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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석모도 가는 배 위에서
ⓒ 김은주

이 비를 너도 보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어쩌면 우연히 니가 이 편지를 읽을지도 모르겠고, 또 어쩌면 우연히 이 순간 비를 보면서 내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어. 그랬으면 좋겠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니 마음에 드리워진 그늘 한 자락을 걷어낼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쁘겠고, 혹 그러지 못할지라도 그랬으면 하는 내 마음이 전해지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어….

답이 없는 니 전화기에 목소리를 남기고 나는 석모도에 다녀왔어. 바람이 많이 불었지. 울릉도에 갔을 때 꼬박 하루 동안 섬에 갇혀 오도가도 못했던 기억이 나서 내심 걱정이 되더라. 또 그런 일이 있을까 하고 말이야. 이젠 나도 아무렇게나 떠나고 싶은 때 떠나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 수가 없는 처지니까. 하지만 걱정 없대. 여기선 아무리 센 태풍이 몰아쳐도 배가 뜨지 못하는 일은 없대. 그래 봐야 고작 10분밖에 안 걸리는 거리니까.

▲ 석모도 가는 뱃길을 따라오는 갈매기
ⓒ 김은주
신촌에서 강화 가는 버스를 타고, 강화에서 외포리 선착장으로 가는 버스를 다시 갈아탔어. 떠나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사람들을 싣고 버스는 도심을 벗어나 김포의 푸른 들녘을 달린 뒤에 바다 같지 않은 바다 위에 놓인 강화대교를 지나, 외포리까지 달렸어. 이제 조금 있으면 석모도까지 배를 타고 갈 필요가 없어지겠더라구. 두 섬을 잇는 다리 공사를 막 시작하려는 참이니까. 섬 사람들은 그 일을 반기는 눈치였지만, 난 좀 기분이 그렇더라. 섬으로 가는 길에 콘크리트 다리를 놓아야만 한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나는 그 여행을 포기하고 싶을 거 같아. 하긴, 나 같은 사람들은 장사엔 별로 도움이 안 될 테지만.

갈매기들은 여전하더라. 새우깡 한 봉지를 따라오며 공중곡예까지 보여주는데, 보고 있는 마음이 씁쓸하더라. 누가 저 아름다운 존재를 저렇게 추하게 만들어도 좋다고 허락했는지…. 그네들의 아름다운 날개짓을 비굴한 구걸 행위로 만들어도 괜찮다고 허락했는지, 누군가의 생각없는 호기심에서 시작되었을 한바탕 곡예는 석모도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어. 도시에서 '날아 다니는 쥐떼' 취급을 받는 비둘기들이 바다에도 그런 식으로 생겨나고 있더라. 맘이 아팠어.

▲ 바다로 가는 길
민머루 해수욕장 갯벌이 열리면서 바다로 가는 물길도 같이 드러났다
ⓒ 김은주
선착장에는 민박집 아저씨가 마중을 나와 있었어. 처음 석모도에 왔을 땐 그저 보문사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섬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지만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더라. 그래서 하룻밤을 묶기로 했거든. 내가 예약한 민박집은 섬돌모루에서 가까운 곳이야. 민박집 마당 바로 앞이 바다인데, 그 바다 건너에 있는 자그마한 섬이 바로 섬돌모루야. 몇 년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와 이 섬을 두고 어디로 갈까 고민했다는 곳이지. 언론에서, 불법으로 지은 별장이랑 방파제 따위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바람에 결국 이곳으로는 오지 못하고 백담사로 옮기고 말았다고 민박집 아저씨가 열심히 설명을 해주셨어. 혼자서 일해야 하니까 힘들다는 둥, 전날 왔던 아가씨 둘은 자기 덕분에 섬 드라이브를 아주 잘 했다는 둥, 짐 풀고 나면 자기가 보문사까지 태워줄 테니까 저녁을 같이 먹자는 둥 말을 걸어오길래 좀 성가시기도 하더라. 아무래도 섬 아저씨니까 말이야.

마음 먹었던 일이 있어서 짐을 풀자마자 자전거를 빌려 준다는 이에게 전화를 했어. 차에 자전거를 싣고 다니면서 섬 곳곳에 있는 여행객들에게 자전거를 배달해주고 있다고 했어. 타다가 힘들면 언제라도 다시 수거해 가고. 썩 괜찮은 서비스인 거 같지?

석모도의 유일한 해수욕장인 민머루에 잠깐 들렀어. 3백미터를 넘게 걸어갔는데도 갯벌은 여전히 그 끝을 보여 주지 않았지. 바다 가득 햇빛이 부시게 넘실대고 있었고, 아이들은 게를 잡느라 이리 풀쩍 저리 풀쩍 바빠 보였어. 물 한 병 값이 육지의 3배인데도 이 곳을 찾는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단다. 니 생각이 잠깐 났어. 마지막으로 함께 갔던 운문사 생각도 났고, 같이 가자고 말해 놓고도 그러지 못했던 더 많은 곳들 생각이 나더라.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봐.

▲ 삼량염전 전경
ⓒ 김은주
자전거를 끌고 보문사로 길을 잡았어. 얼굴이 검게 탄 아저씨 한 분이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염전에서 하얀 소금가루를 담아내고 있더라. 한참을 그러시더니 소금 창고 옆에서 소주를 드시는데, 그 고단함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 것처럼 다가왔어.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삶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져서 그저 염전 바닥만 찍어대고 말았지. 그 너른 염전이 전부 한 사람 거라는데, 일할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구역별로 창고를 지어 놓고 빌려주고 있대. 세금은 소금으로 받고 말이야. 소금자루를 앞에 두고 소금을 팔고 있는 그의 아낙에게도 시난고난한 삶의 냄새는 진하게 나고 있었어. 그런 풍경을 유유자적 자전거나 타고 구경하는 내 모양새가 참….

염전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보문사까지 내리 5킬로미터 정도 되는 길을 쉬지 않고 달렸어. 바람에 나를 맡기고, 마음까지 전부 놓아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말이야. 남해 금산 보리암, 동해 낙산사와 더불어 3개 관음 성지라 하는 보문사에서 나는 뭘 보고 싶었던 걸까?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그 봄 이후, 두 번째로 찾은 곳인데도 여전히 내 머리에는 물음표만 가득 떠다니고 있었어.

▲ 고양이, 성불하다
보문사 눈썹바위 밑에서 눈빛이 선한 고양이를 만났다
ⓒ 김은주
돌에 새긴 부처님 품에 안겨 저만치 서해를 아래에 두고 한참을 앉아 있었어.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졸리운 눈으로 오가는 이들을 사념 없이 바라보고 있더라. 절집에서는 고양이조차 덕을 닦고 있는지, 그 눈이 한없이 선량하더구나. 참 신기한 일이지? 저 사는 곳 따라 심성조차 달라지는 뭇생명들의 조화속이라니. 낙조를 보고 싶었지만 하늘이 허락치를 않았어.

아쉬워하며 석불을 내려온 시각이 마침 6시 30분, 스님들이 막 법고를 두드리기 시작하시는 참이었지. 세 분 스님이 돌아가며 법고를 두드린 다음, 운판을 몇 번 울린 다음 범종이 우렁차게 울음을 토해냈어. 맑은 소리를 따라, 나 역시 저만치 떠가는 듯 몸이 가벼워졌어. 날마다 그런 소리로 하루를 닫는다면 저절로 정갈하게 영혼을 씻을 수 있을 것 같더라. 신기한 건, 똑같은 북에 똑같은 채로 두드려도 세 분 스님의 법고 소리 느낌이 너무 틀리다는 거야. 어떤 분은 좀더 강하게, 또 어떤 분은 좀더 부드럽게, 다른 분은 좀더 리드미컬하게. 스님들 인상이랑 닮았더라고, 그 소리가. 내가 두드리면 법고가 어떤 소리를 내줄까, 궁금해졌어.

▲ 민머루 해수욕장에서 만난 밤게
밤톨처럼 생긴 몸통 덕분에 이름도 밤게다. 옆으로 가지 않고 앞으로 걷는 게다.
ⓒ 김은주
버스 끊긴 절집 아래 마을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갈 길 막막해, 결국은 자전거를 빌려주던 이에게 전화를 했어. 흔쾌히 태워다 주마, 하더구나. 인구 2천인 이 작은 섬에 주말이면 차가 3천 대나 들어온다니 택시가 있을 필요가 없는 거지. 땅 한 평에 50만원이 넘는다니, 섬은 섬이라도 더 이상 고즈넉한 섬일 수는 없는 곳이 되어버렸어.

그래도 좋더라,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일은 말이야. 다시 돌아올 곳이 있어서 떠나는 마음이 덜 무거울 수 있는 거라고, 베이스캠프가 없는 사람은 떠나지도 못하는 법이라고 누가 그러더라. 그런 점에서 나는 좀 비겁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거 같아.

편지를 쓰는 동안 비가 그쳤어. 답장을 기대하진 않을게. 그렇지만 이 마음은 꼭 너에게 가서 닿았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생각한 시간 동안, 너의 마음밭에 따뜻하고 달콤함 바람 한 자락이 불어와주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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