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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소혁
나의 고1 때 담임 선생님은 매우 검소한 분이었다. 언제나 도시락을 지참하였고 일년 내내 같은 양복만 입고 다녔다. 눈이 몹시 나쁜 탓으로 도수 높은 안경을 썼고 자그마한 체구에 턱이 약간 토라진, 깐깐한 수학 선생님이었다.

"나는 단벌 신사야. 이 옷은 가을부터 내년 봄까지 입어. 주말을 이용해서 세탁은 자주 하니 염려 말아."

무척이나 엄하면서도 유머 감각이 능란하셔서 수업시간이나 조회 종례 시간에 때때로 폭소를 자아내게 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시험을 봤는데, 열 문제를 출제하고는 틀린 수에 따라 종아리를 쳤다.

그래서 수업시간이면 매맞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했고, 나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은 종아리가 성할 날이 없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영어 단어를 외다가 전신주에 여러 번 부딪쳤어."

@ADTOP5@
선생님은 당신 학창 시절 공부한 얘기를 틈틈이 들려주면서 무섭게 면학을 닦달하였다. 나는 선생님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그것은 나의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입학시험에 합격은 했지만, 입학금을 제 날짜에 못내 입학식이 끝난 후 학교를 찾아 사정 끝에 입학 수속을 마쳤고, 교복도 교모도 신발도 다른 애들보다 남루했다.

그 무렵 나는 초점 잃은, 의기소침한 시골뜨기 학생이었다. 그 새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한 차례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아버지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자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등록금이 밀리고, 도시락도 못 가지고 다닐 형편이었다.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나는 도저히 학교를 다닐 수 없어서 휴학계를 써 인편으로 학교에 보내고, 낯선 서울 바닥에서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이듬해 봄, 복학하려고 학교를 찾았다. 무작정 기약도 없이 팽개친 학업을 다시 하기 위해 찾았던 그날의 감격은 내 평생 못 잊으리라.

지난해 담임 선생님이 무척 반갑게 맞아주셨다.

"휴학계를 보낸 그날, 내가 박군 집을 찾아 나섰지만 끝내 못 찾고 돌아왔었지."
선생님은 내가 미처 몰랐던 지난 얘기를 말씀하셨다.
"그래,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ADTOP6@
ⓒ 임소혁
선생님은 그 동안의 내 사정을 경청해주셨다. 한 달만에 형무소에서 풀려난 아버지가 당신 생활 근거지였던 부산으로 내려가시자 곧 어머니도 따라가셔서 그 무렵 나만 혼자 서울에 남아 자취를 하면서 신문배달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고생이 많군. 어때 내 집에서 함께 지낼까? 내가 숙식은 무료로 제공할 테니 배달수입으로 학비나 하고."

나는 뜻밖의 선생님 제의에 너무나 놀랐고 한편으로 고마웠다.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해 등록금 독촉으로 야속하게 생각하고 매사에 무섭기만 했던 선생님의 얼굴이 그렇게 다정다감할 수 없었다.

"말씀 고맙습니다만, 저 혼자 충분히 꾸려갈 수 있습니다."
"오늘 당장 결정 못 하겠거든 내일 우리 집에 와서 결정해."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올해 몇 학년을 맡으셨습니까?"
"올해에도 일 학년이야."
"그럼 저를 다시 선생님 반으로…."
"그렇게 하지."

나는 이튿날 선생님이 그려주신 약도와 계란 한 꾸러미를 들고 홍은동 문화촌 선생님 댁을 찾았다.

"학교 다닐 때는 남의 신세를 질 수도 있는 거야."

선생님은 여러 차례 같이 지내자고 간청했지만, 나는 고마운 제의를 끝내 사양했다. 다시 선생님 반에서 지내는 일년 동안 또 다시 선생님을 불편하게 해드렸다. 주로 등록금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다른 학생보다 나에게 무척 관대했다. 소풍 때도, 수업이 늦게 끝난 날 청소 때도 선생님 마음씀으로 신문배달에 지장이 없었다.

내가 모교 교사로 부임하자 선생님은 이미 퇴직하셨다. 그 무렵에는 선생님의 고마움을 미처 절실히 못 깨달은 탓으로 나는 애써 선생님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교단 경력이 더해 갈수록, 선생님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그때마다 나의 배은망덕이 부끄럽기만 했다.

나도 교단에 선 이래 담임을 여러 번 했고, 때때로 가정 사정으로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이 있었지만, 나는 지난날 선생님처럼 선뜻 그런 온정을 한번도 베풀지 못했다.

세대 차이일까? 요즘 교사들은 사도의 길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가난한 학생을 따뜻이 감싸주는 아름다운 스승의 훈훈한 미담은 점점 메말라간다.

나는 현재 서울 한복판 고교 교사지만 솔직히 말해 요즘 같으면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0교시 수업이다, 특기적성교육이다, 야간 자율학습에 매번 열외되는 학생을 학교에서는 문제학생으로, 골치 아픈 학생으로 달달 볶여서 제 풀에 지쳐 자퇴하고 말았을 것이다.

일부 교사 중에는 가난한 달동네 학교보다는 부자 동네 학군 학교에 근무하고자 이사를 다닌다고 한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랴. 나도 오십 보 백 보인 것을.

선생님! 선생님을 닮지 못한 저를 지난날의 수업시간처럼 제 종아리를 두들겨 주십시오. 저는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습니다.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다'라는 요즘 세태에 저는 훌륭한 스승을 가졌다는데 긍지와 행복감을 느낍니다. 건강하십시오.

이종우 선생님!

덧붙이는 글 | '지리산의 야생화' 사진 게재를 허락해준 사진작가 임소혁씨는 지리산이 좋아서 지리산에서 살면서 오로지 지리산을 시로 필름으로 담아내고 있다. 임 작가가 펴낸 책으로는 <일출집> <한국의 지리산-CD롬> (한빛 미디어) <쉽게 찾는 우리산>(현암사) <지리산- 영혼이 머무는 곳에서>(다른우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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