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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얼굴 전 출품작품
ⓒ 임재광
우리나라에서 미술분야 만큼 일반 대중과 거리가 먼 예술 장르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예술 분야에 비해 무척 폐쇄적이다.

예를 들어 문학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직접 교유한다. 책값은 보통 사람들도 별 부담 없이 지불할 만하다. 음악도 그렇고 영화 또한 감상하는 데에 큰 경제적 부담은 없다. 이렇게 작품과 일반대중이 직접 조우하는 시스템에서는 관객의 반응이나 평가가 즉각적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이에 비하여 미술은 극소수의 경제적 능력이 있는 구매자에 의존하는 유통구조를 가지고 있다. 미술 작품의 가격은 대체로 일반인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정도를 넘어 선다.

사실 미술 감상을 하는 데에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돈이 필요 없다. 입장료를 받는 미술관이나 소수의 기획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시장에서는 무료다. 오히려 관람객에게 각종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미술가들은 대중들의 관심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다만 동종업계인 미술계 내에서의 평가나 소수의 영향력있는 특수한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무료 입장하는 관객의 반응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예술활동에도 경제행위를 통한 영향력이 가장 막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가들은 미술계라는 폐쇄적인 울타리 안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훈장을 달아주기도하고 왕따도 시켜가며 아옹다옹 살아간다. 대중의 반응이나 평가는 애시당초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여러분들은 미술전시회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일이 있는지?
학교때 감상 숙제 때문에 억지로 갔거나, 아는 사람이 전시를 하기 때문에 인사로 그냥 들른 것말고 그냥 순전히 전시를 보기 위해 전시장을 찾은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아마 많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도 일반인들에게는 미술전시장이 친숙하지 않다. 특수한 사람들만 드나드는 이색적인 장소이다. 그래서 전시회를 보기 위해 일부러 전시장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어색함을 다소라도 덜고 부담없이 잠시 들러 볼 수 있는 곳이 백화점 화랑이다. 백화점에서 일반 매장을 둘러보듯이 가볍게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이다. 대전지역에서 활동하는 현대미술가 발굴과 소개를 주로 해 온 대전 롯데화랑에서는 백화점 화랑의 이러한 장점을 살릴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일반인들이 직접 작가로 참여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시 명칭은 <자화상-얼굴 전>

총 214점의 작품이 전시되는데 그중 미술을 전공한 작가들은 133명이고 나머지는 일반인들이거나 어린이들이다. 참가자들의 나이는 5살부터 57세까지 폭이 크다. 이 전시의 특징은 '기존 미술전시회의 권위와 틀'을 파괴 한 것이다. 예를 들면, 첫째로 미술인과 일반인이 구분이나 차별이 없이 한 장소에 같이 전시함으로서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누구나 예술가다" 라는 요셉보이스의 메세지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즉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으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모두 다 화가다"라는 주장에 다름 없다. 이 주장대로라면 저 높은 곳에서 예술이라는 관념의 틀에 매여있던 예술을 한층 끌어내린 것이 된다.

▲ 자화상-얼굴 전 출품작품
ⓒ 임재광

둘째로는 작품의 배치와 설치의 방법에서 기존 갤러리의 권위적인 방법에서 탈피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그림을 설치하는 방법은 매우 도식적이다. 눈높이에 맞추어 적당한 간격으로 견고하게 거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는 액자도 하지 않은 그림을 그냥 핀으로 꼽았을 뿐만 아니라 얼굴 형상을 그리며 자유롭게 붙여 놓았다. 즉 한쪽 벽엔 눈 모양을 그리며 작품이 걸리고 다름 벽에는 입모양을 따라 걸리고 하는 식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림에 작가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아서 작품의 오리지날리티를 무시한 것이다. 작품에 대한 일종의 지적 소유권은 작가들이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부분으로 좀체 양보 할 수 없는 사항이다. 기존의 미술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일로 상당히 파괴적인 일이다. 이렇게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일은 관점에 따라 좋게 해석 할 수도 있고 나쁘게 볼 수도 있다.

위의 첫 번째 예와 같이 전문 화가와 화가 아닌 사람의 작품을 같이 취급함은 예술작품의 가치기준을 혼란케 한다. 우수한 작품과 범작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그림이 각기 다름만 인정될 뿐 질적 수준의 차이는 없다. 예술은 무엇이며 예술가는 누구인가? 에 대한 논란이 남는다.

두번째의 작품 설치 방법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재미있다는 평가도 가능하겠지만 너무 산만하고 유치하다는 지적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는 "작가는 없고 기획자만 있다"는 비난도 가능하다. 현대는 '기획자의 시대'라고 할 만큼 기획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림은 '캔버스에 물감을 가지고 그려낸 작가의 작품'이라면 전시회는 '작가라는 재료로 전시장을 꾸민 기획자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작가의 위치가 점점 왜소 해 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 익숙해진 기획자가 작가를 너무 무시하지 않았는가 하는 지적도 가능하다.

상반된 평가가 가능한 것은 그만 큼 새로운 논점을 제시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미술과 대중과의 거리좁히기는 우리미술계가 계속 추구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자화상은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전시회에는 잘 나오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과의 대면이지 타인과의 조우를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자리에 모아보면 군중 속에서 자아를 찾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서구에서는 렘브란트와 고흐가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의 윤두서의 초상이 독보적이다. 자화상은 자의식이 강한 작가가 많이 그렸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이랄까.

▲ 자화상-얼굴 전 출품작품
ⓒ 임재광
이 전시를 기획한 롯데화랑의 윤후영 큐레이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의 다양성을 은유하는 전시"라고 말한다. 그러나 "획일적 욕망의 그물 안으로 스스로 빨려 들어가길 원하는" 세태를 지적한다.

"얼굴은 갸름해지길, 코는 오똑 높아지길, 눈은 칼을 대서라도 크게...."

다양성을 포기하고 획일화의 덧을 스스로 채우는 현대인들의 모순적 특성은 적어도 이 자화상 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작품 규격을 A4 용지 크기로 제한을 하였음에도 재료와 기법이 너무도 다양하기에 작품 하나하나가 개성이 넘치고 있다. 비전문인과 어린이의 그림도 이러한 다양성에 묻혀 못 그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 전시에는 프로와 아마추어가 같이했음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름'은 있어도 '작품의 수준차'는 없다.

1월 31일에 시작한 이 전시는 2월 13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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