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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일 MBC 뉴스데스크는 한 아동학대 상담소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보도했다. 이 보도는 가정 폭력의 심각성과 돌발적인 폭력 사태에 취약했던 상담소의 현실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MBC는 미흡한 모자이크 처리로 비명까지 생생한 끔찍한 살인 장면을 그대로 내보냈다. 그 결과 본래 보도 취지와는 달리 MBC의 선정적인 보도 태도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말았다.

분명히 MBC는 커다란 잘못을 범했다. 살인 장면은 뉴스의 주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시간대 뉴스에서 스너프 필름과 다를 바 없는 충격적인 살인 화면을 공개한 것은 반드시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언론에 대한 비판이 과열되는 와중에 이 사건이 담고 있는 가정폭력의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근본적으로 상담소 살인 사건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심각한 가정폭력의 일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MBC의 사려 깊지 못한 보도 때문에 이 사건의 본질이 간과되는 일 또한 없어야 하겠다.

MBC보도를 본 기자는 살인까지 이를 정도로 심각한 관계였던 부부가 같은 방에서, 그것도 왜 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희생자는 가해자의 평소 행태를 잘 알고 있었고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피해자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공간에서 가해자와 협상을 시도했던 것일까?

8월 4일 '경남 여성 긴급 전화 1366' 홈페이지(www.women1366.or.kr)에 '가정폭력피해자 사건개요'라는 제목의 문서가 올라왔다. 경남 1366 상담소는 사건이 발생한 '천안 1391 아동학대 상담소'가 아니라 창원으로 피신했던 희생자를 상담하고 보호했던 단체다. 보고서를 검토하고서야 기자는 비로소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딸의 전학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가해자를 만나고 설득해야 하는 잘못된 전학제도, 그리고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천안 1391의 불찰이 그것이다.

가정 폭력이 시작되면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 자녀의 학업 문제다. 대부분 어머니가 자녀를 데리고 피신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자녀의 학업의 중단되어 전학의 필요성이 절실해진다.

다행히 초등학생의 경우는 문제 해결이 쉽다.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21조 ③항은 "초등학교의 장은 학생의 학교생활 부적응 또는 가정사정 등으로 인하여 학생의 교육환경을 바꾸어 줄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학생의 보호자 1인의 동의를 얻어 교육장에게 당해 학생의 전학을 추천할 수 있다." 고 규정하고 있어 어머니에 의한 단독적인 전학 절차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사건과 같이 고등학생을 자녀로 두고 있는 경우에는 이 법령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때문에 자녀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전학하려면 아버지의 허가를 받아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가정폭력의 주범인 아버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녀들이 자신에게서 떠나는 전학에 동의할 리 만무하다. 더구나 그들은 종종 자녀의 전학을 볼모로 하여 부인을 괴롭히거나 가족들을 만나려 하고 있다.

희생된 이씨(34세·어린이집 교사 및 음식업)는 가해자 민씨(40세·무직)의 폭력에 15년 동안 시달려오다가 2001년 12월 28일 집을 나와 창원 이모집에 몸을 숨기고 기거하였다. 이후 민씨는 줄곧 이씨의 친정 가족들을 협박했고 각각 고등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두 딸에게 살해 협박을 하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이씨는 다시 두 딸을 데리고 탈출하여 '창원 여성의 집'에서 보호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씨는 두 딸이 전학하여 학업을 계속 하기를 원했다. 초등학생인 딸은 쉽게 전학이 되었지만 고등학생인 맏딸은 아버지의 동의가 있어야 전학이 가능해서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민씨와의 만남이 위험하다고 주변에서 말렸지만 이씨는 고등학생인 딸이 유급될 것을 걱정하여 극구 전학을 원했다고 한다. 이씨를 보호하던 담당자가 맏딸이 다니던 아산 한올고등학교에 가정폭력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4차례에 걸쳐 전학이 불가피하다고 설득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결국 민씨는 딸의 전학을 볼모로 이씨에게 만날 것을 요구, 아무런 통제 없이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그 자리에서 참혹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희생자 이씨는 공포에 떨면서도 딸의 학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해자 민씨를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씨가 민씨를 만날 때 그나마 의지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만남을 주선했고 만남의 장소였던 '천안 아동학대 상담소 1391'이었다. 경남 1366의 보고서에 따르면 천안 1391은 이씨에게 민씨와의 대화를 주선하면서 '경찰 동석', '신변 안전'을 보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약속했던 경찰은 없었고, 민씨에 대한 몸수색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

외국의 경우 가정폭력은 매우 심각하고 잔인한 범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처벌 규정도 강력하거니와 더이상의 가정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가해자가 가족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금지된다. 가정폭력 가해자는 인격장애 등 정신적인 문제를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가족에게 근접하는 것이 곧바로 폭력, 살인 등 범죄로 직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적 문제 해결, 상담 등 피치 못할 상황에서 가정폭력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만나야 되는 상황이라면 반드시 가해자의 돌발 행동을 막을 수 있는 보안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이럴 경우 경호, 좌석 배치, 항시 제3자 동석 등은 최소한의 보안 사항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사건의 경우 이러한 최소한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아쉬운 점은 천안 1391이 아동학대에 관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단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병적 수준에 가까운 가정폭력 가해자의 심리 상태를 간파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민씨는 천안 1391 측에 울면서 가족과의 만남을 호소했고 천안 1391은 그런 민씨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딸의 전학 문제, 이혼 문제 등을 해결할 의지가 있는 것으로 오판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씨가 천안 1391에 보인 행태는 이씨를 살해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일 뿐이었다. 민씨는 양말 속에 칼을 준비한 상태로 이씨를 만났으며 죄를 반성하는 척 하며 이씨의 옆자리에 앉아 줄곧 살해 순간을 노리다가 상담원이 자리를 떠난 순간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가정폭력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부부 중 31.4 퍼센트가 폭력을 경험하며 이 수치는 일본보다 4.5배, 미국보다 2.5배가 높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가부장적 전통이 왜곡되어 가정폭력이 가장의 권위로 오인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정폭력은 심각하고 명백한 범죄 행위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가정폭력 방지를 위한 제도화가 아직도 일천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선 가정폭력 발생시 피해자 보호를 위한 격리 등, 신속한 임시조치를 보완한 가정폭력 관련법을 재정비해야 한다. 나아가 이 사건에서 명확하게 보여지는 것처럼 가정폭력은 단순히 형사법적 차원에서만 고려할 문제가 아니다. 가정폭력의 최대 희생자인 어린 자녀들의 교육문제, 피해자 상담과 보호를 위한 사회복지 시설의 전문성 담보 등을 위해 정부 해당 부처의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이 요구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2002년 8월 5일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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