뛰어난 책에도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내 어머니의 죽음은 언제나 내게 먼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또 어떤 자양분이 되어서 나를 키워 줄 것인지. 부모는 마지막까지 자식에게 삶의 과제들을 선물로 남기고 간다.
(편안한 죽음,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함유선 옮김, 아침나라,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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