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후보'를 지지하는 현역 노조위원장.
새로운 노동운동에의 몸부림인가?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인가?
배일도 서울지하철공사 노조위원장이 지난 5일 국민통합21 창당대회에 참석, 정몽준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노동계에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재벌가의 2세로서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정 후보의 배경을 감안할 때, 배 위원장의 지지선언은 다른 노동운동가들의 정치 참여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배 위원장 자신이 초대위원장을 지낸 서울지하철 노조(www.sslu.or.kr)는 99년까지 7차례의 파업을 감행했다. 민주노총의 연대파업과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면서 전개된 지하철 파업은 수도권 시민들에게 민노총의 선명한 투쟁노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하철노조는 98년 복직한 배 위원장이 이듬해 9대 위원장에 취임하며 강성 이미지를 탈각하게 된다. 지난 3년간 '지하철 노조 무쟁의'를 이끌어온 배 위원장은 '정몽준 지지선언'으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양분해온 노동진영에 자신이 주창해온 '상생과 공존의 노동운동' 구상을 한 걸음 더 밀어붙인 것으로 보인다.
배 위원장은 6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5일 발언은 의례적인 축사로 '정몽준 지지'가 아니다"고 부인하면서도 '개인적으로' 정 후보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배 위원장은 "3파전으로 나갈 경우 보수기득권층을 대변하는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기 때문에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필요하다"며 "그러나 노무현으로 단일화될 경우 정몽준 지지표는 노무현으로 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통합을 주창하는 정 후보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또한 민주노총(이하 민노총)의 투쟁 노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온 그는 "민노총을 탈퇴하지는 않는다"면서도 공기업 노조 중심의 '제3노총' 건설을 추진하고 있어 민노총과의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다음은 이날 오전 지하철노조 위원장실에서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 5일 대전에서 열린 국민통합21 창당대회장에서 정몽준 후보 추대발언을 한 것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현역 지하철 노조위원장이 '재벌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한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나는 친분이 있는 국회의원의 후원회라면 소속당을 떠나서 참석해왔다. 앞으로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어느 당의 행사든 참석하겠다. 국민통합 21 창당대회도 노동계 인사중의 한 명으로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것이다. 나는 국민통합 21의 대의원도 당원도 아니다."
- (지지 연설에 대해) 조합원들이나 주변 반응은 어떤가?
"나는 지지 연설을 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터넷, 전화, 대면 접촉(중앙상임집행위원회 간부들)을 통해 여론을 들었다. 인터넷에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고, 지인들은 전화를 걸어 '잘했다'는 칭찬을 많이 했다. 노조위원장이 재벌 후보를 지지한 것은 잘못됐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내가 정 후보를 지지했다는 것은 오해다."
- 노동운동가로서 국민통합 21보다는 민노당이나 민주사회당(이하 민사당) 행사에 가는 게 더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겠나? 민노당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민노당이든 민사당이든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정당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민노당 후보가 과연 당선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아니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당선될 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정책을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나는 노조위원장이고, 노조는 현실의 의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 브라질 노동자당(PT)도 80년 창당해 번번이 대선에서 미끄러졌다가 얼마전에야 집권에 성공했다. 당장은 당선 가능성이 희박해도 미래를 위한 투자 차원에서 민노당을 지원해야 하는 게 아닌가?
"미래의 꿈도 필요하지만, 비정규직의 수난, 고용안정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은 노동자가 정치를 직접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 민노당의 흐름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 당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상대로 정책을 반영해야 한다고 했는데, 현재 거론되고 있는 빅3 후보의 노동정책들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어떤 후보든 친노동자적인 정책을 제시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실현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공약과 이행은 다르다.
한나라당은 보수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기존 민주당보다는 서민 위주의 정책을 펴지 않겠느냐고 보여지고... 정몽준 후보의 경우 재벌로 상징화되지만, 지금 그는 국민통합을 얘기하고 있다. 정 후보는 보수와 진보를 모두 아우르는 정치, 통합의 정치를 지향한다고 한다.
민노당은 진보와 보수의 구도에서 계급을 전제로 한 정당이다. 노동진영의 문제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표명한 정당이지만 표방하는 정책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는가? 민사당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 정당 중에서 국민통합21이 변화 가능성이 가장 큰 정당이라고 본다."
- 정 후보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가?
"나는 정 후보를 잘 모른다. 일반 국민이 아는 정도만 안다. 80년대 말∼90년대 초에 노사가 격돌할 때, 정 후보가 사측에 있었던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노동자들은 당시 정 후보가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를 파기하고, 구사대를 동원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정 후보는 TV 토론에서 '알려진 것처럼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노동자의 주장이라고 항상 정당하다고 보지 않는다. 요구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할 때, 명분은 옳을지 몰라도 현실에서 옳지 않은 부분도 많지 않나? 정 후보를 재벌 옹호하려고 노동자를 까부수려는 사람으로 봐서는 안 된다."
- 배 위원장은 89년 식칼 테러 사건이 있을 때 서노협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사건의 진실에 대해 좀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나?
"사측에서 식칼까지 동원해서 노동자 중에 다친 사람들도 있는데, 그중 한 명인 권용목씨도 곧 (국민통합 21에) 입당할 것으로 안다. 정 후보가 그런 일을 지시했다면, 권씨가 국민통합 21에 합류하겠는가? 권씨는 적어도 정 후보를 노조 탄압의 상징적인 인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중공업 노조도 '정몽준 대통령'이 노조 입장에서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안다."
-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에서 복직 후 노선 전환을 선언한 것과 정 후보에 대한 지지가 일정한 상관 관계가 있는가?
"일국 체제에서는 진보와 보수로 나눠서 얘기하지만, 지난 10여년 사이 세계화라는 글로벌 체제로 변화됐다. 자본가와 노동자로 갈라져 생각해서는 노동자들도 생존할 수 없다고 인식해서 '상생'을 주장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정 후보가 TV 토론에 나와 초국적자본의 위협을 경고하고 노사가 뭉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제 연설에서는 빼먹었지만,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이행하는 지금 시기에는 기업 경영 마인드가 국가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본다. 이회창 후보는 경영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무슨 대통령을 하려고 하나?
초국적자본이 국내자본을 잠식하려고 하는 이때 내국인들이 큰 차이를 넘어 통합해야 하지 않는가? 정몽준 후보도 그런 의미에서 '재벌 후보'가 아니라 '국민통합 후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이 다른 국가를 침략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지, 일본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재벌이 노동자를 머슴으로 격하시키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지, 재벌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게 아니다. 정 후보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 | 양친의 죽음이 노사관 변화에 간접적인 영향 | | | 음독자살한 부친, 의사파업중 사망한 모친 | | | |
| | | | ⓒ오마이뉴스 권우성 | 한때 전투적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배일도 위원장이 '노사상생'으로 노선을 전환한 데에는 양친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불행도 간접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다.
93년 전국해고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전해투)에 참여해 마포 민주당사에서 1년 반 동안 농성을 벌이고 있던 배 위원장은 그해 9월 아버지가 고향에서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이인제씨가 노동부장관이 되면서 해고자 복직에 대한 전향적인 정책이 추진되지만, 그는 결국 막판에 복직자 명단에 빠지고 만다. 잔뜩 기대를 품고 있다가 TV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한 칠순의 아버지는 상심한 나머지 음독 자살을 택한 것.
2000년 의사들의 파업이 있을 때는 어머니가 74세에 돌아가셨다. 배 위원장의 어머니는 음식을 잘못 먹은 후 모 대학 병원을 찾아갔는데, 마침 병원이 파업중이어서 제대로 진료도 못 받고 약국에서 약을 사다 먹었다. 파업이 끝나고 배 위원장이 어머니를 부랴부랴 서울의 병원으로 옮겨 정밀진단을 하려는 와중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나중에 확인된 모친의 사인은 패혈증(세균이 혈액에 들어가 피가 제대로 순환이 안되는 병)이었고, 이 사건은 배 위원장으로 하여금 "의사 파업만 없었어도 적절한 치료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회한을 남기게 했다.
배 위원장은 "의사들의 파업은 옳지 않다고 본다"며 생존권 차원의 파업과 집단이기주의로서의 파업 사이에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님의 죽음이 하나의 배경은 이룰 수 있어도 새로운 노선을 고민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 손병관 기자 | | | | |
- 현재의 '전투적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는데...
"지금 내국인끼리 대립적 시각을 가지면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 상생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타도하자는 생각을 버리겠다고 한 것이 2000년의 지하철노조 무쟁의 선언이다. 그것을 친자본적, 반노동자적이라고 보는 것은 시대를 너무 안일하게 보는 노동진영의 게으름과 무능이다. 민노총은 무조건 '안티'인데 무조건 그렇기만 하면 되나?
군부독재시절에는 플래카드 하나 걸고 유인물 한 장을 뿌려도 빨갱이로 몰렸지만 투쟁의 효과가 있었다. 지금 집회에서 머리띠 매고 투쟁 구호를 외치는데, 구호도 천편일률적이고 1분 동안 얘기하면서 '투쟁'이라는 단어가 한 70개가 나온다. 사용자들은 그런 것에 전혀 압박을 받지 않는다. 도리어 국민들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하고, 노동자의 진정한 힘을 소진시키는 게 아니냐?
노동운동에는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노사협조주의(실리적 노조주의), 비판적 개입주의라는 세 가지 흐름이 있는데, 나는 비판적 개입론자다. 노사정 3주체가 만나서 얘기할 테이블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노총이 김대중 정부 출범 초부터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규정하고, 반대 입장에 선 것은 대단한 실수였다고 본다. 우리나라도 노동당 정부와 대립각을 세워서 국민들의 불안감을 키우고 79년 대처의 보수당 정부를 불러들인 영국 노동자들의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있다."
- 민노총과 의견 차이가 많은 것 같은데, 차라리 입장 차를 분명히 하고 탈퇴할 생각은 없나?
"지하철 노조와 서노협의 초대 위원장을 지냈는데, 그런 기반 위에 탄생한 민노총을 탈퇴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가를 항상 새롭게 만드는 사람이다. 한국노총이 존재할 때 민노총을 세워야 노동운동의 발전이라고 봐서 민노총을 세웠다. 노조 결성의 자유를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지만, 민노총도 통제할 수 없다."
- 배 위원장이 1988년 처음 구속됐을 때, 노무현 변호사가 변론을 해준 것으로 안다. 노 후보의 변론 덕에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될 수 있었는데, 정 후보에 대한 지지가 이런 인간적인 정리를 무시한 게 아닌가?
"나의 행동에 대해 노 후보가 섭섭할 게 있겠는가? 노 후보가 지향하는 바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이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개인적인 지지와 당선 가능성은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모두가 '지금처럼 3파전으로 나갈 때 한나라당이 당선된다'고 얘기한다. 정 후보와 노 후보가 단일화되어야 하지만, 노 후보로 단일화될 경우 정 후보 지지표가 노 후보에게 가겠는가? 개인적으로는 노 후보가 정 후보보다 노동자의 권익을 더 잘 반영할 수 있는 사람이고, 노 후보보다는 권영길 민노당 후보가 더 진보적이라고 본다.
- 석방된 후 배 위원장은 노 후보와 전국의 노사분규 현장을 돌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다. 노 후보는 지난 국민경선에서 이 당시 행적으로 인해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선동했다'는 색깔론 시비에 휘말렸다. 당시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배 위원장은 노 후보에 대한 색깔론 시비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때나 지금이나 노 후보가 사회주의를 고민하거나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다.
88년 경북 안강에 있는 한 방위사업체에서 노동자가 화약을 만지다가 죽었는데, 노 후보가 국회 청문회에서 '기업인들이 정당에는 돈을 주면서 왜 노동자에게는 인색하냐?'고 질책하는 걸 들었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주장이었는데, 그걸 왜 사회에서 못 받아들이나?
노 후보는 이념을 떠나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를 이해하고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노동자의 권익이 사회에서 침해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고쳐나가자고 한 분 아닌가? 그런 행동이 우리 사회에서 못 받아들여지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것이 국민 수준이다. 노 후보가 상징하는 진보적 이미지를 국민들이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지가 안 나오는 게 아니냐?"
- 대선을 앞두고 각 후보 캠프로부터 참여 제의를 받지 않았나?
"얼마 전까지 제의가 들어왔고, 앞으로도 제의가 들어올 수 있다. 노무현지지 그룹으로부터 함께 하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한나라당으로부터도 김문수 의원을 통해 노동 분야의 정책을 함께 고민하자는 제의가 왔지만, 거절했다. 김 의원과는 친분이 있지만, 한나라당의 외피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정몽준 진영에서도 요청이 올 것으로 생각하지만, 어떻게 할 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 결국 정계에 진출하는 게 아닌가?
"나는 정치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안 된다. 10년만에 노조에 돌아와 보니 조직력이 굉장히 약화됐다. 조합원들이 노조위원장을 다섯 번 하라고 하면 다시 해야 한다. 더구나 나는 초대 위원장 아니냐? 이 일을 열심히 충실히 할뿐이다."
- '제3노총'의 건설도 주도하고 있는데...
"언론에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더라. 한국노총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한 것을 민주노총이 대행했다. 그래서 민주노총에 주력해왔는데, 10년 사이 상황이 굉장히 변했다. 우리나라도 서구처럼 산별단위로 전국조직이 재편되어야 하는데, 크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나뉘어져야 한다.
나는 지방공기업 노조들과 제휴, 전국적인 연대조직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 5월 대구지역 투자기관노조협의회가 생겼고, 10월에는 대전지역협의회가, 금년내에 경인지역, 부산 지역도 조직이 결성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모여 전국공기업노조협의회가 조만간 결성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