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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慶運宮)을 찾아가는 길은 그야말로 힘이 들지 않는다. 그냥 지하철 1·2호선 시청역에서만 내려도 엎어지면 코 닿을 데가 경운궁이요, 버스를 타고 서울역이나 남대문을 거쳐 찾아가기도 쉬운, 그야말로 교통 팔달의 궁궐이 경운궁이다. 그래서 경운궁을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것일까, 그래서 여러 사람들 구경오라고 미술관을 궁 내에 만들었던 것일까.

경운궁이 말 그대로 왕이 살게 되는 궁이 된 시기는 멀리 임진왜란 때로 올라간다. 임진왜란 당시 전세가 상당히 불리하다고 판단한 선조는 북쪽땅 의주까지 '전략상 후퇴'를 하게 된다. 이후 1년 반만에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이미 모든 궁궐이 왜군에 의해 파괴되어 마땅히 그 귀한 몸을 누일 곳이 없었다.

그래서 선조는 당시 세조의 큰손자 월산(月山) 대군의 집 등 '정릉동 행궁'이라 불리는 현 조선호텔 부근 왕족 및 고위 관료들의 집들 중 쓸만한 것들을 빌려쓰게 되고, 이후 광해군이 1611년 창덕궁을 보수해 거처를 옮기면서 이 행궁에 붙였던 이름이 경운궁이다.

이후 경운궁은 약 2백여 년간 비어 있다가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하면서 다시 사람 냄새 풍기는 궁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아관, 즉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했던 고종은 이전의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운궁을 중건하면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러시아 공사관에서 훤히 굽어보이는 곳에 경운궁이 있으니 가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았으리라.

다만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갈 때도, 러시아 공사관 근처의 경운궁으로 갈 때도, 그 이유가 모두 외세의 힘을 빌려 일본의 영향력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려는 고육책이었다는 점에서 그저 씁쓸함만이 가득할 뿐이다. 이로부터 10년간 고종이 순종에게 황제위를 넘겨주기까지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한 운명을 걷게 된다.

경운궁은 사람들 사이에 흔히 '덕수궁(德壽宮)'이라 알려져 있다. 뭐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게다. 다만 덕수궁이란 명칭은 경운궁 4백여 년 역사에 있어 후기에 붙여진 이름일 뿐인데다가, 그 이름을 얻게 되는 과정에서도 나라 잃은 설움이 잔잔히 배어 나온다.

순종이 고종에게서 황제위를 넘겨받으며 고종의 영향력으로부터 순종을 분리시키려는 일제의 압력에 의해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되는데, 이때 고종에게 내리게 된 궁호가 '덕수(德壽)'이다. 이는 오래 살라는 의미의 말로 이미 정종이 태조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으며 올린 시호이기도 하다.

경운궁은 그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는 경희궁보다야 다행이라지만 원형이 너무나 훼손된 것이 사실이다. 1904년 일어난 대화재로 많은 전각들이 불에 타는 과정에서 복층이었던 중화전이 불에 탄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긴 하지만 보다 큰, 보다 정확한 이유는 일제의 계획적인 조선 궁궐 파괴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사람 없는 궁이 되면서 급기야 1933년 공원으로 개장한 경운궁은, 흔히들 말하는 '덕수궁 돌담길'이 만들어지면서 궁궐이 둘로 쪼개지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일종의 엑스포 대회를 열면서 경복궁 등을 파괴한 것이나, 궁궐을 놀이터 정도로 만드느라 식물원과 동물원을 들여야 했던 창경궁 등. 우리의 궁궐은 그렇게 파괴되어 왔던 것이다.

오늘은 그런 경운궁을 찾아가 보려 한다. 앞서 말했듯 경운궁이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기에 답사하기가 매우 용이하다. 먼저 지하철 시청역에서부터 시작하자. 출구를 빠져 나오면 바로 옆으로 목각을 해서 파는 아저씨가 보이고, 뒤로는 조선총독부 자재 중 남은 것으로 지었다는 서울시청이 우두커니 서 있다.

서울시청을 뒤로 하고 얼마간 걷다보면 관광 안내 부스가 보이며 이내 대한문(大漢門)앞에 서게 된다. 그런데 이 대한문은 원래 이름이 대한문이 아니라 '대안문(大安門)'이라고 전해진다. 더 나아가자면 원래 경운궁의 정문 이름은 인화문(仁化門)이었다 한다. 이는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 등의 정문 이름이 모두 '화(化)'자 돌림이라는 데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문은 단지 남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문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 사람의 통행에 있어 정문 구실을 했던 것은 현재 대한문으로 불리는 동문 대안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1900년대 들어 도로가 만들어질 때에는 인화문이 아니라 대안문 앞 광장을 기점으로 건설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뜻하지 않게 경운궁의 정문 구실을 하던 대안문은 어느 샌가 대한문으로 편액을 고쳐 달게 된다. 1906년 4월 25일 대화재로 인한 피해를 수리하던 중 고종은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그 이름을 바꿔 달라고 명령함으로써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경복궁 광화문처럼 대한문의 현재 위치는 원래 대안문이 있었던 그 위치가 아니다. 사람보다는 차가 중심이 되는 우리 사회에서 일개의 문이 도로보다 우선시될 수 있었을까. 대한문 역시 도로에 원래 위치를 내주게 된 것이다.

1914년 경운궁과 서울시청 사이로 조선총독부와 서울역을 사이를 좀더 편하게 왕래하기 위해 광화문 사거리와 숭례문을 잇는 태평로를 뚫게 되는데 이때 대한문은 일차적으로 뒤로 나앉게 되고, 이후 1968년경 도로 확장을 위한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다시 한번 더 뒤로 약 14m 정도 물러서게 된다.

따라서 원래 있었던 대한문 앞 광장은 그저 수문장 교대식을 하기에도 좁아 보이는 공간만이 남게 되었고, 창덕궁 등에서 볼 수 있는 왕궁 정문의 높은 기단이나 계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다른 궁의 정문과 달리 단층 규모로 조촐한 대한문은 차로에 자신의 자리를 내주었던 것이다.

대한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다리가 나온다. 궁에는 반드시 있는 금천교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하다. 금천을 건너라고 있는 다리이긴 한데 어디에도 금천은 보이지 않고, 그저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낸 인공 연못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문 마저 뒤로 나앉아 정문과 금천 사이의 공간을 빼앗았고, '덕수궁 돌담길'이라는 그 유명한 데이트코스를 만드느라 줄어든 궁역, 후세의 무신경 때문이 아닐까.

또한 그 물웅덩이와 담장 사이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하마비가 덩그러니 서 있다. 원래 여기 있어서는 안될 것임에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미 궁에 들어오기 전에 말에서 내렸어야지, 궁에 들어온 후에 말에서 내린다는 것이 당시 법도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한문 바깥쪽 멀리에 있던 것을 들여놓지 않았나 싶다.

처음부터 많이 놀란 가슴. 진정이라도 시킬 겸 금천교 건너에 있는 경운궁 안내 지도판을 보고 답사 계획을 다잡아 보자. 먼저 중심 되는 건물부터 살펴보기로 하는 것이 좋겠다. 경복궁의 법전은 근정전이요 창덕궁의 법전은 인정전인 것과 마찬가지로, 경운궁의 법전은 중화전(中和殿)이다.

중화전에 가자면 온 길을 그대로 걸어 오른쪽으로 문이 하나 보일 때까지 가자. 그 문은 중화전의 문이라 할 수 있는 중화문(中和門)이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너무나 어색하다. 이건 무슨 나 홀로 서있는 문 같다. 왜일까. 바로 행각이 하나도 없이 문만 덩그러니 놓여 있으니 어색할 수밖에.

그렇다. 경운궁의 중화전을 두르고 있는 행각은 중화문 오른쪽에 시멘트 바닥으로 된 'ㄱ'자 형 행각 일부분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중화전의 행각 부분은 머릿속 상상에 의지하는 수밖에 별 뾰족한 수는 없는 것 같다.

중화전 조정으로 들어서면 창덕궁이나 경복궁과는 달리 보수를 함에 있어 그리 신경을 쓴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1984년 바닥에 깔린 박석들도 제각각이요, 행각이 없어서 그런지 조정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여기 경운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으니 마음을 누그러뜨리자.

중화전에 오르는 계단 답도에 새겨져 있는 용 두 마리가 그것이다. 고종의 나라는 대한제국이었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황제의 나라인 만큼 그 상징은 봉황이 아니라 용이어야 했고, 그것이 답도와 중화전 안의 소란반자에서 노니는 용 두 마리에 나타나 있다.

광무8년인 1904년 화재로 원래 중층(주: 중층이란 것은 2층이긴 한데 그 사이 경계가 없어 '트인 2층'을 의미한다)이던 것을 단층으로 지은 중화전은 기단은 2층이지만 돌난간도 없고 행각도 두르지 않은 채 홀로 쓸쓸히 앉아 있다. 더군다나 기둥은 좀 짧아 보이는데 지붕은 커 보여 약간은 불안정해 보이기도 하고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중화전 뒤로 돌아가면 경운궁 유일의 2층 목조 건물인 석어당(昔御堂)이 나온다. 이 역시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중건한 것인데 단청을 입히지 않아서인 지 무척이나 고풍스러워 보인다. 석어당은 그 이름에 '어(御)'자가 들어가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왕이 거처한 곳일 텐데, 태조도 개경의 임시 수도에 2층으로 된 침전을 지었던 역사가 있었으니 이곳도 침전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하긴 선조가 승하한 건물이 바로 석어당이니 그 이름이 틀리진 않은 것 같다.

석어당 앞쪽 오른쪽으로 나 있는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러서면 경운궁의 편전 덕홍전(德弘殿)이다. 출입문이 서구에서 들어온 듯한 당판문을 하고 있는 덕홍전은 외국에서 온 사신을 맞아들이거나 공식 업무 등을 담당했던 건물이다. 한편 있어야 할 담장이 없이 바로 연결되어 있는 덕홍전 오른쪽 건물은 왕의 침전인 함녕전(咸寧殿)이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집이기도 한 함녕전은 네 벌대의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았다. 특이하게도 함녕전의 왼쪽 기둥들은 기단석 위에 다소곳이 놓여 있는데 반해, 오른쪽의 기둥들은 기단석 바깥으로 노출되어 있다.

특히 이곳 함녕전의 남쪽 행각에 있던 정문 광명문(光明門)은 제 위치에 있질 않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그나마 경운궁 안에 있긴 한데 문 안에 요상한 것들이 진열되어 있는 광명문은 조금 있다가 찾아가 보기로 하자.

함녕전 뒤로는 그리 넓지 않은 화계가 조성되어 있고 그리로 올라가 보면 이국적인 건물이 한 채 들어서 있다. 정관헌(靜觀軒)이다. 궁 내에 들어선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라는 주장도 있는 정관헌은 앞쪽이 확 트여 개방된 채 기둥들이 나열되어 있다. 왕의 침전에서 화계를 지나 있는 건물이니 만큼 일종의 후원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고종이 이곳에서 양식과 커피 등을 즐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바야흐로 한반도 최초의 '다방'이리라. 특히 서양 각국의 이권 다툼이 치열한 시대에 조용히 앉아 삼매경에 빠진다는 의미의 정관(靜觀). 그 의미가 묘하게 다가온다.

이 같은 서양식 건물이 경운궁 내에는 많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석조전뿐만 아니라 그 뒤로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돈덕전, 원래 석조전이 만들어지기 전에 그 자리에 있었던 구성헌 등. 외세의 힘이 절대적인 힘을 행사한 시대이니 만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건물들이 들어설 수밖에 없던 것이 아닐까.

정관헌의 왼쪽으로는 아름다워 보이기만 한 꽃담이 계단을 이루며 답사자를 맞이해 주는데, 그 문을 나서면 즉조당(卽祚堂)과 준명당(浚明堂)이다. 복도를 통해 서로 왕래가 용이해 보이는 이 건물들에서 원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행각이나 문 등은 역시나 찾아볼 수 없다.

한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했을 때 법전으로 이용되면서 태극전이나 중화전으로 불리기도 하다가 현재의 중화전이 생기며 다시 즉조당이란 이름을 찾게 된 즉조당은, 인조가 왕에 등극한 건물이자 순종이 황제에 등극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준명전이라 불리기도 했던 준명당은 왕이 공식 업무를 하던 편전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 나라 최초의 '유치원'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를 위해 선교사를 선생으로 들여 교육을 했으니 말이다.

준명당 왼편으로는 경운궁에 현존하는 두 번째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다. 당시 돈으로 129만 원이 들었다고 전해지는 석조전 건축은 조선왕조 6백년의 마지막 대공사로 돈과 민중의 땀만 축냈을 뿐이지, 말 그대로 경운궁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도 않을뿐더러 이름에서도 그저 돌로 만들었다 해서 '석조전'이라 부르는 등 재미도 없고 운치도 없고 철학도 없어 보이는 그런 건물이 아닐까.

석조전은 생김 그대로 외국 세력에 의해 주로 사용되어 왔다. 먼저 일제 시대에는 일본 미술품 전시장으로 활용되다가, 해방 직후 한국 전쟁 직전에는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기도 했고(실제로 총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뒤 국제연합(UN) 한국위원단이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을 국립박물관, 현대미술관에서 이용하다가 현재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한편 석조전 앞 인공 냄새 물씬 풍기는 분수 옆으로는 1937년 석조전 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이왕직 박물관이 들어서게 된다.

석조전에서 분수와 정원을 지나 담장 가까이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무슨 간이 박물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이 하나 있다. 이전에 말한 광명문, 즉 왕의 침전 함녕전의 정문이다. 그런데 그게 왜 이곳에 있는 걸까, 또 왜 그걸 신기전기화차와 흥천사 종, 보루각 자격루가 차지하고 있는 걸까. 그저 놓을 데가 없으니 이곳에 가져다 놓은 것이 광명문일 것이요, 또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경운궁에 놓인 세종대왕상과 같은 것이 그 물건들이겠다. 그래도 모두 가져다 버리지 않은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도 한 번 온 것, 안내판이라도 한번 읽어보자. 신기전기화차는 고려 말 최무선이 만든 주화(달리는 불)를 세종 때 개조한 것으로 화약을 채운 뒤 대나무 끝에 쇠촉을 단 화살을 단번에 여러 기씩 날리는 장치라고 한다. 그리고 흥천사 종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를 기리기 위한 종으로, 그의 무덤이 있던 정릉 근처 흥천사에 있던 종이다. 그러던 것을 흥천사에 화재가 나자 흥인문을 거쳐 영조 때는 광화문으로, 광화문이 일제에 의해 동쪽으로 옮겨질 당시에는 창경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해방 후에 이르러 이곳으로 흘러들게 된 것이다.

한편 보루각 자격루는 중종 31년인 153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세종 때의 자격루의 전통을 이어받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물시계의 하나라고 전해진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아직 이 보루각 자격루를 보지 못한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지금 당장 만 원 짜리 지폐를 펼치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물시계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것도 원래는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 경복궁 경회루 앞 보루각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바야흐로 세계화의 시대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1백 년 전 이미 경운궁은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운궁은 서울의 중심 나아가 '세계의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하다. 그런데 그게 제대로 된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면 있을 것이다.

당시 경운궁 담장 밖으로는 바로 러시아 공사관이나 영국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 미국 공사관 등 열강의 관청들이 들어섰으며 성공회성당이나 정동교회 등의 외국 종교기관,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 등 미국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학교들이 세워졌다. 뿐만 아니라 외세와 결탁한 이들의 살롱 역할을 하던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 호텔 등도 경운궁 담장 너머로 들어서게 된다. 바야흐로 조선의 '세계화'다.

이제 이곳에 세계화를 북돋우려는 듯 하나의 외국 건물이 더 들어서게 된다고 한다. 선원전이 있던 자리에 일제 시대에 들어 경기여고의 전신인 경성제일고등여학교가 세워지게 되는데 경기여고가 꿈의 땅 강남으로 이사를 간 뒤 미국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 직원 아파트가 들어선다 한다.

하기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의 중심인 광화문 앞 미대사관보다야 이곳이 그나마 나을 것 같긴 하지만, (이곳으로의 대사관 이전을 전제로) 터닦기 공사에 앞서 선원전 구역부터 확실하게 발굴 조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미대사관이 들어서기 전에 그러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선원전의 흔적은 완전히 우리 역사에서 지워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야 이곳을 발굴 조사할 수 있을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작금의 대사관 혹은 영사관이라는 것이 이전처럼 작은 건물이 아니라 고층으로 들어서기 마련인데 그런 건물이 들어서고 만다면 경희궁 터에 들어서는 '경희궁의 아침' 등 대단위 아파트들에 의해 경희궁이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져 가듯 선원전을 위시한 경운궁의 모습도 한반도 역사의 줄기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대사관 이전 부지를 옮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전 공사에 앞서 충분한 발굴 조사를 통해 선원전의 역사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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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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