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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일어난 그 어떤 것도 역사에서는 주목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인류만이 그들 과거의 하나하나를 남김없이 인용하게 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52쪽)

확실히 민중문화는 역사 속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억압당해왔다. 가령,역사는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 건설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던 민중들의 이름 한 자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다. 대개는 왕, 영웅, 큰 사건, 뛰어난 사상가와 그 업적들만이 역사의 전부인 양 기리며 되뇌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지배계급의 역사는 안방 사극에서부터 뉴스에 이르기까지 항상 큰 비중을 차지하기 일쑤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잘난'(?) 혹은 거대역사와는 전혀 상반되는 미시역사를 취급한다.

미시역사라니까 단순히 사적이거나 부가적인 역사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왜냐면, 저자는 거의 잊혀질 뻔한 중세 이탈리아의 어느 방앗간 주인인 메노키오라는 흥미로운 인물을 통하여, 억압된 민중문화를 복원시켜내고 독자에게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의 일단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미경으로 세밀하게 관찰하는 방식을 역사 연구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의 주인공 메노키오는 전체 인구 4/3이 문맹이던 16세기 유럽에서 읽고 쓸 줄 알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약간은 별난 인물이었다. 덕분에 그는 마을 촌장, 성당의 행정관, 교사 생활을 거치기도 했으나, 실제의 본업은 농부이자 방앗간 주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메노키오는 당시의 지배계급과 종속계급의 중간쯤에 있는 인물이라 보면 될 것이다.

중세 유럽의 방앗간은 민중들의 많은 이야기들이 소통되는 공론장이 되기 쉬웠다. 하여, 방앗간 주인들 가운데는 이단으로 몰린 자들이 적지 않았다는데, 그것은 그들이 결코 알지 말아야할 것들을 접할 기회가 더욱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메노키오 역시 그와 같은 전형적인 인물인 것 같다. 게다가 그는 읽고 쓸 줄 알았기에 자신이 접한 책들을 요모조모 따지고 생각하면서 농민들의 구비전승 전통에다가 위험한 이단적 상상력을 덧씌워 이해하곤 하였다. 그것도 혼자 조용히 그렇게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와 같은 생각을 다른 사람들을 만날 기회만 주어졌다 하면 시도 때도 없이 토론을 걸거나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결국 그는 수차례 이단 혐의를 입고 피소되어 감옥을 드나들다가 교황청에까지 주목을 받게 되었고 끝내는 화형에 처해지고 만다. 지배계급이 싫어하는 금지된 지식을 건드렸고, 교회가 가르친 교리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불순한 생각을 용감히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에 이단으로 몰리고 가련하게 처형된 것이다.

예컨대, 그는 자신의 독창적인 천지창조설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생각하고 믿는 바에 따르면, 흙·공기·물 그리고 불, 이 모든 것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데 이는 마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구더기들은 천사들입니다. 한 지고지선한 존재는 이들이 하느님과 천사이기를 원하였고, 그 수많은 천사들 중에는 같은 시간대에 그 큰 덩어리에서 만들어진 신도 있었지요. 그는 네 명의 부하, 다시 말해서 루시퍼,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과 함께 주 하느님이 되었습니다."(75쪽)

이단 심문관들 앞에서 엄중한 심문을 받으면서도 메노키오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자기 하고픈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말하다가 꼬리가 잡히고 만다. 저자에 따르면 그는 학식 있는 이런 고관들 앞에서 자기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에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였다 한다. 실제로 그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는 사람들과 공증인이 있었고 심문관들은 다른 어떤 농민을 심판할 때보다 긴 시간 동안 그의 진술을 듣고 묻기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심문관들이 보기에 그의 발언은 갈수록 가관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메노키오는 세례는 사제들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고, 축성은 가치 없는 것이며, 신앙고백을 하러 사제와 수사에게 가느니 나무에게 가는 게 났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그가 내뱉는 수많은 말들이 심문관들로 하여금 그는 이단자가 틀림없다고 확신케 만들었다.

거의 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해야했던 메노키오는 어찌됐든 나갈 궁리를 했는지 재판관들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로 참회를 하였다. 겨우 풀려나 마을로 귀환하였으나, 그는 지난날 대담무쌍하게 내뱉곤 했던 이단사설을 조심했을 따름이지 그의 속마음은 더했으면 더했지 별로 변한 게 없었다. 평상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언뜻언뜻 자기 생각을 내비치더니 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자 더 기고만장하여 떠벌리다가 우연한 기회에 또다시 고발되고 제소당하고 만다. 그리하여 마침내 화형에 처해진 것이다.

저자는 메노키오라는 인물의 재판 과정 가운데 남아 있는 기록들과 그가 읽은 책 목록 그리고 몇 가지의 정황들을 거의 완벽하게 재구성해냈다. 그리하여 지루하고 딱딱한 역사 서술이 아니라 하나의 독특한 문학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이 긴장감과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자유로운 토론, 지식, 상상마저 억압당하는 16세기 민중의 현실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눈에 보이듯 그려낸 책은 만나기 힘들 것이다. 독자들은 여기에서 당시 지배계급의 두려움과 강박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과 그들이 그리는 이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으리라 본다.

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문학과지성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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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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