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운동이란 모름지기 잭 니클라우스나 그렉 노먼이 설계한 그림 같은 풍경의 골프장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른 봄이면 겨우내 내린 눈의 흔적으로 땅이 촉촉하고, 여름이면 따가운 햇볕을 피할 시원한 나무그늘이 있으며, 가을이면 낙엽이 군데군데에 떨어져 있는 야외에서 해야 제격입니다.

그런데 콘크리트 상자나 다를 것이 없는 헬스클럽에서 땀을 우격다짐으로 짜내며 운동하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생각해온 내가 헬스클럽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7개월전 쯤의 일입니다.

그 계기는 말라비틀어진 남편을 볼썽사납게(아이러니컬하게도 헬스클럽 덕택에 얼굴 살은 더 빠졌습니다) 여긴 아내의 권유와 훌륭한 테니스 동호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초체력이 중요하다는 내 생각(이렇게 아내와 나의 동상이몽이긴 하지만)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보디빌딩을 하기 전에는 무척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두 달 지나면서 25Kg짜리 역기에도 낑낑대다가 60Kg 무게의 역기를 가뿐히 들어올리는 장족의 발전에 나름대로 재미를 붙였습니다.

아내에게 "내 가슴근육 많이 생겼지?"하고 물으면 아내가 하는 거의 격려성의 "그렇네요"라는 대답을 듣는 재미에 일주일에 서너 번은 꼭 저희 아파트 상가에 있는 헬스클럽에 갑니다.

제가 사는 곳은 조그마한 중소도시라 비록 고향은 아닐지라도 헬스클럽에서 지인(知人)을 간혹 만나기도 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친구나 친구의 친척 아니면 제자들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뜻밖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잊지 못한 '첫'으로 시작되는 인연을 나와 나눈, 그렇지만 좋은 추억만을 가져서 서로 얼싸안을 정도로 정이 도타운 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교사로서 처음으로 제가 자퇴를 시킨 영호(가명)입니다. 물론 나로 하여금 자퇴서류를 만들게 했다는 이유로 그 아이에게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 저희 반은 모교의 개교 이래 불멸의 기록을 작성했을 만큼 문제반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72명으로 시작한 학생수가 일 학년을 마칠 때는 57명이 되었으니까요. 출석부의 자퇴생 기록란이 모자라 저희 반 서기 녀석이 자퇴생란을 더 그려 넣어서 간신히 다 기록할 수 있었지요.

반장도 세 명씩이나 반장을 뽑아야 했고 (첫 번째 두 번째 반장이 자퇴했으므로) 결석생이 없는 날은 일 년 동안 몇 십 일 정도였으니 어린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당시 담임선생님의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졸업 후 교사로 부임하면서 저의 목표는 간단했습니다. '담임을 맡은 학생을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온전히 다음 학년으로 무사히 올려 보내자' 아주 간단하고 소박한 꿈(?)이었지만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바람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헬스클럽에서 우연히 만난 영호는 제가 담임을 맡고 겨우 두어 달 있다 학교를 그만두었으니까요. 녀석이 학교를 뛰쳐나가고 그 녀석을 자퇴시켜야 된다는 지시를 받았을 때 교감선생님이 제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박 선생, 그 아이를 살리고 싶으면 어떻해서든지 그 아이를 꼭 껴안으세요."

부끄럽게도 전 결국 그 아이를 끝까지 껴안지 못했고 그 아이도 학교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학교를 뛰어나간 뒤 그 아이 집에도 가보고 몇 군데를 뛰어다녔지만 끝내 영호를 찾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영호를 그것도 저희 아파트 상가 헬스장에서 만난 제 심정은 여러 갈래이었지요.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인사를 나누고 헬스장의 시끄러운 댄스음악 속에서 전 그 녀석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들었습니다. 녀석은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지금은 군 복무를 방위산업체에서 한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인생의 끈을 놓지 않고 사는 그 녀석의 모습을 기뻐하면서 지난 몇 년 동안 참으로 궁금했던 질문을 녀석에게 던졌습니다.

"영호야. 너 그때 학교 뛰쳐나갔을 때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 그 도대체 그때 어디 있었어?"
녀석의 대답은 절 허탈하게 만들군요.
"그냥 학교 근처 호프집에 있었어요."
그 호프집은 당시 제가 하루에도 최소한 한 번은 지나쳤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그 호프집에 머물던 녀석은 서울로 올라가 강남의 모 백화점 지하 음식물 코너에서 몇 년 동안 일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이 그 매장에서 일할 때 아내와 전 그 매장에 들러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그 녀석과 전 인연이 질기다고도 할 수 없지만 그 끈이 완전히 끊어지지도 않고 운이 조금만 더 닿았다면 만났을 수도 있는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다 결국 마지막엔 저희 집 코앞에서 만나게 된 것이고.

녀석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습니다. 검정고시도 합격해 대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으니 수능공부를 할 의향이 있느냐고 선생다운 질문을 한 것이죠.

녀석은 그 질문에 "아뇨 선생님 전 돈 벌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그 대답엔 삶에 대한 의욕이 엿보여 흡족했고(선생에겐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갈 거예요라는 대답이 듣기에 좋았겠지만 학교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곳이 아님을 제 스스로 깨달은 녀석이고 건전한 부의 축적은 결코 악이 아니니까요) 담임인 제가 하지 못한 몫을 해준 세월과 그 녀석의 고생이 애처로웠지만 고맙기도 하였습니다.

녀석은 덧붙여 "선생님 결혼하셨다면서요? 결혼생활은 어떠세요?"하며 제법 못난 옛 은사의 안부까지 묻습니다. 그 이후 녀석을 헬스클럽에서 서너 번 만났지만 녀석은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저를 어려워하는 것 같고 헬스기구사용법을 알려주는 저에게 아주 다소곳이 "네, 네"하며 아주 순한 한 마리의 양이 되어 있습니다.

진작에 녀석을 저희 집에도 초대해서 밥 한 끼라도 먹이고 싶었고 소주잔을 같이 기울이고도 싶었지만 녀석은 저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는 것인지 학창시절에 섭섭한 감정이 남아 있는지 저로 하여금 "영호야 우리 소주나 한잔하자"라는 말을 쉽게 꺼낼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헬스클럽에서 만난 다른 제자와는 달리 그 녀석과 저는 그렇게 인사만하고 스치며 지낼 인연이 아닌데 하는 것은 내 맘뿐이 아니길 바랬지만 요즘 영호는 헬스클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관장에게 물어보니 연락이 안 된다고 해서 마치 그 녀석이 학교를 뛰쳐나갔을 때의 서운함이 다시 생각나곤 합니다.

그러니까 영호와 저의 인연은 항상 이런 식인가 봅니다. 잠시 스치다 헤어지고 다시 잠시 만나고 헤어지고. 마음만은 늘 그 녀석을 놓지 않고 있는데 말입니다. 저와의 인연이야 어찌되었든 녀석의 바람대로 돈을 많이 벌어 좋은 일을 많이 하게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