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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왼쪽 쪽 두 번째가 기자.
선생님의 왼쪽 쪽 두 번째가 기자. ⓒ 황종원
'좋은 생각'이 시중에 깔린 얼마 뒤에 그 책을 본 사람이 선생님을 찾아주었다. 금방 달려가 뵙고 싶었으나 선생님과 통화만 하고 선생님이 미국을 다녀오신 뒤에 만나 뵙기로 미루었다.

나는 선생님을 뵈면 드릴 선물을 아내와 함께 준비를 하고, 선생님과 함께 찍었던 그 당시의 사진을 복사를 해서 마련하였다. 거기다가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을 챙겼다. 나는 선생님 댁에 가서 50년 만에 뵙는 선생님에게 큰 절을 올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선생님 댁에 가면 차 한 잔 끓이시는 수고와 끼니때를 맞추어 가면 홀로 계신다는 어른께 폐가 될까 한 편 불안하여 한 번 뵈러 갈 때는 식사 시간을 피해갈 요량으로 오후 2시쯤 뵈올 요량까지 세웠다.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다. 서울 시청 근처에서 뵙자는 말씀이시었다.
나는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다. 연세가 칠순이 넘으시어 먼 걸음 하시기가 어려우실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걱정을 하였으나 선생님께서는 서울 나들이를 이웃집 하시듯 가볍게 말씀을 하시었다.

선생님을 뵙게 되면 시내에서 뵙게 되니 나는 점심시간을 만나는 시간으로 을지로 롯데 백화점 11층 식당가에 있는 식당 이조 앞에서 뵙기로 했다.
"나를 못 찾게 되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선생님은 말씀을 하셨으나 나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순간 서로 알아보듯 나도 그러리라.

약속 시간은 12시였고 내가 도착을 한 것은 10분전이었다. 이조 식당 앞 대기 의자에 한 분의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나는 다가갔다. 내 기억에 있는 옛 모습 20대 선생님과는 다른 칠순의 할머니.

"원경자 선생님이시지요."
"종원이구나. 옛 모습이 있구나. 알아보겠다."

나는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에서도 바닥에 엎드려 절을 드리고 싶었건만 기회를 못잡고, 대신 그 마음으로 선생님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을 50년만에 만났다
선생님을 50년만에 만났다 ⓒ 황종원
우리를 두고 시집을 가셨던 야속한 선생님, 눈을 눈물로 만들어 주신 선생님, 일생을 내 그리움 속에 계셨던 분.

이조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대화는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6.25 사변 직후라서 학교 교실은 가마니였고 학생들은 앉은뱅이 책상을 들고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간식으로 우유가 나오면 허기진 빈속을 채웠으나 철없는 아이들은 천둥벌거숭이였고 선생님은 늘 웃으시면서 우리를 가르치시던 분이셨다.

대전여고를 나오시고 대전 사범을 졸업하신 뒤 교사가 되어 내가 다니던 대전 원동 초등학교에서 5년을 근무를 하시고 24살의 나이에 결혼을 하시었다고 했다.

"종원이 아버님께서 내가 결혼을 한 뒤에 찾아 오셨어. 선생님처럼 학생들을 잘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아이들을 두고 학교를 떠나면 안 된다면서 나를 찾아오셔서 나는 너를 기억을 더 잘해. 그때 학부모의 마음이 고마워서 나중에 친구들을 볼 때 나는 가끔 아버지가 내게 간절하게 말씀하셨던 일을 기쁨으로 말하곤 했지. 이번에는 내 제자가 나를 찾더란 말을 내 친구들에게 얼마나 자랑을 하고 이야기를 했다고……."

그때 나를 울리며 선생님을 빼앗아 가셨던 사부님도 돌아가시고 삼남매만 남았다. 지금은 교회에 다니시는 일로 기쁨을 삼으시는 선생님께서는 60대처럼 정정하시다. 아직은 당신 혼자 몸을 챙기실 수 있으니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계시다.

"교회일이 바빠서 외로울 틈이 없이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의 품에 안기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선생님은 세월의 힘에 눌려 나보다 더 작아지셨다. 이제는 내가 안아드리고 힘이 되어드릴 때가 되었다. 점심을 함께 들고 같은 층에 있는 찻집에서 선생님과 커피를 마주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은 내가 쓴 책에서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부분에 대하여 아주 기뻐하시었다.

"너는 아주 귀여웠어. 장난도 심했고. 내가 아이들을 운동장에서 무용을 가르칠 때 네 아버님께서는 미루나무 아래에서 지켜보고 계신 적이 여러 번 있었어. 관심이 많으셨던 분이셔. 생전에 뵈었어야 할 텐데 돌아가셨다니……. 나도 교편을 잡았던 원동 초등학교에 갔더니 헐렸더구나. 허전했어."

소위 시절 내 뒤에 원동초동학교, 지금은 철거되어 없다.
소위 시절 내 뒤에 원동초동학교, 지금은 철거되어 없다. ⓒ 황종원
그랬다. 나도 소위로 임관을 했던 1970년에 휴가를 얻어 여행을 할 때 학교를 둘렀었다. 그 때는 학교가 있었다. 그 때도 나는 어린 나를 가르치셨던 원경자 선생님을 생각을 했다.
"자주 연락을 드릴게요. 선생님."
선샘님께서는 혼자 좀 앉아서 내가 쓴 책을 보시겠다 하시었다.
"이 책을 여기서 얼른 보고 싶어."

그 책 속에는 내 인생 여로의 종착역에 다 와서 쓴 글들이 있다. 아픔과 그리움과 죽음과 아직은 손톱 눈 만큼 남은 희망 등.
"선생님, 다시 연락 올리고 다시 뵐게요."

말씀드리고 돌아서서 나는 선생님 곁을 떠닜다. 뒤를 돌아보니 내 책을 펼쳐서 보고 계신다. 제자의 흔적이 선생님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보다 슬프게 해드릴지 걱정이 되었다. 밤새 선생님을 모시고 해도 못 다할 이야기를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작은 기억만으로 뱅글 돌고 한 바퀴만 돌고 만 것이 아쉽다.

저녁에 5시 쯤 선생님 댁에 전화를 거니 반기며 받으셨다.
" 무사히 들어 오셨고요. 선생님 아주 반가웠습니다. 선생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하니 선생님은 내 책을 벌써 많이 읽으신 듯,
"부인과 함께 만나. 내가 초대할게. 함께 보고 이야기 좀 해. 정말 오늘은 고마웠어. 못잊을 하루였어. 내게 큰 기쁨을 주었고. 부인이 내게 준 선물도 너무 감사해."

선생님은 늙은 제자가 찾아 주신 일에 이토록 감격하신다. 나는 50년 그리웠던 선생님을 뵈었기에 목마름을 채웠다. 선생님, 그때 아마도 저는 선생님을 사랑했답니다. 그 사실은 모르실 거예요. 나는 그 말만은 내 가슴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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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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