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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에 하나의 촛불로 일렁이고 싶어서 아이들 데리고 나왔어요." 하얀 입김을 내뿜는 아이의 손에 번데기가 담긴 종이컵을 건네던 이현애(34, 주부)씨는 마치 시구(詩句)를 외듯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인천에서도 계속 집회에 나갔었어요. 아이들과 인터넷에 올라오는 (반미관련) 사진도 같이 보구요." 이현애씨 부부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과 함께 14일 서울 시청에서 열리는 촛불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인천에서 올라왔다.

 

먼 길을 이끌려 온 중기(인천서면초교 3년)와 원기(인천서면초교 2년)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기자에게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더니 한마디를 쏟아놓고 끝내 아빠에게로 달려가 버렸다. "부시는 나쁜 사람이야!"지난 14일 오후 3시, 시청 앞에서 열린 '여중생 추모집회'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아이들을 앞세운 가족단위의 참가자와 교복을 입은 앳된 학생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10만이 모인다는 혼잡한 반미집회에 아직 초등학교도 가지 않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10대 제자들과 교사들의 생각은 어떨까.

 

인천남동중학교 한문교사인 이제은(33)씨는 전교조 홈페이지에서 미선이·효순이 공동수업지도안과 동영상을 다운받았다. 교과시간을 이용해 3학년들을 대상으로 훈화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인천에도 미군부대가 있고, 너희들도 언제든지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특히 강조했다"는 이제은씨는 수업말미에 "촛불시위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미국상품불매운동"을 빠뜨리지 않고 당부했다.

 

이제은씨는 "이맘때면 중학교는 끝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평소 (3학년은) 수업자체가 어려운데 공동수업은 교사생활 중 가장 진지한 수업이었다"고 학생들의 높은 관심을 설명했다.

 

도덕선생님의 말씀 덕분에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임지애(신목중 3년)양은 함께 나온 친구들과 이구동성으로 "콜라는 815만 먹고, 삼각김밥이랑 순대 먹어야 되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미선이와 효순이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글썽이더니 다시 씩씩한 표정으로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서울 성남고 학생회장인 김대윤(18)군은 "오늘의 시위는 억압하는 자 <미국>을 향한 억압받는 자 <비미국인들>의 분노의 표출"이라고 이날 집회의 의미를 되새겼다. 김군은 '미국인들이여, 우리를 물로 보지 마라'고 적힌 피켓을 흔들어 보이며 "이것이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라고 잘라 말했다.

 

오후 4시 30분, 가수 신해철씨가 무대에 올랐다. 신씨가 '양키 고 홈'을 외치자 시청 앞은 일순간 분노한 함성에 휩싸였다. 아이를 무등 태운 아빠도, 옷으로 보듬어 안은 엄마도 그 순간만큼은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있었다. '양키 고 홈'이라고.

 

그 끝자락에 아들 상윤이(초등 3년)의 어깨를 짚고 섰던 오희용씨(38, 회사원)는 "억울하게 죽은 두 아이의 진실을 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아이와 함께 집회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다.

 

이날 집회에서는 영유아 교육의 주체인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에 속한 10여 개의 공동육아 어린이집 아이들과 부모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운영위원장 양용준(안양의왕 하늘땅 어린이집)씨는 "공동육아의 공공성에 비추어볼 때 올바른 교육은 올바른 사회 위에서 이룩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데 동참하기 위해 참가했다"고 참가배경을 밝혔다.

 

양씨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어릴 때부터 체험하게 함으로써 미국문제를 바로 보는 시각을 기를 수 있는 교육적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이며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줄잡아 100명 이상이 참석했다"고 알렸다.

 

아들을 데리고 15년 전 민주화를 외쳤던 386세대 탁종렬(구의동 산들어린이집)씨는 연신 "감격스럽다"고 되뇌였다. 탁씨는 "87년 이한열 장례식 때도 현재의 프레스센터까지밖에 못 갔었다"며 이순신 동상 아래까지 가득 찬 추모행렬에 감개무량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날 추모집회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해서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카메라를 들고 집회에 참석한 천민정·현찬양(애니메이션고 1년)양은 "월드컵 덕분에 누구나 모일 수 있고, 모이면 힘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오늘 집회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한 자신들이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면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게 바뀔 것"이라고 당당한 웃음을 보였다.

 

오후 9시, 시청에서 세종로에 이르는 길은 희뿌연 파라핀향이 흘러 넘쳤다. 아이들을 앞세운 젊은 부모들이 삼삼오오 대열을 빠져나오는 뒤로 아직도 많은 깃발들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 네 살된 딸아이를 데리고 지나가던 아빠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두 언니 살려줘요!"


#촛불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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