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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2차 대 이라크 전쟁 위기가 세계를 엄습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테러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민주국가들이 방어적이자 정의로울 수밖에 없는 전쟁을 수행해야 할 것이라는 부시행정부의 주장을 목격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현재 핵과 대량학살무기의 최대보유국이자 지난 냉전시기 사실상 최고수준의 테러국이자 후원국이었던 미국이 대 테러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미 대통령 부시의 표현에 따르면 테러에 대한 전쟁은 민주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이다.
이때 우리는 정의의 전쟁이라는 낯익은 용어를 50여년 전 한반도(개인적으로 '반도'라는 용어는 식민용어이지만 통용되므로 부득이 사용)을 휩쓸었던 전쟁에서 재발견하게 된다.
당시 김일성과 이승만 양자도 다같이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정의의 전쟁론을 부르짖었었다. 그리고 이러한 김일성의 국토완정론과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나아가 한국전쟁 발발의 과정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비교정치학자이자 한국전쟁 연구가인 박명림이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나남출판, 1996, 1권-결정과 발발, 2권-기원과 원인)에서 상론했었다.
발간될 당시 한국전쟁에 대한 이론과 사실을 맞물려 풀어낸 그 책의 두터움은 양과 질에서 공히 압도적이었다. 그것은 누가 전쟁을 일으켰느냐에 대한 질문의 현재성과 중요성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잘 드러냄으로써 상투적으로 응고되어 있던 우리들의 역사의식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이는 누구는 직접적 체험으로, 누구는 듣고 배워 상식선에서 한 마디씩은 할 수 있다는, 그리고 이제는 더 끌어낼 것도 없이 지나가 버린 과거사라고 간주하기 쉬운 한국전쟁이라는 주제에 그만이 오랜 시간을 두고 철저하게 학문적으로 고민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번에 발행된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나남출판, 2002.11) 역시 그러한 철학적 모색의 연장선상에서 전쟁 초기인 1950년 후반기 6개월간을 집중탐구한 사실적이며 이론적인 연구이다. 사실 나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간행물인 <아세아연구>지에 발표되었던 몇 개의 연구물들을 읽은 적이 있다. 읽었을 당시 김일성 정권의 남한 통치와 민간인학살에 관한 부분은 상당부분 다른 연구자들과 언론에 의해 공표된 것이었지만, 한미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북한 인민군의 방비부분을 필자가 새롭게 밝혀내고,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북한통치에 관한 부분을 상론했던 것이 인상깊었다.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는 이 점을 충분히 살렸으며, 특히 사실적인 면의 의미를 해석해주는 척도인 이론적인 면을 보강하여 역사적 사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짚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편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저서에서 박명림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많지만, 그 중에서 그가 직접 밝히고 있는 핵심적 주장은 다음과 같다. 즉 한국전쟁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할 때 ① 미국의 기본적 전쟁전략은 무조건 항복정책(unconditional surrender)이었다는 점 ② 미국의 전쟁제한전략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정책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정책강요의 결과였다는 점(중국인민군과 북한인민군의 공세에 따른 패퇴를 의미한다) ③ 소련의 전쟁전략이 오히려 제한전쟁전략이었다는 점에서 국제정치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어온, 소련팽창주의의 연장으로서 한국전쟁을 접근하는 전통주의 해석은 물론, 한국전쟁에서의 미국정책에 대한 일반적 해석인 제한전쟁이론은 사실과 다른 오류였다는 점이다.
또 제한전쟁 테제, 수정주의 이후 최근 재등장한, 한국전쟁의 주요 결정 및 국면을 전부 오인(misperception)이론에 바탕하여 해석하는 틀(오인이론) 역시 이론과 사실 사이의 괴리하는 심각한 문제를 던진다는 점에서 옳지 못하며 사실 오인의 산물이 아니라 미국의 일관된 전략과 정책, 그리고 그것들이 기반한 이념과 세계관의 산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미국의 총력적인 세계화한 국지전쟁(globalized local war)이었다는 주장은 여기서 연유한다.
한편 분단주의와 특수주의(예외주의) 또는 상황우선의 논리를 넘은 자유, 민주주의, 평등, 평화, 인권과 같은 보편가치를 담은 보편주의를 지향하고자하는 저자에게 전쟁초기 국면의 민간인 학살문제의 현실적 해결은 '가장 어려운 장(章)'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모두에게 역사와 과연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상대방의 절멸을 통한 완전한 승리(저자는 이러한 절멸주의적 정책과 사고는 더이상 한국문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를 통해 한반도를 통일하고자 했던 김일성 정권(최대강령노선)과 이승만 정권, 미국의 부정적 통합정책의 산물인 민간인학살 문제(국가테러리즘의 문제)가 전쟁연구가 본질적으로 평화연구일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한다는 저자와 우리들의 인식을 짓누르는 것이다.
투투(Desmond Tutu) 대주교가 제시한 네 가지의 선택, 곧 ① 응징과 보복 ② 뉘렘베르크(Nuremberg) 방식(재판) ③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④ 남아프카식의 길, 즉 진실과 용서의 교환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해야 할 것인가? 저자는 한국식 길로 아마도 남아프리카식의 "진실과 화해의 결합"이거나, 또는 "그 이상의 무엇"이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제2차 대 이라크 전쟁 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는 현재 한반도 역시 한국전쟁 이후 항상적인 전쟁위기속에 놓여있다. 민주주의를 향한 인류의 노력은 왕(王)없는 곳은 없다는 자본주의 이전 시기 한 필부(匹夫)의 고정관념을 상당부분 와해시켰다. 하지만 전쟁은 어떠한가? 아직도 세상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다. 박명림이 말했듯이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목적과 함께 수단, 절차의 민주화가 오히려 본질적이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불사한다는 언설은 허위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평화적 수단을 통한 평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평화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휴머니즘에 기초한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한국군에 대한 전시 작전통제권의 문제와 북한지역에 대한 남한의 통치권의 문제를 저자가 언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반도와 세계에 전쟁을 가져오는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논리를 부수고 우리들의 올바른 주권정치를 실현시키는 것은 당연하게도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관용과 관용받음의 관계조차 넘은 남북의 상호존중이다.
다수의 오자와 약간의 불균형적인 서술을 제외한다면 박명림의 이 저서는 좌우로 편향되기 쉬운 우리들의 인식을 재차 균형잡아 준다는 의미에서, 일독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 박명림 <<한국 1950 : 전쟁과 평화>>(서울 : 나남출판, 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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