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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들 녀석 덕에 기자와 인터뷰를 다 했습니다. 아내가 큰애의 두 번째 국토 종단 소식을 몇 군데 언론사에 제보했나 봅니다. 그것을 보고 모 영자지 기자가 연락을 해왔고, 그제 행군 중이던 아이와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열혈 엄마 덕에 이른 나이에 언론에도 나오는군요. 그 참에 알았겠죠. 애비 되는 이도 국토종단을 한 번 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보충 취재랄까, 기자분이 전화로 연락을 해왔던 겁니다.

국토 종단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뭐냐고 묻더군요. 제가 국토 종단을 한 때가 벌써 2년 전입니다.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 20일간 걸었습니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들이 수줍게 꽃망울을 벌리던 때였죠. 저는 해남 땅끝에서 임진각까지 화신과 함께 북상하는 길이었고요. 주로 1번 국도를 따라 걸었습니다.

봄이라지만 드넓은 남도 벌판을 따라 넓게 트이고 길게 누운 도로변은 적잖이 추웠습니다. 더러는 춘설이 난분분 날리기도 했고, 어느 날은 꽃샘추위랄까 바람도 제법 매웠습니다. 애기똥풀 자운영 제비꽃 따위들이 길가 논둑 사이로 비죽 고개를 내밀고 모진 바람을 맞으며 와들와들 떨고 있었습니다. 보리밭에도 마늘밭에도 대궁이며 싹들이 한 뼘씩 올라와 바람 따라 이리저리 쏠리고 와삭거렸습니다.

저 작은 풀들도 꽃 하나 피우자고 모진 바람 맞으며 부대끼는구나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왈칵 묵지근한 것이 치밀어 명치께가 뻐근했습니다. 전주에서 왕궁으로 넘어가던 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제가 궁한 집 제사 돌아오듯 자주 맞이하는 통풍이 오른 발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아 벌겋게 독이 올랐던 날이었거든요. 한 걸음 한 걸음 떼기가 심히 고통스러웠습니다. 바람이 거셌고 몹시 추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그저 걷다가 땅에 깔리다시피 자그마한 풀꽃들의 흔들림을 본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저렇게 작은 풀조차 어려움을 이겨낸 뒤에 꽃을 피우는데, 하물며 사람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어찌 없을소냐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그것을 작은 깨달음이라 말해도 좋고, 어디서나 먹물 티를 내고야 마는 속물근성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만, 그 느낌이 국토종단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인터뷰는 길게 이어졌습니다. 종단중 아쉬웠던 점을 묻는 기자에게 저는 또 이년 전을 더듬으며 푸짐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시네마 천국>이란 영화를 보셨죠? 거기서 알프레도 할아버지가 사랑의 열병을 앓는 토토에게 공주를 사랑한 문지기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백일 동안 창문 밖에서 자기를 지켜주면 문지기를 사랑하겠노라는 공주의 말을 듣고 병사는 공주의 창문을 지키기 시작하지요. 비바람이 불고 모진 추위가 몰아닥쳤어도 병사는 공주의 창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백 일째 밤입니다. 먼동이 터오고 조금 뒤면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공주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공주도 자못 가슴을 설레며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고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병사가 자리에서 일어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공주의 사랑을 손에 넣을 수가 있는데 말입니다.

제가 국토 종단을 하면서 그 병사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겠더군요. 몸은 조금 고달팠지만 정말이지 전 국토 종단이 즐거웠습니다. 한순간 한순간이 행복했지요. 삼백 명이 넘는 우리모두앙들이 물질적으로 메일과 전화로 격려를 해줬고, 안티조선일보운동 사이트인 우리모두(http://neo.urimodu.com/)에 매일 올리는 국토종단 기행문에도 나름대로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lub_health_jongdan). 저는 진심으로 행복했습니다.

국토 종단이 제게 얼마나 간절한 꿈이었는지는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필생의 꿈을 이루는 행진인데다 주위의 호응도 뜨겁다 못해 환호와 열광의 차원이었으니 행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요. 게다가 안티조선운동을 대외적으로 알린다는 점에서도 제법 효과가 있었고요. 아, 제가 국토 종단을 결심한 두 가지 이유가 바로 평소의 꿈을 이뤄보겠다던 것 하나와, 안티조선일보운동을 알리고 실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도착하고 이제 이틀 뒤면 목적지인 임진각을 앞에 두고 있을 때부터는 우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임진각이 몇 킬로미터 남았다는 이정표를 만날 때마다, 그 거리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는 제 마음은 무거워만 갔죠. 그리고 정말 몇 킬로 남지 않았을 때는 그만 두고 싶어졌을 정도였습니다.

아마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하나는 조국의 분단 현실 때문이었죠. 왜 더 이상 가지 못하는지, 왜 우리는 둘로 갈라져서 서로를 미워해야만 하는지 등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더 이상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몹시 원통했습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조국 통일은 먼 이야기가 아니라 당장의 소원이었고 바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마 이런 거였을 겁니다. 꿈은 결과로 행복하기 보다는 꿈을 꾸는 그 자체가,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행복이라는 이유 말입니다.

아마 그 병사는 공주가 자기를 만나러 맨발로 달려오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공주가 자기보다 더 신분이 좋고 훌륭한 남자를 만나길 바랬는지도 모르죠. 아무튼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공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순결하고 진실하며, 공주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견뎌야만 했던 수많은 시간과 어려움 끝에 정련된 자기의 사랑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요? 그 모든 어려움과 유혹을 견디고 이겨낸 뒤에는 결과 따윈 아무래도 좋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저도 그랬습니다. 임진각이 가까워져올수록 제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냥 이 길로 백두산까지 걷고 싶었습니다. 어차피 미완으로 끝낼 수밖에 없는 여정을 임진각까지 가서 그예 더 이상 가지 못함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종단 동안 아무리 어려워도 두 발로만 걸어내겠다던 첫 약속은 요행히 지킬 수 있었습니다. 순간 순간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순수한 형태의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더 이상 걷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겼던 걸까요?

누구는 물을 지도 모릅니다. 병사의 마음만 소중하냐고, 공주의 사랑은 어찌 되는 것이냐고. 하지만 사랑이 반드시 쌍방향적일 필요는 없지요. 병사는 공주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니지요. 오히려 병사의 사랑은 더 순수한 형태로 불타올랐을 겁니다. 그리고 사랑은 조건을 내거는 것이 아니지요. 무엇을 해주면 사랑해주겠다는 말은 사랑으로 사탕발림한 거래일 뿐입니다. 요즈음 흔하게 볼 수 있는 싸구려 사랑이지요.

외견상 병사는 공주의 사랑을 얻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병사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공주를 사랑할 것입니다. 비록 일어나 돌아 나왔지만 그에게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보초 임무지요. 영원히 공주 옆에서 보초를 서고 있겠지요.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분단이 깨지는 그 날, 저는 하던 모든 일을 집어던지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시작할 겁니다. 저 역시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애초의 꿈은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반쪽이며 미완의 사랑이었습니다. 지금 제 눈에는 황해를 건너온 거센 바람이 징게멩게 외야밋들을 지나 완주벌 가득히 불어오던 날, 길가에서 흔들리던 풀꽃들이 보입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론 아름답지 않습니다. 꿈꾸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서 별별 추한 꼴을 견디고 이겨내는 것이 삶이다. 던 고 김현님의 말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평안하십시오.
낡은의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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