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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무한궤도 차량에 깔려 여중생 2명이 숨진 사건에 연루된 미군 병사 2명에 대해 미군법정의 배심원단이 무죄평결을 내린 이후 한국내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여론과 함께 격렬한 항의시위가 빈발하고 있다.

27일 아침에는 부시대통령이 허바드 주한 대사를 통해 정중한 유감과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물론 바로 전날밤 텔레비전 3사가 공동중계한 토론회에서 이회창 후보가 부시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발언한지 몇시간뒤에 나온 것이어서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다는 느낌이 들긴했다. 그런데 부시대통령의 사과메시지가 사태를 진정시키고 수습국면을 가져온 것이 아니고 끊는 물에 기름을 끼얹는 반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아직도 부시대통령은 한국민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즉 재발방지의 의지와 방법, 또는 소파개정 등 핵심 이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 면피용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주고 있다. 더욱이 사과의 방식과 형식도 매우 부적절한 느낌을 준다.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하루에도 몇번씩 기자를 접촉하고 있다. 또 백악관 대변인은 일일정례 브리핑을 거르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이 진정으로 한국민들에게 사과와 유감의 뜻을 표하려면, 부시대통령이 직접 발언하거나 또는 백악관 대변인의 공식 논평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재국 대사의 입을 통해 미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도록 소근거리듯이 메시지를 전달한 것은 너무 궁색해 보인다.

게다가 소파협상이 불필요하다는 한국 외무장관의 발언도 국민여론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한 발언이어서 더욱 분노를 증폭시켰다.

이제 양국은 더 이상 주한미군 지위 문제를 미봉책으로 덮어둘 수 없는 시점에 왔다. 53년 전쟁폐허와 국민소득 50불 시대에 맺어진 한국과 미군의 지위를 이제 21세기 탈냉전시대, 1만불 시대에 맞게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특히 미군에 의해 저질러지는 흉악범죄, 비인륜범죄 등 형사범에 대해서는 한국쪽의 적절한 개입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개선될 필요가 있다. 우리 군대가 외국에 주둔할 때의 상황도 가정해서, (사실은 우리나라도 평화유지군 활동을 하고 있다.) 서로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이다.

여중생 참사사건이 시발이 되긴 했지만, 이 문제에 국한하지말고 차기정권에서 주한미군 지위에 대한 전반적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대선 후보들도 이 이슈에 관한 전반적인 공약을 제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한가지 짚고 싶은 것은 미국쪽의 인식이다. 얼마전 소파개정 협상시 형사사건에 대한 한국정부의 관할권을 주장했을 때 미국은 자국의 사법제도의 우수성을 암시하고, 한국 사법제도를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을 표명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미국쪽은 비슷한 인식을 보인 바 있다.

즉 미국재판절차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사법문화의 차이점을 강조한다. 배심원 제도가 없는 한국사법절차에 관한 의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배심원 평결후 나온 주한미군 사령관의 논평에서도 재판이 공개적으로 그리고 공정하게 이루어 졌다는 점을 유달리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사법절차, 또는 배심원 절차가 갖는 부작용이 많은 것은 미국사회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오 제이 심슨 사건이었다. 온 미국이 떠들석했던 이 사건은 결국 심슨의 무죄로 끝나 미국사법절차에 관해 황당한 느낌을 주었다. 죽은 사람도 있고, 살인현장에서 빠져나온 사람도 있는데, 정작 범인은 없다. 투명인간일까. 재판과정에서 심슨 변호인단이 구사했다는 소위 인종카드(racial card)는 재판후 심슨 수석 변호사의 고백에 의해 미국사회의 치부에 대한 고백으로 받아들여졌다.

백인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흑인 영웅이 소수민족 문제를 고리로 무죄평결을 받은 심슨사건과 정반대되는 상황을 다룬 영화도 있다. 몇 년 전 흑인배우 사무엘 잭슨이 주연한 <타임투킬>(A time to kill)이 그것이다.

1960년대 남부 조지아주의 한적한 도시에서 12살짜리 흑인 여자아이가 술취한 두명의 백인 남성에 의해 폭행, 강간당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범인들은 당당하고 피해자 어린이가 오히려 죄를 뒤집어쓰는 상황이 전개된다. 좌절하고, 분노한 어린이의 아버지(사무엘 잭슨 분)는 재판을 받는 2명을 사살하고 자신이 거꾸로 살인범으로 재판정에 서게된다. 이때 백인 변호사(매뉴 매커너히 분)가 변론을 맡아 무죄를 끌어내는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도 배심원 문제가 심각하게 나온다. 미국 변호사들도 사건을 맡게 되면 배심원 구성을 좋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예를 들어 백인 지역에서 흑인이 재판을 받으면 매우 불리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배심원 구성이 유리한 조건을 만들려고 머리를 짜내게 된다.

여중생 사망사건을 다룬 이번 배심원들도 전원 미군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이 재판은 공정하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영어에 있는 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인간사회의 영원한 진리다. 같은 미군끼리 동료의 살인사건에 대한 재판을 어떻게 공정하게 진행할 수 있겠는가?

영화속에서 백인이 다수인 배심원을 설득하기 위해 변호사는 고심을 거듭한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변론때, 그는 배심원들에게 눈을 감아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한 소녀를 건장한 2명의 청년이 폭행하는 장면을 포함한 범죄현장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설명을 듣고 있는 사이 배심원들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고 훌쩍거린다. 그리고 변호사는 이렇게 그의 변론을 끝맺는다.

“바로 이 불쌍한 어린 여자아이가 바로 여러분의 딸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배심원들이 피해자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백인이 흑인을 폭행한 것은 범죄가 아니거나 혹은 흑인이 범행을 유도했다는 편견이 생기기 전에 인간대 인간의 순수한 감정이 생기도록 유도했고, 마침내 백인 범인을 사실한 흑인 아버지에 대해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무죄를 평결한다.

미국은 겸손할 필요가 있다. 사법절차나 법문화를 논하기보다는 마음의 거리를 가깝게 해야 한다. 역지사지해야 한다. 그것이 문제해결의 첫출발이 될 것이다. 피부의 차이가 마음의 벽을 쌓을 수 있는 것처럼, 한국과 미국사이에도 마음이 통해야 한다. 한국민들은 소박하고, 감동할 줄 아는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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