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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성산 정상에 있는 진사 최경운 전적비
ⓒ 최연종
화순에 오성산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실제로 가 본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성산성은 뭇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숱한 세월을 우리들 뇌리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산성에 얽힌 사연을 접하면 금세 부끄러운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오성산성은 화순읍과 동면의 경계인 오성산(290m) 일대에 있다. 화순읍에서 가까운데다 정상부근까지 길이 잘 닦여 있어 산성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쉬운 편이다.

화순읍 제일 초등학교 앞길로 가다보면 양계단지가 있다. 이곳 정문 맞은 편으로 난 숲길을 타고 곧장 가면 산 중턱이 나온다. 이 곳에 차를 세우고 산성을 알리는 안내표지판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곧바로 정상. 화순읍의 전경이 정겹게 다가온다. 정상에는 3개의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 곳이 진사 최경운(崔慶雲)이 왜군과 맞서 싸운 격전지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최경운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노복 등 화순현 주민 500여명과 함께 오성산에 올라 꼬박 사흘 동안 왜군 3,000명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하지만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아들과 함께 오성산성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산성터는 대나무 밭 아래와 건물지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석축은 대부분 훼손돼 있다.

오성산성(전남도 기념물 제193호)은 화순현의 주성(主城)으로, 총 길이가 675m 내외로 비교적 작은 규모. 성 안쪽에서 다양한 기와와 토기 파편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테를 두른 듯한 모습의 테뫼식 산성이다.

현재 묘지가 있는 곳이 당시의 성 안쪽으로 이 곳에 성과 관련된 건물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건물지 앞쪽의 석축 밑에 우물이 있지만 지금은 많이 메워진 채 흔적만 남았다.

삼천(三川) 최경운(1525∼1597). 일찍이 기대승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뒤 1567년에는 진사시에 합격한다. 하지만 벼슬을 마다하고 경학(經學)에 전념해 후진들을 가르쳤다. 三川(삼천)은 경장(慶長), 경회(慶會) 두 아우를 두었는데 임란이 일어나자 아우들과 함께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는 등 3형제가 힘을 합쳐 의병을 일으켰다. 한 명의 문과 급제자를 내기 어려웠던 당시에 3형제 모두 대과에 올라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예전의 오성산은 산마루가 널찍한데다 힘들지 않고 오를 수 있어 소풍코스로 좋았습니다. 산성 안에서는 아우 최경회 장군이 말타기,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들었지요. 송전탑을 세우면서 성벽의 돌들을 빼다가 철탑 주춧돌로 쓰는 바람에 석축이 많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돌을 가져다 묘지를 쓰는 것도 아주 흔한 일이었습니다" 후손인 최재양(화순읍 향청리)씨의 하소연이다.

오성산 정수리와 입구에는 철탑이 꽂혀 있어 오성산에 서려 있는 선인들의 정기(正氣)를 크게 훼손하고 있다. 부끄러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앞으로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산성을 발굴, 복원하도록 하자. 정상에는 전망대도 세우고 최경회 사당 ∼ 오성산성에 이르는 탐방로도 개발해 이 곳을 관광벨트화해서 오성산성을 화순의 명소로 바꾸는 일이 우리들의 몫이다. 그래야만 선인들을 욕되게 한 죄를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지 않을까.

10여년에 걸쳐 복원해 관광명소로 바뀐 담양의 금성산성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오성산성은 화순을 상징하는 의미가 깊은 산성인 만큼 역사적으로 재조명해 가꾸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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