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형은 <청춘예찬>, <대대손손>, <쥐> 등의 작품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는 연출가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동아일보에서 연극인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차세대 한국 연극계를 이끌 가장 유력한 연출가로 뽑혔다.
극작과 연출을 동시에 하는 그는 우리 주변 서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그 속에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 다소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하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나 쉽게 느끼고 감동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 점이 박근형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는 2월 14일부터 공연되는 <집>(박근형 작/연출, 국립극단 달오름극장)을 준비중이다. 작년 가을, 국립극단이 가족을 주제로 올렸던 세 편의 작품(길 위의 가족, 집,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 중 한편인 이 작품은 올해 국립극단 우수 레퍼토리에 선정되어 단독으로 공연하게 되었다.
2월 6일 오후, 연습이 한참인 국립극단 연습실에서 연출가 박근형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동아일보 조사에서 차세대 한국연극을 이끌 리더로 뽑혔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다른 분들에 비해 공연양이 많았던 것 같다. 어떤 배우를 추천할 때 자주 보는 배우가 바로 생각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실제 연출 작업을 하는 또래들이 많지 않다. 몇몇 능력 있는 분들은 연수를 가고 그래서 겸사겸사 그랬던 것 같다.”
- 연극은 어떻게 시작했는가?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을 하고 싶었다. 당시 기자가 되는 꿈과 연극배우가 되는 꿈이 있었다. 기자는 공부를 잘해서 신문사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지 못했다. 당시 사건기자가 되고 싶었다.
또한 연극도 하고 싶었다. 처음에 연극에 스텝이라는 것은 없고 배우만 있는 줄 알았다. 고3때 연극 좀 하게 해 달라고 연극하는 단체를 찾아갔다. 청소라도 하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학교는 졸업하고 오라고 했다. 고3 겨울에 연극하는 단체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연극이라는 것을 접하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극에 분야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분야가 많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절망이었다. 배우라는 것을 쉽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원하는 데로 활용할 수 있게 근사하게 만들어야 했다. 또한 소리도 좋아야 했다. 소리가 좋다는 것은 아름다운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가 여러 가지를 표현하는 소리를 말한다. 또한 머리도 중요했다. 해박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세상에 대해 알아야 했다. 괴로웠다. 그래서 포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스텝이란 분야가 있었다. 이것 한번 해보자 생각해서 스텝으로 시작했다.”
-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연극계 뛰어들어 지금의 위치까지 올랐다. 그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
“어려운 것도 있고 재미있는 것도 있었다. 연극을 하게 되면 궂은일을 많이 하게 된다. 그것이 많이 도움이 된 것 같다. 이것은 그냥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또래들이랑 연극 시작했을 때 ‘우리 나중에 잘되면 후배들에게 잘해주자’라고 각오를 다졌다.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다.
그런데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연극하는데 지장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누구나 할 수 있다. 연극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우리끼리 한번 해 보자라는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어떤 누가 자리를 만들어준 적이 거의 없다. 연출도 누가 연출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다. 또래들이랑 ‘한번 해보자, 안 되면 다음에 하고’그렇게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 운이 좋았다는 것은 대학을 안나왔기 때문에 전문적인 연극과정을 공부하지 못해서 생기는 어려움도 있지만 반대로 연극과정을 거치면서 연극은‘이렇게, 이렇게 만들어야 해’라는 공식이 없으니까 이렇게도 만들고 저렇게도 만들었다. 이것이 장점이 되었다.”
- 연극인생에 영향을 준 연극인이 있다면?
“여러 선생님도 있고 동료도 있다. 그 중 연출가 기국서 선생님께 많은 것을 배웠다. 그분이 직접 연극 교육을 시키지는 않았지만 술자리도 다니고 이것저것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연극은 그냥 연극을 위해 존재한다’는 이런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 분을 만나 보니까 연극을 하는 것과 사는 것은 별로 구분 지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면서 연극하고 연극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분은 연극의 주제나 글쓰기의 본질을 파악하는 힘이 강하고 세계, 우주 이런 성찰이 강하다. 나는 그것이 지금도 약하다. 깊이가 없는 편이다. 어깨 너머로 그분 생각이라든가 그분이 표현하고 싶어하는 연극세계를 보았고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 극작과 연출을 같이하고 있다. 그것의 장단점이 있다면?
“글을 쓴다는 것이 처음에는 어마어마하고 거대하고 힘든 것이라 생각했다. 제가 속해있는 76극단에서는 배우들이 토의해서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다른 단체보다 많았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낙서 같기도 하고 메모 같기도 했던 얘기가 연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희곡 또는 문학의 벽이 생각보다 아주 쉽게 무너졌다. 그래서 쓰게 됐고, 쓰면서 연출했다.
단점이 있다. 텍스트가 견고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제가 문학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텍스트가 견고하지 못하다. 소위 말하는 명작이라는 작품에는 정확한 분석이 필요한 대목이 있다. 그런데 제가 쓰고 연출하다보니 뭐가 좀 이상하면 텍스트 자체를 수정하게 된다.
연출만 한다면 텍스트를 바라보는 냉정한 시각이 생기거나 나름대로의 시각이 생긴다. 그런데 혼자 하게 되니 작가와 연출이 싸울 필요가 없다. 그런 면에서 작품도 견고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해서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
- 애초 극작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이 무대화하면서 바뀌는가?
“그렇다. 우선 제일 큰 이유가 경제적 여건 그 다음 배우에 따라 달라진다. 저는 연습을 많이 안하는 편이다. 배우에게 많이 의존하는 편이다. 어떤 부분은 배우에게 네가 써봐라 바꿔 바라 이런다. 애초에 생각했던 이야기가 배우들을 만나게 되면서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 배우들을 만나면서 그 배우를 통해 애초에 생각했던 것 보다 인물이 살아나는 경우도 많았고 반대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 만들어온 작품들을 보면 서민들의 사실적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체험이 바탕되었는가?
“직접 체험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간접체험이거나 관찰이다. 제가 넉넉한 집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서 친구들이나 주변을 이루는 환경이 말씀하신 그런 부류이다. 그래서 응접실에서 일어나는 얘기는 가끔 듣거나 대충 알 뿐이지 그런 상황을 잘 모른다. 그러니까 이야기들이 구질구질하고 궁상스런 얘기들을 하게 된다.”
- 극사실의 연출 스타일을 추구한다. 그 이유는?
“연극은 많이 보지만 연극적 형식을 배운 적이 없다. 형식적인 면이 약해서 그런 면도 있지만 스타일적으로 그것이 편하다. 예를 들어 책장이 있다고 치면 무대위에서 진짜 책장을 갖다 놓는 것 보다는 책장같이 생겼으되 좀더 가볍고 효율적인 책장의 무대를 만드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 누구한테 위촉해서 무대나 소품을 준비 할 여건이 되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또 하나는 그냥 책장을 갖다 놔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제가 해온 연극의 환경적 요인과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 일관되게 추구하는 소재나 주제가 있는가?
“일관되기보다 추구하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사람은 희망을 가지려 하지만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야기가 거창해지는데 '인간은 영원히 비극적이다’라는 것을 믿는다. 희망이라는 것을 갖고 살 뿐이지 더 좋은날은 오지 않는다고 본다. 다만 조금씩 좋아질 뿐이다.
또 하나 이율배반적일지는 모르겠는데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와 지금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물론 15년 전에 비해 지금은 너무나 좋아졌다. 그런데 크게 보아 거의 비슷하다고 본다. 그런 얘기를 연극에서 해보고 싶다.”
- 자신의 작품 중 애착이 가는 작품이 어느 것인가?
“<아스피린>이라는 작품이 있다. 동학 얘기를 한 것이다. 그 작품과 <대대손손> 이라는 작품을 꼽고 싶다. <대대손손>은 곧 다시 해보고 싶다. 소극장에서 해서 오히려 소극장에서 생기는 맛도 있지만 무엇인가 구멍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 넓은 극장에서 해보고 싶다.
- 연습중인 <집>이란 작품은 어떤 작품인가?
“<집>은 사실 저희 어머니가 놀러 다니는 친구네 집 이야기이다. 대부분 남자분들이 먼저 죽는다. 그러면 나이 드신 할머니들이 심심하니까 친구 집에 가셔서 소일거리 삼아 10원짜리 화투를 친다. 그런 집 이야기이다. 아주 작은 집이다.
이 <집>에 등장하는 가족들이 다 힘들다. 직장도 변변치 않다. 말이 좋아 작가지 평생을 실업자로 사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문학청년의 꿈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도 이것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누나는 머리에 바람만 들어서 카드 빚이나 있고 건달 매형 만나서 구박받으면서 산다. 그나마 집하나 있는 것도 카드회사에서 차압 들어오니까 방 빼주고 이 엄마네 집에서 산다. 사실 보면 사회에서 비리비리 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이다.”
- 작년에도 이 작품이 공연됐었다. 올해 특별히 달라지는 것이 있는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작년에는 연작으로 세 작품을 같이 올려 배역이 부족해 연수단원들이 아줌마역할을 했다. 물론 그때도 재미있었지만 아줌마 역할을 하기에는 나이가 젊은 분들이었다. 올해는 그 역할을 국립극단의 여자 단원들이 맡는다. 그 다음 애초에 뜻은 그렇지 않았는데 막상 공연을 올리다 보니까 그리고 제가 쓰고 제가 연출하다 보니까 작년에는 보지 못했던 구멍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런 구멍을 메우고 있다. 관객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게 연습하고 있다”
- 올해 계획이 어떻게 되는가?
“<대대손손>이라는 공연을 다시 할 생각이고, 겨울에는 <쥐>라는 작품을 소극장에서 할 것이다. 연말에 난로 피워놓고 공연 끝나면 거기서 고기도 구워먹고 선배님들 친구들 모아놓고 매일 파티 할 생각이다.”
- 연습 중인 공연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 <공연정보>
공 연 명 : 집
공연기간 : 2003. 2. 14 ~2. 23
공연장소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문의전화 : 02-2274-1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