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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밥을 먹으며 열 살 짜리 작은 아이가 하는 말. "내가 43년 전에 엄마 대신 외할머니 딸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유는 할머니가 끓인 된장찌개가 훨씬 더 맛있고, 할머니는 바느질도 잘 하셔서 생활 한복까지 직접 만들어 주시는데다가 머리를 예쁘게 땋아 주셔서 좋단다.

아이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내 마음은 샘이 좀 났던가. "다 좋은데, 그러면 너 아빠 딸 못한다"하니 아이는 깜짝 놀라며 이제까지 한 말 다 취소라고 손을 내젓는다. 아이에게 할머니는 엄마와 하나로 이어진 편안한 물길 같은 모양이다.

책〈참 다사로운 어머니께>는 스물다섯 글자에서 서른다섯 글자 사이에 담은 어머니를 주제로 쓴 짧은 편지글 모음이다. "엄마, 나는 이담에 커서 집에 있을 거야. '어서 와'하고 맞아 줄 거야. 놀아 줄 거야."라고 쓴 아홉 살 여자 아이의 글에서부터, "어머니, 여든 둘이 되었습니다. 넉넉한 할아버지가 되어 세상에 도움 되려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하는 80대 할아버지의 글까지 사이좋게 섞여 있다.

엄마 품과 엄마 손이 한없이 그리운 어린 아이들, 끝없는 간섭과 잔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보니 이제야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아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중년의 자녀들, 자신이 머리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엄마라고 부르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노인들. 정말 우리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일까.

짧은 글 한 편에 코끝이 찡해졌다 싶으면 이어지는 글에서는 지하철 안이라는 것도 잊고 쿡쿡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렵다.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어쩜 이리도 비슷할까 싶어 신기하기도 하다. 벗어나고 싶어 애를 쓰다가도 문득 돌아가려 하고, 등 돌려 거부하지만 어느 새 내 안에 자리잡은 똑같은 모습에 절망하기도 하고, 이렇게 우리는 어머니가 주신 몸과 마음의 밑 그림자를 지우지 못한 채 나이 먹어 가는 것일까.

77세 희수(喜壽)를 기념해 묶은 아버지의 책 제목은 "어머니의 기도"였다. 할머니께서 백일 치성을 드리고 얻은 만득(晩得)이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전쟁 중에 나흘을 기약하고 잠시 고향 함경남도 문천을 떠나 몸을 피하셨는데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셨다. 올해 81세이시다.

아들과 헤어지신 후, 다신 만나지 못한다 해도 아들의 생사만이라도 알게 해주십사 하는 기도를 하루도 빠짐없이 드리셨을 할머니를 생각하며 책에 "어머니의 기도"라는 제목을 붙이셨다고 하신다.

'땅에 누워 계시더라도 절대 눈 감지 마시고 이 책을 보시면서 꼭 저를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하고 쓰신 아버지의 애통함을 철부지 막내 딸은 중년에 접어들어서야 겨우 실감한다. 어머니는 이런 존재이구나 싶다. 머리 하얗고 주름으로 뒤덮인 할아버지의 눈에 그리움으로 눈물 고이게 만드는 존재, 아무리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의 시절이라 해도 어머니가 계시기에 돌아보게 만드는 존재 말이다.

책 속에서 어머니를 향해 편지를 쓰는 노년은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쏟아놓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우지 못한 상처를 슬쩍 드러내기도 한다. 한편 자녀들의 편지의 대상이 되는 어머니들은 또 다른 노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욕심스럽게 드셔도 돼요. 여기저기 배회하셔도 돼요. 저를 못 알아보셔도 괜찮아요. 어머니 오래만 사셔요, 응." "말 못 해도 괜찮아. 구들장 신세라도 괜찮아. 살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푸근한 걸." 고령의 몸으로 힘든 병을 앓고 계시는 어머니를 향한 자녀들의 애틋함에 마음이 촉촉해진다.

고단한 세상, 부대끼며 사느라 어머니를 잊었던가. 짧은 편지글 하나 마음 속에 쓰며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하신 그 분을 기억해 보는 일, 마음이 조금 넉넉해 질 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전화를 바꿔드리면서 '엄마 갑돌이한테서 전화왔어요'하면 웃으시는 엄마. 아직도 그렇게 아버지가 좋으세요?" 책에 실린 글을 흉내내 본 나의 작품(?)이다.

(참 다사로운 어머니께 / 마루오카 마을 엮음, 노미영 옮김 / 마고북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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