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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진
<월든>으로 널리 알려진 쏘로우(1817~1862)는 "원리없는 생활"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리 대신 진리의 그림자를 숭배하고 목적이 아니고 수단에 불과한 상업, 무역, 공장, 농사 뭐 그런 것들에만 골몰함으로 뒤틀리고 좁아진다. 때문에 우리는 시골뜨기인 것이다"

분명 누구나 자유롭고 아름답게 살도록 세상에 태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쏘로우의 말처럼 목적 아닌 수단에 매몰된 "시골뜨기" 삶을 살다가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삶의 굴레에 매여 정작 자신이 꿈꿔왔던 것들을 잊어버린 채, 마지못해 하루 하루를 견디는 "시골뜨기"말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식의 노예 같은 생활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작품에 나오는 양계장 암탉들의 형편이 그랬다. 그들은 닭장에 갇혀 주인을 위해 알 낳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녕 암탉이라면, 자신이 낳은 알을 품고 거기서 깨어난 병아리들을 키워야할 일이다. 그러나 양계장 암탉들은 이 당연한 일을 감히 꿈꿀 수조차 없었다. 그들의 몸은 알을 낳아 주인에게 건사하는 동안 이미 기계처럼 돼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들 암탉 중에 별종이 하나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잎싹"으로 명명한 꽤 야무진 녀석이다.

"잎싹"은 언제부턴가 양계장 문틈으로 마당을 내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마당에는 수탉과 씨암탉 그리고 오리들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고 양계장에 갇힌 자기네 신세와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이렇게 마당을 내다볼수록, 잎싹도 마당으로 나가 수탉과 거닐면서 자신이 낳은 알을 품어 보고 싶은 소망이 간절해간다. 이런 고민이 깊어가면서 식욕도 없어지고 몸도 허약해져 더 이상 건강한 알을 생산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끝내 쓸모 없는 "폐계"로 분류되어 흙구덩이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지만, 전화위복이라고 잎싹은 오히려 이 때문에 마당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잎싹에게 마당생활은 극히 짧았다. 마당족속들의 텃세와 등쌀이 하도 심해 도저히 배겨날 수 없었던 것이다. 별수 없이 잎싹은 야생 닭으로 살아간다. 집 밖에는 족제비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서 하루도 맘 편히 살만한 곳을 찾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서 잎싹에게 또 하나의 행운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나그네인 청둥오리의 알을 품게 된 일이다. 폐계인 잎싹은 더 이상 알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알을 품어보고 싶었던 그의 꿈은 이렇게 성취될 수 있었다. 나그네 청둥오리는 족제비에게 당해 일찌감치 목숨을 잃었고 잎싹은 청둥오리 새끼를 대신 맡아 키우게 된다.

족제비에게 쫓기며 일정한 거주지도 없이 갈대밭에서 하는 야생 생활은 혹독함 자체였다. 그럼에도, 잎싹은 그 모든 어려움을 뚫고 꿋꿋하게 살아 아기 오리를 공중을 훨훨 나는 청둥오리로 잘도 키워낸다. 그가 처음 품었던 단 한번이라도 마당에 나가 알을 품고 병아리의 탄생을 보고싶다던 꿈은 모두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러기까지 잎싹이 치러야만했던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모두들 자유와 꿈의 성취를 원하지만, 그것을 이루기까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론 연어처럼 물살을 타고 거슬러 올라야 하기 때문에 힘에 부친 나머지 낙오하여 목적지까지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더부살이가 되기에는, 쓸만한 종이나 기계가 되기에는 너무나 고귀하게 태어났으므로"(쏘로우) 평생을 두고 도전해 볼만하지 않는가?

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사계절(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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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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