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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자들에게 11월은 세상 떠난 이들을 더 많이 생각하는 달이다. 이름하여 '위령의 달'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위령성월(慰靈聖月)'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 지금은 위령의 달이라는 말이 좀더 보편적이고, 그게 더 자연스러운 말인 것 같다.
'위령'이란 말 그대로 저승의 영혼들을 위로하고 위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세상 떠난 이들을 생각하고 '돌보는' 일을 이름이다.
나는 위령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그 의미심장함을 참으로 소중하게 생각한다. 세상 떠난 이들을 생각하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영혼을 위로하고 위한다는 것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상 떠난 이의 영혼을 돌본다는 것에는 생각이나 마음과 함께 어떤 행위까지 포함된다. 그리하여 이 돌본다는 것은 곧바로 구체성과 적극성을 지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이승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저승에 간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저승 삶을 돕고 돌본다는 것,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더 없는 다행으로 여긴다. 그것에서 무한한 아름다움과 함께 크나큰 희망을 얻는다.
천주교 신자들의 위령은 우리의 재래적 풍습인 제사와는 성격이 다르다. 세상 떠난 이를 생각하고 위한다는 것은 같지만, 그리고 제사는 그것으로 끝이지만, 천주교 신자들의 위령은 이승 삶과 저승 삶의 '통공(通功)'을 전제로 한다. 이승의 사람들이 이승에서 이루는 공을 저승의 영혼들에게 돌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자신의 기원과 공으로 저승의 영혼들을 돕고 돌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위령이니, 그것은 큰사랑의 나눔이며 신앙의 꽃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위령의 기도나 행위 속에 깃들여 있는 사랑의 정신을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하게 본다. 특히 11월 위령의 달에 적극적으로 위령을 실천하는 이들을 보면, 그 대상이 자신의 부모나 가족, 친지들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이승에서의 인연에 따라 위령을 실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는 것이다.
위령을 실천하는 일로 대표적인 것은 미사를 봉헌하는 일이다. 자신의 마음과 공의 표시인 '예물'을 교회에 바치며 위령미사를 신청하면, 사제는 위령의 대상인 그 영혼을 위해 미사를 지내게 된다.
하느님을 믿고 살다가 죽은 이의 경우 그 믿음의 보람으로 이미 천국에 들었을 텐데 그에게 위령이라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이나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사후세계를 천당과 지옥만으로, 이분법적으로 가르고 '믿음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런 견해가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죽은 후 곧바로 천국에 가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무리 열심히 하느님을 믿고 구원을 추구하며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내 목표일뿐이지 내가 함부로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은 후 곧바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지고지선한 사람은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처절하고 참혹하기 짝이 없는 고통을 치르며 죽음의 강을 건너간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며 내 믿음의 목표인 천국에 간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임을 절감한 적이 있다. 박해가 없는 이 시대에는 스스로 나를 죽이며 순교자와 같은 자세로 살아야 함도 절감하였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 누구도 죽은 후 곧바로 천국에 가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은, 사후세계에는 구원의 문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 있다는 믿음과 연결된다. 사후세계의 그 과정은 천주교회에서 '연옥'이라는 명칭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연옥은 '단련교회'라는 말로도 불리는데, 그것은 천상교회(천국), 지상교회와 함께 이승과 저승의 통공이 이루어지는 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연옥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께서 이승을 떠나온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이분법적으로 두부 모 자르듯이 양편을 갈라 한쪽은 모조리 천국으로 보내고 한쪽은 모조리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그런 몰인정한 분은 아니시리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그러니까 천주교 신자들의 위령 실천은 사후세계의 하나인 연옥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며,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장 무력한 존재인 연옥 영혼들을 돕기 위한 것이 된다.
그 누구도 죽은 후 곧바로 천국에 가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말은, 그 누구도 죽은 후 곧바로 지옥에 가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말과도 통한다. 죽은 후 곧바로 지옥에 떨어지리만큼 절대적인 악인은 이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승에서 구원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듯이 저승의 많은 영혼들에게도 이승과의 통공의 기회는 늘 주어져 있을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착하고 의롭게 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내게도 죽은 후 곧바로 천국에 간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죽은 후 곧바로 지옥에 가지는 않으리라는 희망도 함께 싸안고 있다. 어쩌면 내가 추구하고 목표하는 것은 구원의 문에 이를 수 있는 사후세계의 과정인 연옥일는지도 모른다. 연옥에만이라도 들게 되기를…. 그리하여 그 연옥에서 이승의 인연붙이들과 지상교회로부터 오는 통공의 은덕을 소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한번은 세상을 떠난 사제의 영혼을 위해 위령기도를 바치면서 혼자 속으로 감동을 한 적이 있다. 육신을 버리고 평생을 하느님께 바치고 산 사제에게도 위령기도가 필요하고 해당된다는 사실은 내게 많은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신부나 주교가 이승을 떠나도 그의 영혼을 위해 위령기도를 하고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위령 행위 속에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고,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교 신자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도 내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었다고 해서 곧바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이 믿음 속에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무조건 모두 지옥에 가는 건 아니리라는 믿음도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하느님을 믿는 것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대적 조건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신앙이 나를 더욱 착하게 살도록 유인해 주며, 참된 신앙생활은 하늘에 공덕을 쌓는 일임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의인은 있는 법이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 중에도 의인이 있고, 많을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의 의로움이란 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일 테니 말이다.
물론 '믿음 천국, 불신 지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나의 이런 말은 천부당만부당한 요설이고, 하느님을 능멸하는 패악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성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다음의 말씀들을 제시하며 답변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복음 14장 6절, 공동번역)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공동번역)
위에 적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고, 아래에 적은 말은 예수의 으뜸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한 말이다.
성서에 기록된 이 말씀은 거룩한 진리이며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누구나 반드시 믿어야 할 사항이다. 하지만 이 성서 말씀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뜻까지 포유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성서 말씀들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태어나 세상을 살고 간 무수한 사람들, 그리스도교 신앙이 마치지 않은 곳에서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가?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누구 탓인가? 때와 장소를 잘못 택한(?) 자신 탓인가?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라고 니케아 사도신경은 전한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다. 하느님은 사랑의 신이고 자비의 신이시다.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표현된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과 구원 계획은 거대한 신비이다. 그 신비 안에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심오한 온갖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그 장치들은 그리스도교 신비체 안에서 여러 가지 계시와 성령의 감도를 통해 제시되기도 한다.
위에 적은 그 성서 말씀들은,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관문이라는 사실은 이 세상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관문은 저 사후세계의 영혼들까지 포괄한다. 구원의 신비는 참으로 무한하며,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마련된 이승과 저승 사이의 통공의 신비를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11월 위령의 달을 사는 내 생활 속의 소중한 것들, 이런저런 위령 행위들을 소박하게 소개하려는 것이 처음의 의도였다.
그런데 '위령'이라는 단어부터 내게 많은 고심을 안겨 주었다. 내 글에 독자들의 여러 가지 종교적 관점들이 결부되리라는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해말 '불자들의 예수 성탄 축하를 다시 접하며'라는 글을 썼을 때 내게 쏟아진 수많은 '독자의견'들을 상기하자니 아직 '빚'을 해결하지 못한 듯싶은 부담감도 꽤 컸다. 그걸 의식하므로 글이 이렇게 발전한 것 같다.
어제는 성당에서 모임을 마친 할머니들을 내 차에 태우고 우리 교회의 공동묘지엘 갔다. 내가 12인승 승합차를 가지고 있는 덕에 또 한번 얻게 된 봉사 기회였다. 현재 80여 기의 묘들이 있는 우리 교회의 공동묘지엔 미사를 지낼 수 있는 공터가 있고 그 공터 한편엔 마른 잔디가 방석처럼 깔려 있었다. 할머니들은 그 잔디 위에 앉아서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했다. 얼마 전에 또 친구 한 명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할머니들, 이미 황혼빛깔이 고즈넉하게 물들어 있는 노인들이 공동묘지 앞에 모여 앉아 먼저 간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내게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심회를 안겨 주었다. 그 할머니들 중에는 팔순이 다 되신 내 어머니도 계셨고….
나는 아버지께 가서 절을 올리고 나서 주변의 묘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묘비들 중에는 이름 옆에 영세명이 새겨져 있지 않은 비석들도 많았다. 비신자로 살다가 죽어 다른 곳에 묻혔다가 배우자가 죽은 다음 신자인 그 배우자 덕에 합장으로 천주교회의 공동묘지 안에 자리하게 된 이들이었다. 나는 천주교회 공동묘지 안에 영세명이 새겨지지 않은 묘비들이 많은 사실, 그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위령기도를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스럽고 기분 좋을 수 없었다.
일년을 사는 동안 위령미사를 꽤 많이 봉헌한다. 조상들을 위한 미사도 설날과 추석과 위령의 달에, 일년에 세 번은 지내게 된다. 그때마다 모든 조상님들이 저 사후세계에서 지금 이승에 머무르고 있는 자손 덕을 많이 보시리라는 생각을 즐겁게 하곤 한다. 일찍이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그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나라에서 효자 열부로 추증하여 정려문까지 세워주었던 내 팔대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조리 지옥에 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은 11월의 마지막 주간 금요일이다. 우리 성당에서는 11월의 마지막 '평일미사'가 저녁에 있는 날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오늘 도합 열 명의 영혼들을 위해 위령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다. 미리 준비해 놓은 두 개의 예물봉투에는 열 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중에서 네 명의 이름은 세례명이 아니다. 다시 말해 천주교 신자로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그 중에서 한 명은 지난여름 내 당질이 운명했을 때 장례를 적극 돌보아주고 한 달쯤 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당질 친구이고, 다른 한 명은 나로 하여금 군대내 의문사 문제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고 강의택 하사이다.
한 세상을 살면서 먼저 이승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더욱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는 것은, 우선 내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일 것이다.
위령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한가지 생각하는 것이 있다. 언젠가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위령미사를 봉헌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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