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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눈이 덕에 가장 가고싶어 했던 동아일보에는 못 갔지만, 그래도 부수가 다음으로 많은 조선일보로 옮기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조선일보 안국동보급소는 도렴동으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부근에 있었다. 그 보급소는 조선일보와 영자신문인 코리아 리프블릭(지금의 The Korea Herald) 지를 함께 취급했다. 두 신문을 합하니 200여 부가 조금 넘었다. 그때 영자신문은 접지되지 않고 전지로 보급소에 왔다. 그래서 배달원들이 손으로 일일이 접어야 했다. 보급소가 비좁아 새벽마다 길바닥에서 접었는데 바람이 불거나 겨울철에는 손이 곱아서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영자신문은 수금이 잘 돼서 좋았다.

나의 배달 구역 첫 집은 계동 들머리 계산약국이었다. 그곳에서 시작하여 휘문, 대동, 중앙학교로 거슬러 올라가서 원서동 고개를 넘어 다시 아래로 내려와서 창덕궁 사무실에 영자신문을 넣으면 끝이었다. 조간 배달이 끝나면 곧장 창덕궁 숲으로 들어가서 맑은 개울물에 세수도 하고 가을철이면 산책길에 알밤도 주웠다. 그럴 때면 왕족이나 된 기분이었다.

조간 배달을 마치고 아침을 먹은 다음, 별일 없으면 구역으로 나갔다. 수금도 하고 새 독자를 만들기 위해 구역을 맴돌았다. 찐빵 가게를 지날 때면 주인이 놀다가라고 붙잡았다. 그 가게는 중앙학교 정문에서 일 백 미터 못 미처 오른 편 우물이 있는 빈터에다가 남의 집 처마에 잇대어 포장을 친 가게였다.

주인은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은 경북 상주 출신의 김무웅씨였다. 그는 손수 찐빵을 만들어 팔았는데 값이 무척 쌌다. 주된 손님은 계동 주민보다 양은장수 채소장수나 막일꾼 등 떠돌이들이 더 많았다. 그는 찐빵을 만들면서 곧잘 육자배기도 흥얼거렸고, 때로는 시집이나 소설책도 펼쳤다. 김씨는 붙임성이 좋아서 이웃 주민만 아니라, 가게 앞으로 지나는 장사꾼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냈다.

왕눈이는 이 가게에다가 신문을 넣고 신문 값은 빵으로 셈했는데, 하도 많이 먹어서 며칠에 한 번씩은 밀린 빵 값을 현금으로 치렀다. 나도 어차피 남는 신문이라 신문 값만큼만 빵을 먹었다. 나는 신문 값 이상 빵을 먹지 않자, 김씨는 그런 낌새를 알았는지 이따금 돈 안 받는다면서 몇 개씩 거저 주기도 했다. 김씨와 매일 얼굴이 마주치자 친해져서 서로 속 깊은 얘기까지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석간배달을 마치고 가게 의자에서 놀고 있는데 허리가 구십 도나 꺾어지고 치아가 하나도 없는 고부랑 할머니가 김씨를 찾아왔다.
"이봐, 김씨. 우리 건넌방 사글세 좀 놔 줘."
"예, 찾는 사람 있으면 데리고 가지요."
할머니는 복덕방 구전이라도 아낄 양 김씨에게 부탁했다. 김씨는 이따금 그런 일도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할머니에게 보증금과 월세를 물었더니 무척 값이 쌌다. 곧장 할머니를 따라갔더니 중앙학교 오른편 주택가로 허름한 함석집이었다.

그때까지 우리 식구는 가회동에서 살았는데 말이 아니었다. 내 입학금을 빌린 것을 갚지 못해 전세금에서 공제한 후, 사글세로 돌렸지만 다달이 방세를 한 번도 못 줬다. 이미 보증금까지 다 까먹었지만 주인은 대놓고 나가달라고는 않고 눈치만 살폈다. 그런 형편이니 늘 바늘방석에 앉아 사는 심정이었다.

그 날 저녁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자 당장이라도 이사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보증금이 문제였다. 이튿날 조간배달 길에 할머니를 찾아뵙고 우리 집 형편을 얘기하자, 우선 이사 온 다음 보증금은 마련되는 대로 내라고 했다. 그 날로 이사를 했다. 이사 짐이라야 이불과 밥솥 따위라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나는 등짐으로 두 차례만에 다 날랐다. 할머니 집은 워낙 낡아서 퀴퀴한 냄새도 나고 쥐들도 들끓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어머니도 무척 좋아했다. 그 날 밤, 나는 가회동 집으로 인사를 갔다. 주인아주머니는 무척 반가워하면서 굳이 안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내가 내쫓은 것 같아서 떠난 후 내내 마음이 아팠는데 학생이 일부로 찾아와서 인사까지 하니 이제 내 마음이 편해요. 우리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고 했어요. 지난 일 섭섭해하지 말고 자주 놀러와요."
과일에 차까지 대접받고 돌아왔다.

계동으로 이사 온 후, 아버지는 많은 충격을 받으신 듯 당신의 근거지였던 부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날마다 배달 길에 만나는 두부장수는 이따금 신문과 비지덩이를 맞바꿨다. 그런 날 반찬은 비지찌개였다.

어느 날 빵집 김씨가 자기 가게를 맡으라고 했다. 당신은 역마살이 끼었는지 이태나 이 자리에서 붙박이로 지내자 몸이 쑤신다고 했다. 당신은 빵 가게를 하기 전에는 엿장수를 했는데, 이번에는 양은장사를 한번 해 볼 작정이라고 했다. 그때 어머니는 바느질감이 별로 없어서 노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에게 상의했더니 한번 해보자고 했다. 김씨는 반죽하는 법과 빵 만드는 기술뿐 아니라, 빵 찌는 솥과 나무의자와 모든 기구를 돈 한 푼 받지 않고 물려준 후 훌훌 떠났다. 나는 배달이 끝나면 가게 일을 도왔다. 돈이 제법 모였다. 집세 보증금도 내고 새 학기 등록금도 마련했다.

부산으로 내려간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왔다. 과거는 모두 잊어버리고 새 인생을 산다는 각오로 헌 신문지로 과수원 배 봉지와 재단소에서 자투리로 나오는 크라프트 종이로 수화물 꼬리표를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면서 어머니와 동생을 불렀다. 어머니와 동생이 부산으로 내려가자 나만 남았다. 나도 곧 학교도 다녀야 하기에 도저히 빵 가게는 할 수 없어서 수소문 끝에 김씨에게 연락하여 가게를 정리했다.

계동 할머니는 혼자된 딸과 함께 살았는데 외손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 할머니는 내게 진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어머니가 떠난 후 혼자 지내게 되자 할머니는 아침마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면 연탄 불 위에는 늘 세숫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올려두고 기다렸다.

이듬해 봄 내가 복학을 하자 아침에는 늘 시간에 쫓겼다. 조간 배달 후 밥을 해먹고 가자면 밥을 못 먹을 때가 더 많았다. 그걸 알고 할머니는 새벽에 배달 나가기 전에 밥솥을 쪽마루에 내놓으라고 했다. 괜찮다고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면 부뚜막에는 따뜻한 밥과 찌개가 놓여있었다.

할머니는 나만 보면 늘 합죽 웃으며 반가워하는 눈빛이 철철 넘쳤다. 이따금 내 방으로 와서 등을 두드리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군것질할 것을 두고 갔다. 당신 외손자보다 더 귀여워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잠시도 앉아 있지 않고 집 안팎을 쓸고 닦았다. 틈만 나면 6·25 전쟁 얘기를 했다. 전쟁 중에 당신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그냥 그 집에서 살았는데 9·28 수복 직전에는 미군 쌕쌕이가 몇 날 며칠동안 밤낮으로 폭탄을 들이 부었다고 몸서리치면서 그때 아들을 모두 잃었다고 했다. 아들을 잃었다고 했지 죽었다고 말씀하지 않는 걸로 미루어 북으로 간 걸로 짐작했으나, 그 말씀만은 끝내 하지 않았다.

뒷날 내가 그 계동 집을 찾았을 때 할머니는 돌아가셨다고 따님이 전했다. 나는 그 할머니에게 일방으로 많은 사랑만 받고 생전에 쇠고기 한 근 사드리지 못한 게 못내 죄스럽다.
"학상, 학상. 꼭 성공할거야."
그 성공이 무엇을 말함인지 잘 모르겠으나 고부랑 계동 할머니의 그 따뜻한 목소리가 그립다. 저 세상에서나 만날 수 있을는지.

그때는 가난했지만 나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나날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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