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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진
우리 한국사회가 "돌진적 근대화"를 통한 압축성장을 추구해오면서 그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저자의 익살스런 분석에 따르면, 마치 단거리 시합하듯 겪어온 우리의 근대화와 자본화 과정은 "졸부, 속물, 짱구, 치한"으로 대표되는 무수한 붕어빵들을 양산해냈다.

졸부의 생활 지침은 "일차원적 실용주의", "탈역사주의", "무원칙의 잡탕주의", "돈과 삶이 따로 노는 물심 분열증" 같이 죄다 고약한 것들이다. 한데, 이 몹쓸 것들은 그에게만이 아니라 농축 근대화의 신화에 포획된 자들에게 두루 적용되어 나타난다.

단적인 예로, 인문학계 내에서만 해도 1996년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 방한의 그 요란함, 근래의 "김용옥 신드롬"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 지식사회의 두께가 어느 정도였나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심층 근대화를 위해서는 따라잡기식의 "서구 추수주의"가 아니라, "자생성으로서의 주체성"이라는 과제에 열심을 내고 그 열심의 연대를 모색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가 누누히 강조하는 말이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과 "화이부동(和而不同: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한데 어울리지 않는다)" 정신이다. 여기서 법고창신의 정신은 "옛 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면서도 법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연암 박지원의 말에서 그 깊은 속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어리석은 따라잡기 게임을 그쳐야 비로소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며, 문화적(紋和的) 고유한 "무늬"를 지니기 위하여 토착적이면서도 인문적 창의성과 탄력을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우리 사회의 전근대성과 지식인 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성숙의 인문학을 위한 과제들은 이미 앞서 펴낸 그의 책들에서도 수 차례 언급되었고 그 연장선에 있는 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더구나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최근의 김규항, 강준만, 홍세화, 박노자, 진중권, 김정란 등과 같은 아웃사이더 논객들의 등장으로 만개한 형편이라 조금은 식상한 면이 없지 않다. 다만, 철학자인 그가 심층 근대화에 대한 문제를 보다 "심층"적인 언표들을 사용하여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나 할까? 여러 신문들에 기고한 칼럼들을 모은 책이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들이 다소 다른 맥락에서 거듭 되풀이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복일지라도 그 나름의 색깔과 맛은 충분하다.

왜냐면, 처음부터 그랬지만 내가 저자의 글에 늘 흠뻑 취하는 것은 내용도 내용이나 그의 글에서 묻어나는 인문학적 "무늬" 때문이다. 여기서 "무늬"는 본질과 상관없는 표피적인 수준의 무늬가 아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바로 "무늬"야말로 본질과 직결된다. 언뜻 같은 이야기로 보이지만, 만가지 방향으로 새롭게 읽어내고 말하면서 미묘한 차이를 생성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장기인 것이다. 이 점은 "인문학에 대해서 글쓰기" 보다 "인문학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해 강조해온 평소 저자의 생각과도 부합한다. 가령,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내 인문학자들의 다수가 방대한 지식을 축적하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이 머릿속의 '뜻'으로만 구심화되어 있을 뿐, '인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글로써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를테면 '인문학에 대해서 자연과학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182쪽)

이른바 남들의 이야기들을 주워 모아 앞세움으로서 자기를 교묘히 숨기고 안존할 게 아니라, "자신의 음성과 입장, 스타일"로 말하자는 거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인문학에 남의 것을 수입하여 그대로 전달하는 전문가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상가가 있어야겠다고 한다. "기지촌 지식인"이 누구인지 조목조목 밝힌 대목을 읽노라면, 이러한 그의 문제제기가 얼마나 절박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는 기지촌 지식인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그들이 대리전의 명수임을 들면서 다음과 같이 개탄하고 있다.

"칼이든, 혀든, 펜이든, 나는 직접 내 상대를 만나고 싶었다. 하이데거의 졸개들, 비트겐쉬타인의 꼬붕들, 데리다의 애첩들, 듀이의 하수인들, 하버마스의 대리인들을 상대로 그들이 짜놓은 규칙을 좇아 무료하고 소득 없는 입씨름을 벌여야 하는 처지에 나는 늘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졸개들끼리 모여서 충성의 등급을 정하고, 승급을 위해 충순하게 짖어대는 놀음을 나는 경멸하고 또 경멸했다. 주인들이 코풀고 버린 휴지를 화두처럼 붙안고 영감과 통찰을 기대하며 깽깽거리고 있는 경비견들의 희망에 나는 결단코 동참할 수 없었다."(178쪽)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저자와 같이 "자기 스타일과 음성"을 갈구하며 이를 놓고 진지하게 씨름하는 인문학자가 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얼마 전에 <교수신문>을 보니, 그동안 우리 인문학의 성과를 헤아려보는 평가 작업을 연속하여 진행하고 있었다.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이도 우리 지식사회의 의미 있는 변화의 일부라 생각한다.

몇 년 전에 들었던 강연에서 저자는 "나는 내가 싫다"라는 자기 존재의 부정이 계속될 때 발전이 있다고 했다. 즉 자기 안정감이 아닌 초월, 긴장 그리고 긴장과 만남의 "협박관계"로 공부해야 인문학적 발전과 성숙을 기대할 수 있다는 거였다. 이처럼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성찰을 해나간다면, 심층근대화 뿐만 아니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말 그대로 개성적인 이치와 무늬를 가진 자들의 어울림이 그리 멀지는 않으리라.

자색이 붉은색을 빼앗다

김영민 지음, 동녘(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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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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