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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0년 전의 일이라 나는 그의 본명은 잊고 다만 '왕눈이'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때 그는 우리 신문배달원들에게 왕눈이로 통해서 본명이 별로 불려지지 않은 탓도 있다. 그는 눈이 유난히 크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기관차'였다. 그는 보급소에서 신문을 받아 옆구리에 끼고 나서면 배달구역 끝 독자 집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 보통 배달원이 두 시간 정도 걸릴 거리를 그는 한 시간이면 족했다.
그 무렵 신문은 요즘과는 달리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두 번이나 발간되었다. 신문의 생명은 신속이다. 조간은 조간대로, 석간은 석간대로 빨리 배달해야 한다. 배달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독자들의 성화가 대단하다. 다른 신문보다 늦거나 배달사고가 나면 구독자가 떨어졌다.
그때는 통행금지라는 게 있었다. 밤 12시부터 이튿날 4시까지는 다닐 수 없었다. 하지만 조간 배달에는 새벽 4시 50분까지는 보급소로 가야 했다. 그 시간을 어기면 소장이나 총무로부터 심한 꾸중을 듣고 벌금까지 무는 규정도 있었다.
우리 집에는 시계가 없어서 배달생활 초기에는 시간 맞추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다행히 새벽 4시면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나 교회와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집을 나섰다. 어느 하루는 잠결에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후딱 옷을 입고 보급소로 뛰었다. 방범대원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내 앞길을 막았다.
"야, 어디 가!"
"보급소로 갑니다."
"임마, 조금 전에 통금 사이렌이 울렸어. 빨리 집으로 돌아가!"
"어 … 죄송합니다."
또 때때로 한밤중에 일어날 때면 시간을 몰라 애를 태웠다. 이웃집 괘종시계에 귀를 기울였지만 한 번만 칠 때는 한 시인지, 세 시 삼십 분인지 분간을 못해 비몽사몽간 삼십 분을 기다리기도 하고, 창문을 열고 어머니와 밤하늘의 달이나 별을 보면서 시간을 가늠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신문배달 생활이 차차 몸에 익어지자 눈만 뜨면 4시 10분전으로, 옷을 챙겨 입고 통금해제 사이렌에 맞춰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새벽길은 조용하고 상큼했다. 통금이 갓 풀린 거리는 가로등만 졸고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이따금 신문배달원이나 우유배달원, 두부장수만이 바삐 지날 뿐이었다. 도시는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 시간에는 차도 드물어 나는 도시의 주인이 된 기분으로, 종로 광화문 넓은 길을 활개치면서 달렸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보급소로 가서 신문을 받아 옆구리에 끼자마자 배달구역으로 줄달음질이었다. 신문배달은 시내버스 노선처럼 차례가 정해져 있었다. 첫 집부터 끝 집까지 정신 바짝 차리고 돌려야 한다. 배달이 끝난 후, 간혹 신문이 한두 부 남으면 어느 집을 빠뜨렸는지 한참 헤매야 한다. 그래서 처음 배달을 시작할 때는 대문에다 분필로 순서대로 'ㄱ1, ㄱ2…'와 같은 걸 써두었다.
대문 틈으로 신문을 넣으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상큼했다. 좁은 문틈으로 신문을 재빨리 넣는 것도 솜씨다. 말로는 터득되지 않고 세월이 말해 준다. 담 너머로 던지는 솜씨도 마찬가지다. 배달 초기에는 고참들의 재빠른 솜씨에 탄복했는데, 나도 세월이 지나자 그들 못지 않게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도 축대 위에서 대문 안으로 던질 수 있었고, 담 너머로 정확히 사뿐하게 대청마루까지도 날릴 수 있었다. 신문을 가지런히 추리거나 부수를 정확히 빨리 헤아리는 솜씨도 밥그릇 수에 비례했다.
나의 신문배달 첫 구역은 경향신문 가회동·삼청동이었다. 이 지역은 지대가 높았다. 어떤 집은 계단을 스무남은 개 올라야 했고, 한 집 때문에 삼청공원 들머리까지 오백여 미터는 가야했다. 그러나 이 구역은 그 무렵 유명인사와 부자들이 많이 살아서 보급소에서는 에이급으로 쳤다. 그것은 수금 실적으로 판가름했다.
신문배달원이면 수입이 똑같은 줄 알았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월급제가 아니고 부수에 따른 수당제였다. 월말에 수금하여 먼저 일정액을 보급소에 넣고 남은 돈이 배달원 몫이었다. 나는 60여 부를 배달했는데 다른 신문에 견주면 구역은 두 배나 넓었지만 수입은 삼분의 일도 안 되었다.
그 무렵 경향신문은 4·19 혁명 덕분으로 복간되어 잠시 인기를 누리다가 5·16 쿠데타로 장면 정권이 무너지자 독자가 폴싹 줄었다. 지역 주민들도 신문의 인기에 따라 배달원을 대하는 것 같아 속이 몹시 상했다. 그 때에는 동아일보 배달원 수입이 제일 많았고, 다음이 조선일보 한국일보 순서였다. 나는 동아나 조선 배달원이 몹시 부러웠다.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배달원들은 경쟁자이지만, 서로 알고 지냈다. 어느 날 김대식이란 동아일보 계동 배달원에게 배달 자리를 부탁하자 그는 대뜸 학교 다니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은 휴학 중으로 안 다닌다고 했더니, 자기네 보급소에서는 학생만 배달원으로 쓴다고 했다. 그 말이 송곳에 찔리듯 아팠다. 그는 시무룩히 돌아서는 내가 측은하게 보였던지, 지금은 자리도 없고 네가 학교에 다니게 되면 꼭 알아봐 주겠다고 선심 쓰듯 위로했다.
어느 날 새벽 신문을 돌리다가 조선일보 배달원 왕눈이에게 멱살을 잡혔다. 그는 별명대로 눈이 크고 우락부락 험한 인상이었다.
"야! 경향, 너 이 새끼! 싫다는 집에 왜 신문을 넣어! 너 때문에 내가 신문을 못 넣잖아. 한 번만 더 넣으면 네 꼴통 까버릴 테다."
경무대 똥 푸는 지게꾼이 동업자 앞에서 으스대는 일은 그 세계만이 아니었다. 한 독자 집에 수금 갔더니, 다른 신문 보겠다면서 그만 넣으라고 했지만, 신문을 남길 수 없어서 계속 넣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독자들의 그런 요구를 다 들어주면 10여부 이상 줄어들 판이라 어쩔 수 없이 넣었다. 보급소에서도 호락호락 부수를 줄여주지 않을 뿐더러, 쥐꼬리만한 배달수입도 팍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그가 다시 불렀다.
"야, 경향. 너, 내 보조할 생각 없냐? 내 보조하다가 우리 보급소에 자리 나면 네가 꿰차고. 너 지금 수입보다는 내가 더 줄 테니."
나는 수입이 더 나은 곳으로 옮기려던 참이라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내 자리를 다른 아이에게 인계한 후 마침내 왕눈이의 보조 배달원이 되었다. 보조는 신문뭉치를 들고 사수를 따라 다니면서 그가 시키는 대로 신문을 돌리는 일이다. 독자 집이 다 익으면 사수는 큰길에서 서 있고, 보조는 골목골목을 배달하거나 두 사람이 분담하여 한 사람은 역순으로 배달하면 일찍 마칠 수 있었다.
왕눈이는 소문대로 기관차였다. 그때는 나도 신문배달에 이력이 났지만 그를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석간 배달 중, 중앙학교 앞 찐빵 가게를 지날 때면 그는 한꺼번에 열 개나 후딱 먹어치웠다. 왕눈이는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인정이 많았다. 내가 찐빵을 몇 개 먹든 상관치 않고 값을 치렀다. 그는 아침 배달이 끝나면 구두통을 메고 명동으로 갔다.
어느 날 배달 중, 내가 독자 집 한문 문패를 거의 다 읽자 그는 왕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새끼, 너 먹물 좀 들었군. 어느 학교 다녔어?"
"ㅈ고교."
"퇴학 맞았냐?"
"아니, 등록금이 밀려서 그만뒀어."
"씨팔 돈이 뭔지. 나도 시골에서 중학교 다니다 때려치우고 서울로 튀었어."
"학교 다녀?"
"……."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난 책만 보면 뒷골이 댕겨."
내가 배달 구역에 완전히 익어지자 왕눈이는 조간 때만 드문드문 나왔다. 석간 때는 아예 꼴을 볼 수 없었다. 닷새만에 나온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자기 대신 구역을 맡으라고 했다.
"마침 빌딩 하나를 잡았어. 요즘 거기 일만 해도 벅차. 이 달 입금하고 남는 돈 너 다 가져. 내년 봄에 꼭 복학해라."
"고마워."
"자식, 고맙긴. 이게 뭐 대단한 자리라고."
"그래도 나한테는…."
"명동에 오거든 꼭 들려. 국립극장 앞 닦새들에게 왕눈이를 물으면 가르쳐줄 거야."
그 날 후, 나는 여태 그를 만나지 못했다. 몇 번이나 명동을 지나쳐도 틈내어 왕눈이를 찾아보지 못했다.
나는 교만하고 영악한 사람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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