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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1권에서는 대학 시절 같이 학생 운동을 했던 친구 민혁과 벤처회사를 차렸다가 배신당하는 영준이 주인공이다. 눈이 핑핑 돌아가는 벤처기업의 성장과 경쟁, 음모, 배신같은 것들을 중심 축으로 해서 30대 후반 남자들의 삶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정말 정신과 상담을 받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모두 힘들다.
2권의 주인공은 영준의 대학 시절 첫사랑이자 친구인 정신과 의사 인호. 대학 시절 최루탄이 터지는 캠퍼스에서 하늘색 원피스 차림으로 풍경화를 그리다가 민혁에게 뺨을 맞기도 했지만, 정신과 의사로서 영준을 그리고 이제는 민혁을 치료하고 있다.
회사에서 퇴직한 영준은 많은 고민 끝에 대학 때부터 꿈꾸어왔던 이상향인 이탈리아의 눌라치타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눌라(nulla)'는 '아무 것도 아님(nothing)', '치타(citta)'는 '도시, 마을(city)'이라는 뜻, 결국 '눌라치타'는 '아무 곳에도 없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혼했으면서도 전 남편과 섹스 파트너 사이를 유지하며 혼자 사는 자유주의자 인호. 다른 사람들의 불안과 우울을 치료해 주는 것이 직업이지만 자신은 결코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에 갈 곳 없는 여고생 환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옴으로써 비로소 다른 사람을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게 된다.
30대 후반의 벤처기업가와 정신과 의사 등 우리 사회의 주류에 속하는 대학 동창들을 중심으로 그들 사이의 갈등과 우정, 미움, 화해를 그리고 있는 소설 속에서, 드러나지 않게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소설 1권에 등장하는 영준의 큰어머니이다.
영준을 살리고 본인은 물에 빠져 숨진 큰집 사촌형이 있었다.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된 영준, 그래서 영준에게 큰어머니는 그냥 어머니이기도 하다. 괄괄하고 유쾌한 여장부였던 큰어머니는 사촌형의 죽음 이후 무거운 표정에 말수가 적어지셨고, 방학 때마다 일가 아이들이 전부 모여 북적대던 큰집은 차갑고 쓸쓸해지면서 결국 큰아버지의 죽음이 뒤를 잇는다.
직장암 수술을 받으신 큰어머니가 영준의 집으로 오시게 되고, 영준은 20여 년 전 중학교 1학년 때의 불행한 기억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 녹내장으로 거의 시력을 잃으신 큰어머니, 자신이 가실 날을 정해 놓으시고 차분하게 남은 삶을 정리한 다음 베개에 얼굴을 묻고 돌아가신다. 전 날 밤 영준 부부에게 고맙다는 인사의 말씀을 전하시는 것도 잊지 않으신다.
나 대신 사촌형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에서 시작된 인생의 피로감. 큰아버지, 큰어머니, 사촌형, 아들을 큰집 양자로 보낸 친어머니, 모두를 향한 죄책감. 회사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며 시작해 최선을 다했던 직장, 그러나 결과는 친구의 배신과 오해뿐이라는 데서 오는 좌절감. 영안실 마루 바닥에서 터뜨린 영준의 울음에는 인생의 고비마다 겪은 불안이 더 이상 고여있지 못하고 철철 넘쳐난다. 슬프다.
아들대신 목숨을 구한 조카네 집에서 말년을 보내셔야 했던 큰어머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아들의 죽음, 직장암 수술, 녹내장으로 인한 시력 손상, 참 힘든 인생을 사셨다. 그래도 끝까지 조카에게 원망 한 마디 안하시고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신 큰어머니. 차라리 원망을 하고 하소연을 하셨더라면 영준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했을까.
큰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눌라치타를 찾기 위해 떠난 여행길의 시작에서 영준은 자기가 달라졌음을 알게 된다. 죽음이 '의연하고 당당한 절차가 되려면 삶이 의연하고 당당해야 한다'고 느끼며, 충분히 살아야 죽을 자격이 있음을 생각한다. 그리고는 뼈가 시큰거리고 똑바로 설 수 없을 때까지 살 것을 결심하면서, 세상 떠날 때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가리라 마음 먹기도 한다.
큰어머니는 가시면서 영준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을 남기고 가셨다. 배신한 민혁이를 죽일까, 내가 죽을까를 고민하며 잠 못 이루던 영준이의 숨통을 틔어주고 가신 것이다.
눌라치타에 도착한 영준. 이미 그 곳은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말 눌라치타는 우리 마음에 있다는 이야기일까. 영준은 이렇게 말한다.
"유토피아를 그려 놓고 절치부심으로 준비해서는 유토피아가 오지 않는다는 거야. 살아가면서, 과정 속에서 그걸 발견하지 못하면 그건 끝내 오지 않는다는, 뭐 그런 얘기지."
살아오면서 무거운 짐이었고 죄책감의 원천이었던 큰어머니. 그러나 큰어머니는 결국 당신의 죽음으로 영준을 깨우쳐주고 가셨다. 이제 영준은 아무 곳에도 없는 마을 눌라치타를 가슴속에 담은 채, 현실에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살면서 굳게 뿌리 내리고 튼튼한 나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큰어머니가 당신의 죽음을 통해 그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셨다.
(열정과 불안 / 조선희 장편소설, 생각의 나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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