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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사랑은 장모,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했던가. 올해 76세이신 나의 시아버님은 감정 표현은 별로 안하시지만, 늘 깔끔하게 자기 관리를 하셔서 세 며느리에게 아직까지 어떤 부담도 주신 적이 없으시다. 세 며느리 모두 친정에서는 막내로 자랐지만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일정한 거리감 때문인지, 눈에 띌만큼 애교스럽게 구는 며느리는 한 명도 없다.
시부모님과 나는 같은 지하철 역의 이 쪽 끝과 저 쪽 끝에 살고 있어서 아주 가끔 지하철 역에서 아버님과 마주치는 일이 있는데, 그 때 "아버님, 어디 가세요?"하면서 반가운 마음에 슬쩍 팔짱을 끼는 정도가 내가 아버님께 드러내 보이는 유일한 친밀감이며 살가운 행동이다.
결혼 10년 넘게 특별히 가까워지는 일도, 특별히 멀어지는 일도 없이 지내온 아버님이 어느 날 "나한테도 네 시어머니말고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놀랄까. 그것도 만일 내 남편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짐을 싸서 내 곁을 떠나버린 직후라면 말이다.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편은 짐을 싸서 집을 나가고 클로에는 어린 두 딸과 덩그마니 남겨진다.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다. 그 때 시아버지가 세 모녀를 시골집으로 데려간다. 시아버지는 쌀쌀맞고 과묵하고 무뚝뚝하고 화를 잘 내며 자기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고 애정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다.
눈물이 쏟아지고 화가 나 어쩔 줄 모르는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고, 시아버지는 그런 며느리 앞에서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65세의 시아버지는 마흔 두 살에 만나 5년 7개월 동안 이어진 마틸드와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무수히 원하고 무수히 포기하며 포만감과 팽팽한 긴장 속을 오간 두 사람의 사랑이었지만, 시아버지 피에르는 마지막 순간 처성자옥(妻城子獄)에 갇힌 자신을 받아들이며 가정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 후 시아버지의 삶은 며느리 클로에가 느끼고 보아온 그대로 기분이나 감정같은 건 없는 사람 같았으며, 약하고 감상적인 모습은 남의 이야기였다. 늘 최고 종교재판관같았던 시아버지의 사랑 이야기에 클로에는 놀라면서도 극심한 혼란을 느낀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낸 시아버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하기 위해 가정을 떠나버린 남편. 클로에의 당황함과 분노 속에는 시아버지가 못 이룬 꿈을 아들이 대신 이룬 것 아니냐는 비아냥도 물론 들어있다. 하지만 작가는 마지막에 시아버지의 입을 통해 "딸아이는 좀 더 행복한 아빠랑 살기를 바라지 않았을까"라고 하며, 가정을 지키는 쪽으로 손을 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래, 시아버지에게도 사랑이 있었겠구나. 그 주름진 모습 어느 틈엔가 사랑의 기억이 새겨져 있겠구나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얼마나 노년을 사랑과는 먼 존재로 보고 있는지. 그저 자식들을 향한 육친의 내리 사랑만을 그들의 사랑으로 규정해 놓고, 그 틀에서 벗어날 생각을 해본 적 조차 없는 것을 깨닫는다.
떠나버린 아들 뒤에 홀로 남겨진 며느리를 보며, 시아버지 피에르는 그동안 잊은 듯 묻어두었던 자신의 사랑을 기억하고 깊은 회한에 잠긴다. 남겨진 사람의 고통만이 아니라 떠난 사람의 아픔도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하는 피에르의 마음 속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아직도 너무 절절하다.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내야 했던, 젊은 날 자신의 용기없는 모습에 대한 후회가 가정을 지켜낸 것에 대한 안도의 마음보다 조금 더 큰 무게로 시아버지에게 남아 있는 것 같다. 떠나야 할 때 과감히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부러워하는 피에르의 모습에서 노년 역시 한결같은 인생의 갈등 위에 놓여있음을 실감한다.
아무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고,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어 노년에 돌아보는 사랑은 그만큼 더 애틋하고 절실하다. 사랑과 사랑의 기억 역시 젊은 사람만의 것은 아닌 것. 기억할만한 사랑을 간직한 것만으로도 그 노년은 충분히 아름답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은 며느리 클로에가 아니라 시아버지 피에르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JE L'AIMAIS / 안나 가발다 소설, 이세욱 옮김, 문학세계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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