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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제2차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람이 10만에 달했다고 한다. 이날 광화문을 에워싼 경찰들도, 군데군데 취재경쟁에 나선 외신기자들도, 촛불을 파는 노점상들도 저마다 '10만 촛불시위'를 준비하느라 모두 바뻐 보였다. 비록 준비하는 내용은 달랐지만 그들 모두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다.

1신(미대사관앞 오후 2시)
경찰은 지금 ‘사수’ 준비 중


▲ <미대사관을 둘러 싼 ‘이동방범소’>
ⓒ 오용석
광화문역 3번출구 앞. 복잡한 지하철을 빠져나온 기자를 맨 처음 반겨준 것은 ‘이동방범소(일명:닭장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케한 연기였다.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가 시작되려면 아직 4시간이나 남았건만 벌써부터 닭장차들이 미대사관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도로를 막아서느라 분주했다.

세종로에서 만난 박00경위(북부경찰서 소속)는 미대사관 앞에 전경들을 이중삼중으로 배치하느라 양손에 무전기를 든 채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 오늘 몇 개 중대나 배치됐죠?
“글쎄...한 127개 중대정도요.”

- 동원된 병력은?
“1개 중대가 100명 쯤 되니까 한 15,000명...?”

▲ <미대사관앞에 전경들>
ⓒ 오용석
- 언제부터 배치됐죠?
“아침 10시에 간부회의하고 여기에 1시쯤 왔죠.”

- 지난 토요일(7일)에는 미대사관까지 진출했는데 오늘은...?
“어유, 안됩니다. 오늘은 사수에요. 사수!”

- 지난 월드컵때하고 달리 이곳을 막는 이유는?
“미대사관 앞이 아니라면...아무튼 행사 잘 치루게 협조할 거니까, 걱정마세요.”

2신(광화문 사거리, 오후 2시 30분)
반미, 맥도날드 그리고 딜레마


광화문사거리에서 전경들 꽁무니를 쫓느라 잰걸음을 할 무렵, 교보문고 앞 어디선가 낯설은 일본말이 들려왔다. 너댓명으로 구성된 일본 NHK방송팀이 촬영장소를 잡느라 길거리에서 ‘긴급회의’ 중이었다.

지난 월드컵 때는 국내기자 못지않게 외신기자들도 취재경쟁에 한 몫을 했었다고 한다. 수십만에 이르는 군중들이 온통 빨간색 옷을 입고 거리로 뛰쳐나와 축구경기를 본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제나라에서 보기 힘든 ‘기사꺼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토요일(7일) 촛불시위가 벌어진 광화문에서는 외신기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2시부터 거리에 나와 취재준비를 하느라 코끝이 빨개진 코미코(NHK 방송소속) 기자에게 몇가지 질문을 던져 봤다.

▲ <회의중인 NHK 취재진>
ⓒ 오용석
- 촛불시위를 취재하러 왔는가?
“정확히 말하면 아니다. 대선을 취재하러 왔다. 이번 시위가 대선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아서 여기(광화문) 온거다.”

- 월드컵에 비해 외신기자들을 만나보기 힘든데?
“반미 문제는 미군이 주둔한 아시아 어디에서나 흔한 문제아닌가?”

- 당신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시민들, 특히 젊은층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대선후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궁금했다.”

- 일본에서도 대규모 반미시위가 있었나?
“일본에도 오키나와 여학생 강간사건 때 그랬다. 하지만 한국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시위하는 것은 못 봤다. 특히 젊은이들이 적극적인 부분에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 (시위에 참가한)한국 젊은이들을 본 소감은?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이 많이 보인다는 점에서 특히 놀랍다. 다만, 미국문화에 익숙해진 한국 청소년들이 ‘반미’라는 딜레마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3신(광화문사거리 오후 3시)
니들이 ‘3시 도시락’을 알아?!


▲ <“밥차!” 오후 3시, 때 이른 저녁을 먹는 전경>
ⓒ 오용석
오후 3시. 엔진소리 요란하던 이동방범차에서 전경들이 앞다퉈 내리기 시작했다. 내려온 순서대로 “기준! 하나! 둘!”을 외쳐대느라 야단법석이다. 출동준비가 아니었다. 그들이 내린 이유는 ‘밥차’ 때문이다. 한사람이 도시락 하나씩을 받아들고 다시 비좁은 차에 오르는 모습이 어찌보면 안타깝기조차 했다.

먼저 도착한 전경들이 그렇게 밥차로 모여든 시간, 교보문고 건물 뒤쪽에 자리잡은 전경부대에서 난데없이 “밀어! 으챠! 으챠!”라는 고함이 들려왔다. 신참 전경들이 훈련받느라 고생하는 소리였다. 견장을 단 고참이 시위대를 방패로 밀어내는 비법을 전수하고 있는 듯 했다.

- 신병들인 것 같은데 여기와서도 훈련시켜요?
“안그럼 다쳐요. 다치면 누가 손핸데... 나니까 이정도라도 신경써주죠. 하하하”

▲ <“훈련해야 안다쳐 임마!”>
ⓒ 오용석
- 저쪽 부대는 식사하던데 점심인가요?
“저녁이에요. 미리 먹어야지 이따가는 먹을 시간도 없어요.”

- (추모시위를)같이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마음이야 같죠. 여기 시위하는 사람들 다 내 또랜데. 그래도 근무는 근무니까...”

4신(문화관광부옆 열린시민마당, 오후 3시 40분)
다음엔 우리 아이들과 함께


미대사관 옆 ‘광화문 열린시민마당’에서는 종교계인사들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20여분전 전경 60여 명이 몰려와 현수막을 철거했다고 한다. 다행히 집회에 참석한 학생들 덕택에 떨어진 현수막도 다시 걸렸고 안정을 찾은 목사님들은 추모기도에 들어갔다. 그 기도회장 뒤편에서 10여명의 ‘정토회(불교단체)’ 어머니 회원들이 모여 또 다른 행사 하나를 조그맣게 열고 있었다. 차분한 옷매무시 때문인지 어머니들 인상이 집회나 시위하곤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피켓도 만들고 추모행사도 치루고 나름대로 준비가 단단해 보였다. ‘정토회’ 통일팀 담당자 김은숙 어머님와 몇마디 나눴다.

▲ <준비한 추도문을 낭독하는 정토회 어머니들>
ⓒ 오용석


- 준비하는데 오래 걸리셨나요?
“회원들 연락하고...일주일쯤 걸렸죠. 노래도 준비하고 성명도 준비하고...”

- 자제분은?
“5학년인데...오늘은 안나왔어요.”

- 아이들한테 나가보라고 하시나요?
“친구들하고 모여서 나가보라고 하죠. 다음에는 우리하고 같이 올 생각이에요.”

5신(시청역 지하철노조 사무실 앞, 오후 5시)
촛불시위, 소외된 마이너리티의 희망


광화문 취재를 마치고 시청역을 빠져 나오려는데 지하도 한켠이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지나는 행인 모두가 한번씩은 들렀다 가는 듯 했다. 지하철 해고 노동자들이 조합사무실 앞에 마련해 놓은 ‘부시 공개사과 요구 서명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왠지 모를 미소를 띄며 행인들에게 서명지를 나눠주고 있던 양연수(지하철 해고노동자, 민노당 종로지구당원)씨를 만났다.

▲ <'서명해서 사과받자'>
ⓒ 오용석
- 평소보다 사람이 많나요?
“못해도 다섯배는 되요. 어제는 400명이었는데 오늘은 한 2천이 넘나봐요.”

- 아까부터 웃고 계시는데?
“아 좋아서 그래요. 예전같으면 묻혀지고 소외된 문제였는데...우리 해고노동자 문제도 조만간 국민들이 관심을 보여줄 겁니다.”

- 촛불시위와 권후보 지지율 상승이 관련있다고 보세요?
“민노당은 노동자·농민은 물론 힘없는 소수자 모두의 편입니다. 6개월전부터 효순이·미선이 사건과 함께 해온 민노당에 대해 국민들이 잘 알고 있잖아요.”

7신(시청앞 광장, 오후 4시 30분)
"단지 사고일 뿐 미국인 미워하지 말아요"


광화문 취재를 마치고 도착한 시청앞에서는 안치환의 ‘자유’가 구성지게 울러 퍼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언제 그렇게 모였는지 저마다 초 한자루씩 들고 시청역 광장을 꽉 메웠다. 그런 검정머리의 인산인해 속에서 파란눈의 백인을 찾기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동아시아 담당으로 소개한 로버트(미국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지 소속) 기자는 통역까지 데리고 나와 열띤 취재에 나서고 있었다.

- 한국에 취재온 이유는?
“대선 때문이다. 반미시위가 대선흐름을 만든다는 얘기를 들어서 여기(시청)에 왔다”

-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장갑차 사건은 내가 볼 때 분명 사고였다. 고의가 아니었다.”

- 미국인인데, 반미시위를 어떻게 생각하나?
“사고는 사고일 뿐 미국사람들까지 미워해서는 안된다. 미국인들도 가정이 있는 시민들일 뿐이다. 소파협정이 문제라면 바꾸면 된다.”

▲ <'미국시민은 미워하지 말아 달라'는 로버트 기자>
ⓒ 오용석
-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이런 대규모 시위를 본 적 있는가?
“전혀 못봤다.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단, 미국인에 대한 분노로까지 이어지지 않기 바란다.”

사진 한 장 찍겠다는 주문에 로버트 기자는 기꺼이 승낙했다. 그의 국가도 우리국민들의 요구에 흔쾌히 응해주기 바란다. “소파협정 개정하라!”

8신(시청광장, 오후 5시 50분)
미선이를 못 봐 힘들다


시청광장 풍경 취재를 마칠 쯤 갑자기 기자들이 한 곳으로 우르르 달음질을 쳤다. 효순이·미선이 부모님들이 한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 현장에서 만난 부모님들은 얼마전 TV뉴스에서 볼 때보다 훨씬 여윈 모습이었다. 부모님들은 방송사 기자의 질문에 답하느라,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에 감격하느라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 부시대통령이 전화로 김대통령에게 사과표시를 했는데?
(미선이 아버지)“교만해요. 끝을 봐야해요. 공개사과가 그렇게 어려운 겁니까?”

- 오늘 모인 시민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효순이 아버지)“고맙죠. 고마운데...끝까지 국민들이 함께해야 사과도 받고 소파도 개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시청광장에서 만난 효순·미선이 부모님들>
ⓒ 오용석


이미 많은 인터뷰 경험이 있으셔서 그런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다소 정해진 답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인터뷰 막바지에 미선이 어머니에게 들은 한마디가 기자의 뒤통수를 때렸다.

- 열심히 싸우고 계신데, 지금 힘든 점이 있다면?
“얘가 보고 싶어요...”

부모님들은 다음일정 때문에 서둘러 인터뷰 장소를 벗어났다. 6시부터 시작될 촛불시위 한가운데서 시민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다. 미선이 어머니는 답답한 가슴을 애써 쓸어내고 힘 한번 줘보는 모습이다.

오후 2시부터 촛불시위가 시작된 6시까지 기자는 역사를 새로쓰는데 함께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 자전거를 타고 시위에 참여한 ‘자전거 사랑’ 인터넷 동호회 회장 김석준(45)씨.

▲ <‘자전거사랑’과 ‘발바리’ 동호회 회원들>
ⓒ 오용석


- 70세가 다된 나이에 촛불 하나들고 홀로 참석한 박아무개(69) 어르신.

▲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나왔다'는 어르신(가운데)>
ⓒ 오용석


- 경남 진주에서 ‘가족대표’로 올라왔다는 경애여고 이윤경 학생과 인천 동암역 앞에서 범대위 유인물을 받아보고 부모 몰래 나왔다는 정슬기·최예솔(인천 신명여고) 학생.

▲ <촛불로 하나된 여고생들>
ⓒ 오용석


- 카메라를 들고 '역사의 현장을 취재하러 왔다'는 상명대 이연희(2학년) 학생.

▲ <‘역사를 담으리라’ 취재중인 상명대 학생들>
ⓒ 오용석


- ‘부시사과’ 저금통을 나눠주던 국민대 대선승리단 정성구(3학년) 학생.

▲ <“희망돼지가 아니라 '부시사과'라구요.”>
ⓒ 오용석


- “군복무 빨리 단축해요. 그래야 나도 나가지.”라며 고참 눈을 피해 노점상에서 오징어를 사먹던 전경들.

▲ <“이거 신문에 나요? 걸리면 안돼요.”>
ⓒ 오용석
▲ “니들이 왜 이걸 떼!” 경찰의 기습침투로 아수라장이 된 열린시민마당 단식농성장을 다시 정리하느라 분주했던 카톨릭대학교 학생들.
ⓒ 오용석
▲ “21일에도 또 데리고 올거에요.” 내키지 않아하는 남자친구를 설득해 촛불시위에 함께 나선 열정의 신정여상 학생들.
ⓒ 오용석
▲ “희망촛불 사세요.” 미선이·효순이를 위해, 권영길후보의 선거운동을 위해 희망 촛불팔기에 나섰던 신석진(민노당 남동갑지구당(준) 위원장)씨.
ⓒ 오용석
▲ <민노당이 준비한 '손도장 현수막'에 누군가 이렇게 써 놓았다>
ⓒ 오용석
이들 모두가 14일 ‘10만 촛불시위’를 준비한 사람들이다. 보이지 않던 바로 그 반미의 손이다. 12월 겨울저녁, 서울하늘 아래서 그 손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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