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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대학을 ‘상아탑(象牙塔)’이란 말 대신에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렀다. 해마다 대학 등록 때면 가난한 농사꾼들은 문전옥답은 물론 재산 목록 제1호인 소까지 내다 팔아 자식 등록금을 마련했기 때문에 붙은 말이다. 나도 대학생활 8학기 동안 쉽게 등록한 적이 거의 없었다. 방학 때 집에 내려가면 아버지는 우스갯소리로 “‘세금쟁이가 범보다 더 무섭다’고 했는데, 나는 세금쟁이보다 네가 더 무섭다”고 했다.

나는 고교시절 집안형편으로 1년을 쉰 까닭에 대학만은 곧장 졸업하고 싶었다. 대체로 학업 중단 사유는 군 입대 때문이었는데, 어쨌든 한번 중단하면 다시 복교하기 힘들지 모른다는 중압감과 사병으로 입대하면 매 맞고 매달 집에서 용돈을 갖다 써야 한다는 말도 선뜻 입대를 망설이게 했다. 그래서 입학 후, 계속 입영연기원을 내면서 학교도 줄곧 마칠 수 있고 집엣돈도 갖다쓰지 않을 수 있는 학군단에 입단하고자 했다.

그런데 2학년 1학기 1차 등록 마감 전날까지 등록을 못했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에게 알려보았자 가슴앓이만 할 것 같아서 서울에서 몇 곳을 알아보았으나 갑자기 큰돈을 구할 수 없었다. 1차 등록을 해야 입영 연기원을 낼 수 있었다. 학생처에 가서 사정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맥이 풀린 채 본관을 벗어나는데 그 날이 등록 마감 날이라서 경리과 창구에 늘어선 학생들의 행렬이 본관 앞 미루나무까지 서 있었다.

나는 거기에 서 있는 고교동창 윤기호군을 발견하고 대뜸 그에게 다가가 내 처지를 말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선뜻 “그래, 난 2차 때 등록할 테니 내 돈으로 등록해”하면서 자리까지 양보해 주었다. 나는 기호 자리에서 곧 등록을 마치고 학생처로 가서 연기원을 내었다. 나는 그 친구의 도움으로 줄곧 대학을 마칠 수 있었고, 학군단 장교로 임관했다. 사실 나와 기호는 고교시절 별로 친하지 않았다. 그는 밴드부원으로 고교 3년동안 내내 호른을 불었다. 서로 얼굴과 이름만 알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무슨 낯으로 그에게 다가가 염치없는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몇 해 전,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어머니 빈소에 문상 갔다가 마당발인 그에게 기호의 소식을 들었다.
“기호 말이야, 별난 친구야. 자기가 다니던 대학도 중퇴하고 양천 구청에서 기사로 일하고 있어. 요새 늦바람이 나서 뒤늦게 방송대에 다닌대.”

나는 그 말에 뜨끔했다. 그동안 나의 무관심과 배은망덕이 미워졌다. 며칠 후, 셋이 만났다. 내가 그를 집으로 초대하여 소찬을 베풀며 지난날의 고마움을 뒤늦게 전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 그때 네 표정이 무척 절박해 보였어. 네가 며칠 후 준 돈으로 2차 등록했는데 뭘. 나는 다음 학기에 군대에 입대해서 3년 후 제대하니까 괜히 복학하기가 싫더라….”

그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둔 가장이었다. 다른 친구보다 10년 이상 늦은 결혼이었다.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많은 곡절이 있었음을 어림할 수 있었다.

세상에 친구는 많지만 가장 참다운 친구는 내가 어려울 때 도와준 친구다. “참다운 친구는 고생할 때 친구다”라는 말은 만고불변의 명언이다. 내 인생에 가장 어려웠던 고교 시절에 진심으로 도와주었던 그리운 친구의 이름을 불러본다. 내 어찌 이 세상에서 그들의 우정에 보답하랴. 양철웅, 이건규, 한의수, 구본우, 노진덕, 이용호, 염동연 …. 목이 잘려도 한이 없을 친구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박도 기자의 <샘물 같은 사람>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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