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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하 성장소설 <양철북>
ⓒ 시공사
같은 제목이지만 다르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서 파시즘에 환멸을 느낀 오스카는 다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성장을 거부한다. 반면, 이산하의 근작 <양철북>(시공사)의 주인공 고교생 '철북이'는 세상과 끊임없이 부딪치며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성장소설'이라는 부제답다.

소년문사(文士)로서의 치기와 오만에 경도된 '철북이'를 어른으로 키운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추수가 한창인 가을들판을 지나던 철북이와 철북이의 스승이자 젊은 수도자인 법운스님이 주고받는 대화를 엿들어보자.

"철북아, 니 저기 뭔 줄 아나?"
"메뚜기 아입니꺼?"
"나도 안다..."
"알면서 와 묻십니꺼?"
"..."
"철북아, 니 저기 뭔 줄 아나?"
"메뚜기말고 또 있어예?"
"아니, 메뚜기..."
"싱겁기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저만큼만 됐으면 좋겠다."
"뭐가요?"
"...화두."
"화두...?"
"저 메뚜기들같이 단숨에 훌쩍 뛰어넘어뿌면 얼마나 좋겠노..."


이산하의 <양철북>에는 한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다.

책 속에는 열 여덟 고교생의 가슴을 설레게 한 첫사랑 '채송화'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착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독해져야 한다"는 공안(公案)을 던져준 외할머니 견성스님의 쪼글쪼글한 미소가 있고, 발원지 불분명한 설레임으로 소년의 가슴을 뒤흔든 아름다운 비구니 해인스님의 새하얀 발이 있고, 대오(大悟·속세의 흔들림에서 벗어나 큰 진리를 깨닫는 것)를 위해 피로 불경(佛經)을 필사하는 '혈사경'을 마다치 않는 법운스님이 살고 있다.

책의 서두. 이산하는 어린 시절 잃어버린 소를 찾아 헤매다 목격한 기괴하고도 감동스런 풍경을 생생히 기억해낸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을 기어오르는 두꺼비의 새끼들. 천적과 궂은 비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손톱만큼씩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을 보며 이산하는 그때 이미 '성장한다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 체득했는지도 모른다. 사찰마다에서 만나는 심우도(尋牛圖)의 풍경.

문우이자 이산하와 함께 70년대 중반 한국의 고교생문단을 양분했던 안도현 시인은 "이 소설의 주인공 양철북 속에 지금의 이산하 시인이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본다"는 말로 <양철북>에서 서술되고 묘사되는 내용의 상당부분이 이산하 자신의 성장기임을 암시하고 있다.

비록 한 학년 아래 후배였지만, 노장(老莊)에서 가스통 바슐라르까지, 톨스토이에서 파불로 네루다까지를 사통팔달(四通八達)하던 이산하의 개똥철학과 고고한(?) 문학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소월시문학상 수상작가인 이문재(시사저널 편집위원)의 발문 '철북, 상백, 륭, 산하'를 읽는 재미는 <양철북>의 근사한 덤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철북이의 정신을 키워주는 스승 법운스님은 한국 구도소설의 최고봉이라 할 김성동의 <만다라>에 등장하는 법운과 꼭 같은 법명(法名)을 쓴다. 구도(求道)와 성장(成長)이 다른 이름을 가진 같은 의미의 단어라면 <양철북>은 <만다라>의 청소년 버전?

마지막으로 여담 하나.

▲ 이산하 시인.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지난 구정날 밤. 어찌어찌한 이유로 엄마-삼십대 중반인 기자는 물론, 마흔을 훌쩍 넘긴 이산하도 아직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를 만나러 가지 못한 경상도 촌놈 둘은 홍대 앞 한 술집에서 새벽까지 권커니자커니 잔을 돌리며 취해가고 있었다.

유난히 쓰게 느껴지는 맥주 맛 때문이었을까? 뜬금없는 질문을 이산하에게 던지고 말았다. "그래서, 잃어버린 소는 이제 찾았습니꺼?" 대답 없이 특유의 소리 없는 웃음을 보이던 이산하. 그 모습이 미륵보살반가석상(彌勒菩薩半跏石像)의 미소인양 보기가 좋아 더 이상 아무 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답 없이도 알 수 있었다. 이산하는 아직도 소를 찾아 헤매고 있으며, 그 '헤매임'이야 말로 여전히 열 여덟 소년의 눈망울을 가진 이산하를 성장시킨 힘이라는 것을.

양철북

이산하 지음, 양철북(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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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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