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결혼을 안해서 막내 여동생이 밥해주고 세탁해주려고 같이 살았다. 체홉과 비슷하다. 체홉의 여동생은 체홉이 골빈 여배우와 동거를 시작하니까 집을 나갔다.
내 여동생은 48살이 될 때까지 내가 결혼하면 남편이 있는 필리핀으로 가려고 기다리다가 그래도 안가니까 포기하고 필리핀으로 가면서 나한테 이렇게 얘기했다.
“오빠, 이제 돈 생각안하고 연극을 할 나이는 2년밖에 안 남았다. 이제 환갑이다. 방송국과 같이 하는 마당놀이, 2~3,000석에 되는 극장에서 한 일주일해서 단기간에 돈을 벌 수 있는 아동극, 이런 연극을 40대 때 했어야 하는데 이제 돈벌기는 늦었다. 그렇다면 2년 안에 연극 연출가 채윤일 하면 뭐라는 것 하나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는가? 몸무게가 10킬로가 늘고 기상 시간이 오전 11시다. 나태해진 것 같다.
옛날식으로 몸무게 44kg이였던 그때로 돌아가야 되는데 오빠도 슬슬 권위주의가 된 것 같다. 열심히 연극을 해라. 서울시하고 문예진흥원에서 지원금 나오면 하고 안나오면 안하고. 그렇게 해서 무슨 예술이 되냐.”
그래서 “돈이 있어야 하지” 하니까.
“오빠 집 있잖아. 그거 팔면 되잖아. 망하면 세 살면 되는 거지. 그런 정신없이 지원금 나올 때만 해바라기식으로 쳐다보면 웃기는 것이다.”
그렇게 남편이 있는 필리핀으로 떠나버렸다. 현재 요크셔테리어 개하고 나 만 있다. 내가 집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거 잡힌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작품 30개가 있다. 그것을 2년 안에 하려고 좀 무리수를 둔 것이다.
어떻게 일을 벌이고 나니까 경제적인 문제는 하다못해 국민학교 동문들도
“도울 수 있는 길이 뭐 없냐? 너 그렇게 돈이 없었냐? 장가도 못가고 24평 아파트 잡혀서 연극해야 될 정도면.”
“돈이 없으니까 장가를 못 갔지. 내가 뭐 능력이 없어서 못 갔는지 아냐. 나도 여자 좋아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손 벌리기 싫어서 그렇다. 자존심 하나로 사는 건데.”
판을 벌이고 나니 주변에서 돕는 방법을 잘 몰라서 그렇지 길은 생기는 것 같다. 이제는 어떻게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느냐가 남은 것이다. 제일 먼저 걱정했던 것은 경제였는데 그것은 내가 열심히 해서 좋은 작품만 만든다면 후원해줄 동문들이 생기고 있다.
- 채윤일 하면 잔혹극으로 알려졌는데 첫 공연을 <이상의 날개>로 선택했다. 그 이유는?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해야 될 것인가. 이현화 선생이 쓴 <카덴자>, <산씻김>, <0.917>, <불가 불가>, <누구세요 쉿, 쉿, 쉿>, 이것이 우리 극단이 했던 잔혹극이다. 이현화 선생하면 나고, 둘이 잔혹극이니 엽기극이니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현화 라는 작가는 상식적인 작가가 아니어서 그렇지 연극성은 뛰어난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다뤘던 것이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그 시대 심의가 너무 강해서 중앙정보부 문화 담당관들과 부딪혀야 되니, 은유, 상징으로 갔다. 그래서 잔혹극이 나왔다.
원래는 고문극인데 고문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해서 잔혹극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잔혹극은 내가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사실 불란서의 앙토냉 아르또 라고 잔혹극을 창시한 분이 계신다. 그 시대가 우리를 잔혹극을 만들게 만들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들어와서 <산씻김>을 계속했던 것은 외국에 가야 될 일이 있어서였다. 외국인들이 그 작품을 선호한다. 취리히 연극제에 공식으로 초대받아서 스테이지상 3,000달러씩 받고 호텔에서 숙식해주고, 스위스 4개 도시도 가보고 했다. 유럽은 오라는 곳이 많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것 보다 일단 한국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2004년에는 이현화 선생의 <카덴자>를 가지고 멕시코 ITL 페스티발에 간다.
그런데 군부독제가 끝나니까 그 선생의 작품이 오늘의 관객하고 잘 안 맞는 것 같다. 오늘의 20대 관객은 광주사태도 모르는 것 같다.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번엔 이현화 선생의 작품은 <산씻김> 하나만 넣고 강약을 조절했다. 물론 2003년 문화계에 쇼크적인 프로그램도 있다. 내가 93년에 이윤택씨의 <불의 가면>을 가지고 전라(全裸)연극을 했다. 그와 같은 쇼크적인 작품도 있다.
<이상의 날개>를 선택한 것은 번역극이 범람하던 시절인 1976년에, 나, 지금은 방송 드라마 작가로 명성을 떨치는 정하연씨, 돌아가신 오페라 연출가 문호근, 초대 연우무대 회장이었고 지금은 여의도에서 치과의사로 있는 극작가 오종우, 이렇게 4명이
“우리는 우리의 얘기를 우리의 목소리를 하자. 번역극 계속 해야 남의 것 껍데기만 빌려오는 것이다.”
그래서 76년 창작극을 시작해서 26년 동안 창작극만 해온 것이다. 그 첫 번째 막을 올렸던 것이 <이상의 날개>였다. 그 당시 정치 사회적 이야기를 하자고 출발했는데 처음부터 그러면 블랙리스트 상에 오를 것 같으니까 일단은 이것으로 갔다. 그런데 두 번째 작품이 오종우 작 문호근 연출의 <지하도>였다.
개막 보름 전에 심의하는 곳에서 수정 삭제가 아니라 공연불가로 판정이 나고 얘네 집단 애들 신원 조회 하라 이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하연씨는 방송국으로 가고, 문호근씨 오페라한다고 독일 유학가고, 오종우씨는 치과의사로 갔다가 몇 년 있다가 돌아와서 연우무대 맡는 것이다. 그렇게 비극적 시대를 살았던 적도 있다.
- 올해 공연되는 8편은 다양하다. 작품 선택은 어떻게 했는가?
지금 내가 이렇게 선택한 8편은 연습을 해봤던 검증을 한번씩 해본 작품들이다. 김승옥 선생의 무진기행만 빼고 나머지는 내가 연구생들 데리고 워크샵 비슷하게 하면서 본 공연에 갔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다 하는 카드가 다 있었던 작품들이다.
<난쏘공>은 김영삼 대통령 취임하고 하려다가 조금 놔두자고 했던 것이다. 일단은 굴뚝이 영상미가 되어야 하니까 대형 무대에서 하려한다. 그래서 이것은 연강홀에서 한다. 이강백씨의 <진땀 흘리기>와 <영월행 일기>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다.
2004년이 되면 이연화 선생 시리즈를 할까 생각중이다.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작품이기 때문에 (관객이 많이 올지 모르겠다) 오늘의 관객들은 성인 동화 같은 것에 관객이 많이 몰린다. 제 얘기는 관객이 없는 연극은 무모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연극의 3대 요소가 희곡, 배우, 관객인데. 좋은 관객이 좋은 연극 만드는 것이다. 제가 관객의 성향을 몰라서 이번에는 이연화 선생 작품을 하나만 하는 것이다.
- <불꽃의 여자 - 나혜석>, <이상의 날개>처럼 역사적 인물을 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했는데 어떻게 접근했나?
어렵다. 나혜석이라는 여성에 대해서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있다. 이상 그러면 만나본 적은 없지만 소설, 시, 수필을 통해 가지고 있는 것이 있어서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면 이거 왜 이렇게 다르지 하는 우려가 있다. 저는 외피를 쫓는 것이 아니고 1930년대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천재의 모습은 어떨까? 고민했다.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를 많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이란 분도 경박하고, 어른 애 같고, 장난꾸러기고 이러한 점이 많았다.
여성을 보는 눈이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화나겠지만 여성의 정조라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없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여성관도 그렇고. 육체적 결함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시각이 참 독특한 것 같다.
1930년대 쓴 소설인데 지금 보아도 진부하지 않다. 이것은 100년 후에 읽어도 진부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그런 의미에서 카푸카와 동일하지 않는가. 모더니스트여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2003년 스타팅으로 이것을 고른 것이다.
또 하나의 의미는 문학성이 없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컴퓨터도 그렇고 연극도 넌버벌이라고 그래서 언어를 배제하고 두들기거나 퍼포먼스하거나 한다. 난 의견이 전혀 다르다. 문학을 기본으로 하지 않은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락이다. 예술은 문학성이 내 얘기는 문장력은 없더라도 이것을 이해하고 소화하고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해야 향기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 이번 공연이 초연 당시와 달라진 점?
초연 때는 현대적으로 했다. 지금은 가능한 1930년대를 재현하려했다. 법복도 도서관에서 사진 찍어서 다시 만들었다. 옛날에는 양복입고 그냥 했다. 그리고 초연 때는 소설 <날개>만 한 것이고, 지금은 암전된 상태에서 사이사이 끼어있는 독백을 통해 이상의 여러 작품에서 모자이크 해 넣었다. 이상의 거울도 들어가 있고 바로 죽기직전에 썼던 원고도 들어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초연 때는 이상을 무겁게 갔다. 지금은 역설로 가고 있다. 색동저고리 입고, 분칠하고 장난치고 그런 것은 초연 때는 없었다.
- 극이 미스테리 법정극인데?
<날개> 원작은 주인공 나의 독백이다. 원작대로 하면 모노드라마식이 된다. 연극성을 살리려고 하다보니 드라마 구축이 안 되서 미쓰코시 옥상에서 추락사한 것으로 하고 미스테리 법정극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래서 팜플렛에 관객들이 혼란을 일으킬까봐 원작과 각색의 차이, 그대로 따라가면 책 읽는 것과 똑같으니까 이러이러한 것을 바꿨다고 적어놓았다.
이상을 둘러싸고 있던 증인들의 입을 통해서 이상의 외면을 나타내고, 브릿지 사이에 들어있는 음악, 문장, 시, 수필 등을 통해 이상의 내면을 표현했다. 원작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연극적으로 재생시킨 것이다.
- 음악사용의 원칙
이 소설을 연극으로 할 때 어떤 악기가 좋을까 생각했는데 첼로란 생각이 들었다. 첼로도 여러 리듬이 아니고 딱 하나만 가지고 그것의 강약만 조절하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같은 음이 나온다. 오프닝부터 끝까지 같은 음이 나온다. 속도의 완급만 조절했다.
그리고 이상이 백화점 옥상에서 뛰어 내리는 씬에서 헨델의 메시아를 사용했다. 초연때는 사일런트로 갔다. 싸이렌이 끝나면 정적속에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힘이 안 생겼다. 건강한 일상의 회귀를 나타내려고 헨델의 <메시아>중 가장 클라이막스 부분만 교차 편집했다.
덧붙이는 글 | 공연정보
공 연 명 : <이상의 날개>
공연기간 : 2003. 1. 3 ~ 3. 2
공연장소 : 대학로 소극장
공연문의 : 02-764-6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