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선생이다. 그리고 내가 혹 '바담 풍'하더라도 너희들은 '바람 풍'하라고 말해야 하는 나의 직업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스승의 날'이 싫다. 스승의 날에는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하다. '그것은 내가 과연 스승인가' 하는 회의 때문이다. 나는 스승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니 스승의 은혜 어쩌구 저쩌구 하는 날이 거북스럽고 불편하다. 학생은 있어도 제자는 없고, 선생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는 세태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교문 앞에 꽃바구니 장사가 늘어서고 학생들이 이런 저런 선물을 가지고 온다. 학생들이 가지고 온 선물을 덥석덥석 받자니 왜 이런 것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받지 않자니 가지고 온 학생이 무안해질까봐 그것도 걱정스럽다. 많이 받으면 많이 받는 대로 선물을 밝히는 선생 같아서 부담스럽고 받지 못하면 받지 못하는 대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는 것 같아 그것도 마음이 유쾌하지 못하다.
| ▲한 초등학교의 교실 복도.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학생들이 가지고 오는 선물이래야 대단할 게 없다. 그러나 사오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그것도 적잖이 부담이 된다는 것을 잘 안다. 그 마음만은 소중히 받고 싶다. 그러나 그런 소소한 물건들이 살림에 보탬(?)이 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내게는 별무소용인 물건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요긴한 물건도 아닌 것에 학생들의 빠듯한 용돈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 화가 난다. 그러니 미리 이런저런 선물을 전혀 받지 않겠다고 선언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선물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선언부터 한다는 것도 모양이 우습다. 어쩌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미리 김치국부터 마시는 격이 될 수도 있고. 그러한 선언이 오히려 학생들에게 선물을 기다리고 있다는 오해나 압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그러니 그런 짓은 더 더욱 못한다.
이래저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스승의 날이라는 이상한 이름이 붙은 날이 있기 때문이다. 스승의 날이 있다고 없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는 것도 아닐테고. 괜히 그런 날이 있어서 선생은 선생대로 학생들 보기가 쑥스럽고 선생님에게 선물을 하지 않은 학생과 학부모들을 공연히 죄의식을 갖게 한다. 평상시 같으면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올 것도 스승의 날이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올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사은회(謝恩會)라는 이름의 모임에 나가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모임이라는 그 이름이 너무나 싫기 때문이다. 내가 스승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별로 없지마는 학생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한다니...
내가 은혜를 베푼 적이 없거늘 무슨 은혜에 감사한다는 말인가? 그런 모임에 나가 한복 입은 여학생들의 절까지 받아가며 대접을 받는 나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은회에 참석하는 다른 교수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 또한 전혀 없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은 그렇다는 말이다. 다른 교수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해야할 이유는 없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러고 보니 사은회에 나간 기억이 있다. 딱 한 번. 그때도 학생 대표가 언제 언제 사은회가 있으니 꼭 참석해주십사고 찾아왔다. 단호하게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말하기를 "교수님, 사실 돈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그냥 졸업하기도 섭섭해서 그저 교수님들과 함께 등산이나 하고 내려와 보리밥이나 한 그릇씩 먹고 헤어지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함께 산을 오르고 내리는 그 몇 시간 동안 지나간 학창 시절의 추억이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사은회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은회는 지금도 내 마음 속에 가장 아름다웠던 사은회로 남아 있다. 헤어질 때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쓴 낙서지 비슷한 것을 액자로 만들어주었는데 약간 촌스러운 그 액자는 연구실에 두고 가끔씩 거기 쓰여 있는 학생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그려보곤 한다.
집에 가면 나 또한 두 명의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있는 학부모인데 큰 놈은 고등학생이고 작은 놈은 초등학생이다. 스승이 날이 다가오면 해마다 아내는 아이들 선생님께 보낼 선물 때문에 적잖은 속앓이를 한다. 올해도 '도서상품권을 20만 원어치나 샀다'고 말했다.
둘째 놈이 '우리 엄마만 학교에 한 번도 오지 않기 때문에 공부 시간에 알아도 발표하겠다고 손들지 않는다'고 말했단다. 그것이 마음에 걸려 큰마음 먹고 담임 선생님을 한번 찾아가야겠다는 것이다. 학부모가 선생님을 찾아가는데 이렇게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현실이 우습고도 서글프다.
학기 중에 10만 원짜리 선물을 드린다는 것이 내 기준으로는 의심할 바 없는 뇌물이다. 우리나라 사정으로서는 만 원 이상이면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아내는 다들 그 정도는 하기 때문에 자기만 만 원짜리 선물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과는 오히려 안 드리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아내의 그런 뇌물성 선물을 단호하게 막지도 못했다. 자식에 약해서일까? 선생님에게 드리는 선물에 돈의 액수를 따지는 것이 비교육적이라고 생각해서인가? 자기도 선생이면서 선생님께 드리는 선물값 몇 푼을 아까워하는 쫀쫀한 남편으로 보이기 싫어서였을까?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
스승의 날, 학생들은 "교수님, 오늘 같은 날은 일찍 끝내고 편히 쉬시지요"라고 말한다. 빨리 끝내 달라는 애교 어린 수사다. 그러면 또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학생의 날에 학생들이 쉬지 않듯이 스승의 날에도 스승은 쉬지 않는다."
나는 학생, 선생, 그리고 학부모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 스승의 날이 없었으면 좋겠다. 마음을 담은 선물을 주고 받는데 굳이 날짜를 정해둘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정 없앨 수 없다면 날짜만이라도 학년이 끝나는 2월쯤으로 옮겼으면 좋겠다. 옛날 서당에서 책을 한 권 떼고 나면 그 학생의 부모는 떡을 해서 보냈다(중간에 선물을 빙자한 봉투를 보내는 법이 없었다).
그 동안 공부하느라 고생한 학생을 위로하고 가르치느라 수고한 선생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책걸이 떡을 스승과 제자가, 그리고 동문수학하는 학우들끼리 나눠먹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지 않았던가?
학년이 끝나는 시점으로 옮기면 그런 아름다운 전통도 계승하고 혹여 선물을 주고받더라도 훨씬 마음이 가벼울 수 있을 것이다. 학기 중에 뇌물성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받는 이도 주는 이도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어딘가 모르게 냄새가 난다. 스승의 날이 되면 가르치는 나의 직업에 부끄러움이 없었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그나마 스승의 날이 주는 긍정적 효과라면 효과다.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