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97년 5월31일 한양대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던 제5기 한총련 출범식이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실패하자 한총련이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후 경찰의 프락치로 밝혀진 이석씨가 6월4일 한양대에 자리한 한총련 임시 사무실에서 사망한 것이다.
당시 한총련 간부들은 "한총련 사무실이 어디냐"고 물으며 사무실 근처를 서성이던 이석씨를 발견, 그를 잡아 경위를 추궁했고 이씨는 이 과정에서 사망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그 이전 해인 96년 이른바 '연대사태' 이후 입지가 좁아진 한총련에게는 '치명타'가 됐다. 정권은 한총련에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란 딱지를 씌웠다. 검·경은 '한총련 와해' 작전에 돌입, '전담반'을 편성했다. 소속 대학 학생회장들에게는 "탈퇴하지 않으면 이적단체 구성 및 가담 혐의(국가보안법 제7조 제3항)로 처벌할 것"이라며 자진탈퇴를 종용했다.
한총련 내·외부에서도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부 학생회장들은 탈퇴를 결정했고 새로운 정파의 학생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후 6년 동안 한총련에게는 '이적단체' 딱지가 붙어 다녔다. 한총련 소속 대학의 학생회장들은 선출됨과 동시에 '수배자'가 돼야 했다. 한총련에선 그 수가 해마다 약 300여명에 이를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97년 한총련에 '이적단체'란 멍에가 씌워진 이후 매년 벌어지고 있는 비극이다.
한총련 측은 "매년 새로운 기수가 세워지고 있으며 이적성의 빌미가 된 연방제 통일 등의 강령도 수정했다"며 "이적성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현실 속에서 매년 300명씩의 한총련 대의원들은 젊은 나날을 수배생활로 채워야 한다.
그렇다고 1997년이 한총련 역사의 오점만 남긴 해는 아니다. 최대의 위기를 겪은 반면 본격적인 개혁의 움직임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총련의 급격한 위상변화가 일어났던 1997년을 말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당시 제5기 한총련 의장이었던 강위원(32)씨다. 97년 7월 한총련 학생들과 농활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연행, 구속된 강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이 적용돼 징역 6년에 자격정지 5년,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1년 6개월을 감형받아 4년 6개월 동안 수감됐다가 지난 2001년에야 출소했다. 한총련 관련 양심수 중 최장기수였다.
그런 그가 석방되자마자 한총련 합법화에 발벗고 나섰다. 출소 이듬해인 2002년에는 각계 인사 2500여명 및 60여개 시민단체의 뜻을 모아 '한총련 합법적 활동보장을 위한 범사회인 대책위원회(이하 한총련 합법화 대책위)'를 결성했다. 그리고 한총련 이적단체 규정이 부당함을 주장하는 각계 인사의 이야기를 모아 단행본 <한총련 이야기>를 펴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5일 오후 서울 충정로에 자리한 한총련 합법화 대책위 사무실에서 강위원씨를 만났다. 그는 "전날도 수배중인 후배의 고민을 들어주느라 밤을 꼬박 샜다"면서도 피곤한 기색 없이 인터뷰에 응했다.
그런 그에게 "아직도 이렇게 한총련에 목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일종의 부채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옥중에서부터 '감형된 시간만큼은 한총련을 위해 내 할 일을 다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그는 석방되고도 '자격정지 5년' 때문에 사회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탓에 지난 해 11월 대선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 해 12월31일 있었던 정부의 특별사면·복권·감형 조치에 따라 사면됐다. 이제서야 법적인 제약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강씨는 "올해엔 97년 제적 처리됐던 모교에서도 전격적으로 복적 조치를 취해 학업을 마칠 수 있게 됐다"며 "2학기 동안 충실히 다니면 내년엔 졸업할 수 있을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다음은 강위원씨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왜 아직도 한총련에서 자유로울 수 없나?
"일종의 부채감 때문이기도 하다. 옥중에서 결심했다. '감형 받은 시간동안 한총련의 정치적 미제를 청산하는 데 힘을 보태자'라고. 그 미제란 바로 세가지다. 첫 번째는 한총련 이적규정 철회이다. 두 번째는 (97년 9월 경찰의 기습검거를 피하기 위해 달아나다 사망한) 김준배(당시 한총련 투쟁국장, 광주대 졸업)씨 사건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이다. 세 번째는 역시 97년 발생한 이석씨 치사사건과 관련한 민사배상문제 해결이다."
- 97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아직도 굴레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사실 괴롭다. 지금 하는 일은 내 나이나 주변 상황에 맞는 일은 아니다. 내 또래 친구들이 하는 일과 비교해봐도 그리 생산적이지도 않고 사회적 여건도 좋지 않다. 미래 지향적인 일이 아닌 과거 청산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일로 몸도 안 좋아진 상태다. 얼마 전에 가슴이 답답해서 병원에 갔더니 '화병'이라고 그러더라(웃음)."
- 97년 이후 한총련 내·외에서 주장하는 한총련 합법화가 왜 아직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보는가?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한총련 외부의 문제고 다른 하나는 한총련 내부의 문제다.
한총련 외부의 문제란 곧 정치권과 법원의 문제다. 정치권과 법원이 서로 시소 게임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정치권에서는 '법원에서 제대로된 판결을 내릴 문제 아니냐'고 하고 법원에서는 몇 년째 그대로인 판결을 내리고 있다. 사실 황당한 문제다. 6·15 공동선언 시대에 수 백명씩 양심수 수배자가 생기고 그중 90%가 한총련 소속 대학생이다. 우리사회는 왜 이 문제에 침묵하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힘들고 답답하다.
내부의 문제란 곧 한총련 문제다. 제도적인 합법성에 연연하지 않고 학생사회 내의 건전한 진보적 에너지를 어떻게 운동 마인드로 승화시킬 것인가에 관한 얘기다. 한총련이 중심이 돼서 이런 일을 이끌어 줬으면 하지만 현재 한총련의 활동은 너무 비효율적이다. 정직한 자기검열이 필요하다. 이런 내 비판의 진정함이 후배들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측면도 있어서 또한 힘들다. 선배로서 '면도날' 위에 서있는 기분이다."
- 15일 한총련이 기자회견을 갖고 "취임 전까지 합법화를 위해 총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한총련 합법화 대책위는 어떻게 이를 도울 계획인가?
"정치권과 한총련 사이의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인수위나 정치권에 한총련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접촉을 시작했다.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학생운동권 선배들이 돕고 있다. 대책위 공동대표로 있는 임종석 의원은 최근 인수위에 '한총련 합법화를 위한 제안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송영길 의원 등이 대책위 주축으로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 현재 한총련 관련 수배자 현황은 어떠한가?
"확인하기로는 10기 한총련 대의원 중 총 178명의 학생들이 수배중이고 구속자는 20여명이다.
97년 이후 수배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6∼7명이다. 그런데 구속이 돼도 보통 1∼2개월씩의 미미한 형량을 받는다.
심지어 지난 94년이후 수배됐다가 지난 2001년에 구속된 한 대의원은(ㅈ 대학 총학생회장) 1달 반만에 형량을 채우고 풀려나기도 했다.
자신의 정치적 자유와 소신을 지키기 위해 7년을 수배생활했는데 구속기간은 1달 남짓인 셈이다. 계속 '학생 전과자'만 양산하고 있는 꼴이다.
이는 형식적인 굴레 씌우기다. 국가 공권력이 어린 학생에게 '수배자' '전과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엄청난 일을 너무 쉽게 행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한총련 일각에서는 '어차피 매년 수배될 거 아예 연초에 다 구속됐다가 1개월씩 살고 나와서 떳떳하게 1년 사업 진행하자'는 우스개를 하기도 한다. 웃지 못할 상황이다."
- 한총련 합법화 대책위 구성은 어렵지 않았나?
"어려웠다. 출소하고 나니 내로라하는 명망가들, 민주화운동의 거두들이 한총련 문제로 만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 했다. <한총련 이야기> 출간을 위해 '100인 인터뷰'를 하려 했는데 거기서부터 막혔다. 다들 한총련 문제를 인권이나 정치·사상의 자유 측면에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견해 일치 여부의 문제'로 받아 들이더라. 충격이 컸다. 그만큼 한총련이 '외로운 섬'이 됐구나 하는 반성을 했다.
이후 교수 80여명의 서명을 받는데도 한 교수당 전화를 1시간 이상씩 해야했다. 그런데 1시간 이상씩 설명을 해드리고 나면 납득을 하시고 서명에 흔쾌히 동의하시더라.
이런 과정을 거쳐 <한총련 이야기>를 펴냈다. 이 책이 출간되던 날 한총련 합법화 대책위도 결성식을 가졌다. 책 출간과 대책위 결성만으로도 한총련 합법화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 지난 해에는 어떤 활동들을 벌였나?
"지난 해에는 구속된 김형주 제10기 한총련 의장의 재판과 관련해 법률적 대응을 준비했다. 각계 전문가 40여명의 소견과 여·야 의원의 탄원서를 받아 재판부에 제출했다. 조희연 교수(성공회대)와 임종석 민주당 의원이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또한 한총련 문제를 인권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국제적인 압력을 가하기 위해 지난 해 8월 유엔(UN) 인권 이사회에 제소하기도 했다. 그외에 <10기 한총련 강령규약 개정을 위한 공청회> 및 <이적규정 철회를 위한 학생운동 20년 토론회> 등 토론회를 주최했다."
- 강씨도 수배생활을 했으니 현재 수배중인 후배들을 보면 남다른 느낌일 것 같다. 어떤가?
"어제도 5년째 수배중인 박제민(2000년 서총련 의장)이라는 후배를 만나고 왔다. 새벽 3시에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만나러 갔더니 여자친구 문제부터 장래 문제…. 이런 저런 고민들을 쏟아 놓더라. 그 후배도 눈이 안좋아져서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상태다. 그렇지만 병원에 가지 못하니 병을 키우고 있다. 안타까웠다.
사실 3∼4년동안 그렇게 살면 사회 적응력도 급격히 떨어진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정부가 '사회 부적응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얘기다. 또 잠인들 제대로 자겠는가? 나도 해봐서 알지만 밤마다 고민을 한다. '내가 신념과 사상의 문제를 내동댕이칠 것인가.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인가'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심리적으로도 굉장히 피폐해진다.
언론에도 알려졌지만 역시 수배생활 중인 윤용조(2002년 부산대 총학생회장)군도 4년째 수배생활을 하고 있다. 윤군의 경우엔 불치병인 심근염을 앓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수배 3년째부터 몸이 안좋아졌는데도 수배중이니 병원에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른 이의 건강보험증을 갖고 친구들의 보호를 받으며 병원에 가 진단을 받고 나서야 알게된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경찰에선 양보하지 않더라. 병원에선 스트레스를 받으면 구토를 일으키는 등 악화되니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는데 '3개월 동안 시간을 줄테니 치료해서 괜찮아 지면 구속수사를 하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부모는 또 어떻겠는가. 3∼4년 동안 전화통화만으로 연락하다가 겨우 얼굴을 보게 됐는데 불치병이라니. 답답하다."
-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 거는 기대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 근거있는 기대를 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 저명한 인권 변호사이기도 했고 국민 경선 과정 등 후보시절에 '저명한 학생단체를 법적으로 제약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나. 이념 공격을 받을 걸 예상했을텐데도 그런 소신을 밝혔으니 기대가 남다르다.
또한 '선거혁명'을 통해 당선된 분이니 구시대의 유물 청산 차원에서 양심수 석방·한총련 합법화부터 국가보안법 문제까지 개혁의 바람을 일으켜주길 바란다. 특히 '원칙과 상식'을 주장해온 분으로 알고 있다. 민주주의의 상식에만 따라도 한총련 이적규정은 풀릴 것이다."
- 개인적인 계획에 대해서도 말해달라.
"20대에는 하고 싶었던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옥중에서 여러 책을 접하게 되면서 학문 탐구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 앞으로는 남북 관계와 관련된 '통일시대의 지방 분권과 자치화'등에 관련된 분야를 공부해 보고 싶다. 아니면 학생운동하면서 해왔던 사회복지운동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싶다. 이후에는 그에 걸맞는 직업을 찾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