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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용정 명동교회 바로 옆에 있는 윤동주 생가로 중국정부로부터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만주 용정 명동교회 바로 옆에 있는 윤동주 생가로 중국정부로부터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 박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윤동주요, 가장 좋아하는 시 역시 윤동주의 작품으로 '서시'라고 한다. 얼마 전, 한 TV에서는 일본의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윤동주의 시를 학생들이 열심히 배우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윤동주를 죽게 한 그네들조차도 그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하는 모양이다.

이태 전 나는 항일유적지 답사단 일원으로 독립운동 요람지 용정 일대를 답사한 후, 용정 시가를 벗어나 30여 분 비포장 도로를 더 달린 끝에 마침내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명동 마을에 이르렀다. 동네 들머리에 '윤동주 생가'라고 새긴 큰바위덩어리가 세워져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은 아직도 낡은 초가집들이 듬성듬성한 20여 호의 자그마한 마을로 윤동주가 살았던 1920년대 그 무렵과 별반 다름이 없을 듯했다. 명동 마을 언저리를 둘러보니 시심이 저절로 우러나올 만큼 산수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사방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분지로써 퍽 아늑했다. '인걸은 지령(地靈)이다.'고 하더니, 이렇게 아름다운 고장이었기에 그처럼 위대한 시인이 탄생했나 보다.

윤동주의 생가는 큰 도로에서 좁은 길로 100여 미터 내려가자 명동교회와 나란히 붙은 첫 집이었다. 생가로 가자면 교회 마당을 거쳐야 했다. 교회로 들어서자 두 젊은이가 불쑥 나타나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모두 조선족이었다. 한 젊은이는 비치파라솔을 펴놓고 그곳 특산물인 삼베, 약재 따위를 좌판에 잔뜩 늘어놓았다.

나는 좌판의 상품을 설핏 훑고는 교회 한 쪽에 서 있는 비석으로 눈길을 돌리자, 다른 한 젊은이가 얼른 앞장서면서 친절하게 안내했다. 그 비석은 명동교회를 세웠던 목사요, 독립운동가이며, 명동소학교 교장이었던 김약연 선생 송덕비였다. 유감스럽게도 비석 머리 부분은 떨어져나갔다.

비석 바로 뒤편에는 100여 년을 더 묵었을 고목이 싱그러운 빛을 잃지 않은 채, 우람하게 서 있었다. 지난날 윤동주가 방학 중 고향에 돌아올 때면 이 나무에 걸어둔 교회 종을 손수 울렸다고 했다. 교회는 단층 한옥으로 벽은 회칠을 한 기와지붕이었다.

교회당 옆 마당에는 암탉 수탉들이 어울려 한가로이 모이를 쪼고 있었다. 닭들은 낯선 나그네에 대한 경계도 전혀 없었다. 지난 날 우리나라 농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지금은 보기 드물어 이국에서 본 정경이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윤동주 생가는 명동교회와 널빤지로 이은 야트막한 울타리로 이어져 있었다.

명동교회 마당에서 널빤지 쪽문을 밀고 윤동주 생가로 들어갔다. 아담한 단층 기와집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은 듯, 방마다 문은 닫혔고 인기척도 없었다.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고즈넉이 적막감만 불러일으켰다.

청년은 처마 모서리에 있는 방명록과 성금함으로 안내했다. 이 성금은 생가 유지비와 명동촌 마을 기금으로 쓴다고 했다. 쪽문과 생가 본체 사이에는 우물이 있었다. '자화상'에 나오는 우물이라고 했다. 나는 두레박을 들고 우물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우물은 10미터 정도로 꽤 깊었다. 이 날도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추억처럼 낯선 사나이"가 우물 속에 비쳤다.

윤동주의 생가를 떠나 모교 명동소학교를 둘러본 후, 다음은 그분이 영원히 잠든 곳을 찾았다. 다행히 우리를 안내하는 조선족 기사는 지난해 윤동주 무덤을 가본 적이 있다고 장담하기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명동소학교에서 다시 용정으로 방향을 되돌렸다. 기사는 몇 차례 차를 세워가며 주민에게 물은 끝에 용정현 뒷동산 중앙교회 묘역을 찾았다. 산은 야트막했다. 날씨가 쾌청하기에 승용차로 산길을 오를 수 있었다. 만일 비라도 조금 내렸다면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진흙길로 며칠 전 비 오는 날 차바퀴가 빠진 자취가 또렷했다.
"선생님, 오늘 참 재수 좋은 날이에요."

기사는 묘소를 쉬이 찾은 것은 날씨와 자기 때문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했다. 출발 전, 그 날 승용차 삯과 봉사료로 모두 500원으로 주기로 한 바, 봉오동 전적지를 찾으면 100원, 윤동주 묘지를 오르면 100원을 덤으로 주기로 했기에 그가 나보다 더 기뻐했다. 아무튼 그 기사를 잘 만났다. 답사 중, 안내원이 길을 몰라 헤매면 길바닥에서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기 마련이다.

만주 용정현 중앙교회묘역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묘소.
만주 용정현 중앙교회묘역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묘소. ⓒ 박도
산을 오르자 올망졸망한 무덤들이 즐비했다. 모두 고만고만한 무덤들로 수천 개는 넘을 듯했다. 마침 산등성이에서 밭일을 하고 있는 농부에게 윤동주 묘소를 물었더니 친절히 가르쳐 줘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그 농부도 조선족이었다. 나는 무덤 앞 상석에다 서울에서 가져간 술로 헌작한 후에 깊이 고개 숙여 엎드렸다.

윤동주 묘지의 봉분은 다른 묘보다 조금 더 컸다. 봉분 아래 부분을 시멘트로 둘러 발라서 다른 무덤보다는 조금 돋보였다. 오석(烏石)으로 된 상석 뒤에는 같은 돌로 다듬은 묘비가 1미터 정도 높이인데, 앞면은 다시 파서 양각으로 "詩人 尹東柱之墓"(시인 윤동주지묘)라고 새겼다.

묘지는 사방이 훤히 트인 산 중턱 남향받이였다. 이곳에서 본 언저리 산하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나는 이곳을 찾기 전에 윤동주 묘지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서울 근교로 마땅히 이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와서 보니, 그분은 제자리에 묻혀 있었다. 윤동주는 조국에서보다 이곳에서 더욱 사랑 받고 있었으며, 동북에 사는 조선족 동포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대단한 인물로 살아있었다.

나는 윤동주 생가와 무덤을 둘러보면서 자꾸만 이육사 생가와 견주어졌다. 윤동주는 이국 땅에서도 제대로 대접받고 있지만, 정작 이육사는 제 나라 제 고향에서 홀대받고 있음에 마음이 아팠다. 일제시대 저항 시인으로 두 사람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은 서슴없이 윤동주와 이육사라고 할 것이다.

윤동주는 일제 아래 신음하는 조국의 현실을 보고도 자신이 온몸으로 맞서 싸우지 못한 데 대한 참회를 시를 남겼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본 땅에서 항일운동에 가담하여 일경에 체포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후에 옥사했다.

이육사는 평생을 일제와 온몸으로 맞서 싸우면서, 무려 17회나 감옥을 드나들었던 열렬한 독립투사로, 그분의 시에는 현실에 조금도 굴복하지 않는 꿋꿋한 의지가 담겨 있다. 육사 또한 동주가 돌아가기 전해인 1944년, 이국 땅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두 시인의 작품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절구로써 그 문학성뿐 아니라, 뒷사람들의 정신 교육에 귀중한 시로써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해 여름, 우리 항일유적지 답사 일행은 동북 삼성의 교통요지 장춘에다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궂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먼저 하얼빈으로 향했다.

승용차가 장춘 시가지를 벗어나자 말로만 들었던, 망망대해 같은 만주 벌판이 끝없이 펼쳐졌다. 장춘에서 하얼빈까지는 280여 킬로미터나 되는 먼길이었다. 도로는 대부분 일직선 아스팔트길이었다.차창 밖 도로 양편의 가로수가 참 시원하고 아름다웠다.

하늘 높이 치솟은 수양버들 가로수 사이에 띄엄띄엄 라일락이나 소나무가 있었고, 도로 가장자리에는 샐비어, 백일홍, 금잔화 같은 화초도 심심찮게 흐드러져서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중국인의 멋과 여유가 엿보였다.

드넓은 만주 벌판은 온통 옥수수 밭으로 초록의 물결이었는데, 이따금 벼논들도 눈에 띄었다. 그 초록의 향연 틈새에 해바라기 밭들이 무료함을 달래듯 띄엄띄엄 보였다. 비단에 꽃수를 놓은 듯, 초록의 벌판에 샛노란 해바라기가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장춘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길은 서너 시간을 고속으로 달려도 산 하나 볼 수 없는 초록의 지평선이 마냥 이어졌다. 내 일찍이 보지 못한, 상상을 초월한 아득한 들판이었다. 만주에서 태어나서 오십여 년을 이곳에서 살았던 일송 김동삼 선생 손자 김중생 씨는 이 일대가 지금은 대부분 옥수수 밭으로 초원을 이루고 있지만, 겨울철에는 황량한 허허 벌판으로 변한다고 했다. 시인 이육사는 이런 만주 벌판을 보고서 '광야(曠野)'를 읊었나 보다.

망망대해처럼 광활한 만주벌판. 시인 이육사는 이런 만주벌판을 보고 '광야'를 썼을 것이다.
망망대해처럼 광활한 만주벌판. 시인 이육사는 이런 만주벌판을 보고 '광야'를 썼을 것이다. ⓒ 박도
내가 끝없이 펼쳐지는 만주 벌판을 바라보면서 육사를 들먹거리자 마침 동행한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 이항증 씨가 당신 어머니 허은 여사와 이육사는 이종4촌간이라고 했다. 육사의 외할아버지가 범산 허형 선생으로 구한말 의병장으로 순국한 왕산 허위(許蔿) 선생과는 사촌간이다. 이 허씨 집안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항일가문이다. "새는 깃털이 같은 새끼리 논다."라는 서양속담이나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한자말처럼 독립운동가 가문을 살펴보면 서로 혈연으로 이어져서 사돈에 겹사돈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왕산 석주 일송 선생 집안이 그러했다.

육사의 행적을 보면, 1930년대 독립군 자금 모금으로 외삼촌 허규(許珪) 선생과 만주를 여러 차례 왕래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육사는 이 드넓은 광야를 달리면서 우리 민족에게 조국 광복을 가져다 줄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애타게 기다렸나 보다. '절정(絶頂)' 역시 그 무렵 육사가 일제에 쫓겨 눈 덮인 매서운 추위의 북만주 벌판을 헤매면서 그렸던 작품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제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 시는 암담한 식민지 시대의 절망 속에서도 조국 광복을 이루어내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작품으로, 저항시의 백미(白眉) 편이다. 일제에 쫓기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들에게 조금도 굴복하지 않는 독립전사의 기개가 추상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 관조의 여유와 준엄한 선비의 자세를 꼿꼿이 지니면서 당당한 목소리로 오히려 다가올 광복의 기쁨을 그리고 있다.

나는 교사로서 이런 작품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마다 기개 높은 시인에 대한 경외감과 아울러 '민족혼'이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다. 그 어둡고 무서웠던 일제 시대에 이런 노래를 불렀던 시인이 있었음에 우리는 약소 민족이란 패배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두 분의 생가를 같은 시기에 둘러보면서, 그 고향 사람들이 시인에 대한 사랑과 생가 보존 상태가 아주 다름을 느꼈다. 윤동주의 고향 용정 명동촌 사람들은 윤동주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생가를 잘 복원하여 두고 그분을 사랑하는 나그네를 불러모으는 반면, 안동 시내에 있는 이육사 생가는 너무나 소홀하게 보존되고 있었다. 아니 보존이라기보다 그대로 팽개친 듯 보였다.

동북 답사에 앞서 석주 선생 생가 '임청각(臨淸閣)'을 둘러보고자 안동으로 내려가면서, 그곳이 이육사의 고향이라는 데에 자못 기대가 컸다. 안동은 모두가 인정하는 양반의 고장, 문화의 고장이 아닌가. 다행히 안동댐 밑에 있는 낙동강 곁 민속박물관 공터에서 육사 시비를 만날 수 있었지만, 육사 생가를 둘러봤을 때는 어떤 분노가 치솟았다.

경북 안동군 안동댐 밑에 있는 시인 이육사의 시비.
경북 안동군 안동댐 밑에 있는 시인 이육사의 시비. ⓒ 박도
안동 시내 한복판에 있는 육사 생가는 거기로 찾아가는 표지판도 없었다. 애써 찾아갔지만, 누군가 여태 살림을 살고 있었다. 대문은 굳게 잠겨서 하는 수 없이 건너 편 축대에 올라 집안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지만 빨래가 널려 있어서 앵글을 잡을 수가 없었다. '위대한 시인의 생가가 이처럼 초라하게 방치돼 있을 수가!' 순간 울컥했다. 이것이 우리 문화수준의 현주소요, 독립운동가에 대한 대접의 한 단면이었다.

생가 좁은 마당에 '이육사 생가'라는 알루미늄 판 안내문이 마냥 을씨년스러웠다. 후손이나 문중에서 이 위대한 시인의 생가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다면 안동시에서는 마땅히 그 집을 사서 제대로 관리하는 게 문화도시 안동에 걸맞은 일이 아닐까?

내가 설핏 돌아본 탓인지는 몰라도 오늘의 안동도 개발 논리에 밀려 옛 것은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 고층 아파트들이 불쑥불쑥 솟아나고 있었다. 그 틈에 점차 우리 고유 전통 가옥이 허물어지고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고층 건물에 그늘지고 있지나 않는지?

안동 사람들은 자기 고장을 '추로(鄒魯: 공자와 맹자)의 향(鄕)'이라고 자랑삼아 말한다. 이 고장에는 도산서원·호계서원·병산서원·안동향교·하회마을… 등 돌볼 문화재가 지천으로 많기 때문에, 국난 때마다 의병, 독립투사가 많아서 육사의 생가 정도는 소홀했다고 변명할 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고장이 낳은 인물 중에서 누가 더 참 애국을 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웠는지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한다. 나라가 태평할 때 정승 판서가 많이 나와서 고장을 빛낸 업적과, 국난을 당해 온몸으로 조국 해방에 힘쓰면서 그 울분을 시로써 승화시킨 업적 중, 어느 것이 더 진정한 애국인가를. 일찍이 내가 둘러본 전라도 강진의 김영랑 생가·다산 유배지도, 강원도 평창의 이효석 생가도 육사 생가처럼 그렇게 궁색하지는 않았다.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에서 돌아온 날 밤, 나는 초라한 육사의 생가가 눈앞에 아른거려 몹시 울적했다. 아직도 육사의 원혼은 이국의 하늘아래 떠돌고 있으리라. 당신이 감옥 안에서 눈도 감지 못하고 떠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당신이 바라던 "백마 타고 오는 초인"도,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던 손님"도 이 땅에 여태 오지 않았나 보다.

지금 우리들은 맴모니즘(mammonism: 배금주의)이란 흙탕물에 휩쓸려 콩과 보리도 구별치도 못하고 천민 자본주의의 폐수에 뒤범벅이 되어 둥둥 떠내려가고 있다. 구천을 헤매고 있을 육사의 영령이시여, 나는 당신의 시를 주문처럼 중얼거립니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
<꽃>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2002년 8월 1일에 발간될 <샘물 같은 사람>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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