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기술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고, 21세기가 된 지금 그러한 노력은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가시적인 성과란 것은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최소한의 육체적 활동만으로 많은 것을 제어할 수 있는 편리함의 극대화를 말한다.
하지만 육체적 편리함을 위해 인간의 것만이 아닌 지구의 재산을 무한정 낭비하게 되어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지구환경을 훼손시켰다. 결국 공해 문제나 자연 재해도 눈에 띄게 증가하게 되어 또다른 가시적인 성과(?)를 경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이야기하게 된 것은 배경이 사뭇 다르지만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방향이 같기 때문이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는 히말라야에 위치한 탐욕스런 문명의 손길로부터 비교적 멀리 있었지만 결국 문명에 의해 변해가는 작은 마을 '라다크'에 대한 이야기(라다크 사람들의 생태운동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다.
그리고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은 기계문명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러다이트'(기계혐오자,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적극적인 기계문명 거부자'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와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아미쉬'의 대안적 생활을 알리기 위해 창간된 '플레인'이란 잡지에 기고되었던 글을 엮은 것이다.
극과 극의 배경이지만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산업사회와 기술문명의 촘촘한 그물코에서 벗어나기 위한 진지한 노력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가두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 알려주려는 뜻에서 '오래된 미래'와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은 맥락을 같이 한다.
추악한 기계문명에 의해 위협받았던 그들의 터전을 다시 일구고 있는 라다크 주민들이나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아미쉬의 노력은 컴퓨터나 텔레비전 없이 하루도 견디기 힘든 나를 포함한 일반적인 현대인(기계 문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의 노력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는 삶의 가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아마도 어두운 미래에 대해 현대인들이 두려움이 느끼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삶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의 엮은이 스코트 새비지는 말한다.
"전원 플러그를 뽑는 일만으로도 우리 삶을 억세게 구속하는 이 기계처럼 조직화된 문명의 손아귀에서 간단하게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때, 희망의 근거가 생긴다. 우리와 기계화된 조직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우리의 에너지가 기술 세계로 공급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본문 27페이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수도에서 살고 있는 나의 언니는 일을 더 빨리 해주는 온갖 것을 가지고 있어요. 옷은 상점에서 사기만 하면 되고, 지프차, 전화, 가스쿠커를 가지고 있어요. 이 모든 것이 그토록 시간을 절약해주는데도 언니를 만나러 가면 나하고 이야기할 시간도 없대요."(본문 113페이지)
문명의 이기를 어쩔수 없이 받아들인 라다크 사람들도 문명의 이기가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아 버린 것을 깨달았다.
결국 '라다크 사람들'과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의 깨달음은 기계에 종속되지 않고 삶의 주체가 되어 사는 것이다. 그들의 삶이 옳다고 믿고, 쳇바퀴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아직 그만한 용기는 없다. 하지만 텔레비전 플러그를 뽑는 것 정도야, 나나 여러분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덧붙이는 글 |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녹색평론사/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김종철 옮)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나무를 심는 사람들/ 스코트 새비지 엮음, 김연수 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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